한국

796/ 거제도 포로수용소 비사-김태일 지음

최해식 2019. 4. 21. 16:55

-남북한 간의 이해관계의 상충으로 한쪽에서의 善이 다른 한 편에선 惡이 될 수 있고, 또 한편에서의 좋은 일이 다른 한쪽에선 나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서로의 입장과 이해관계와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엄연히 있었던 사실을 기술해야 하므로 나는 내가 보고,듣고,경험한 사실들을 정치적 편견 없이 사실위주로  기술하려고 노력했습니다. -9-


-공자는 "옛 것을 배워 익히고 나아가 새것을 알아야 스승이 될 수 있다" 고 했습니다. 신세대가 새것만 알 것이 아니라 옛것을 잘 익히고 참고하여 새 세대를 이끌어 가야 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10-


-북한은 6월25일 새벽 4시20분경, 진격 명령을 내려 남한을 전면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북한 방송에서는 남한의 국군이 전38선과 특히 옹진반도에서 먼저 북한을 4~6km 북침해 왔기 때문에 북한군이 반격한 것이라고 공식 성명을 발표하였다.-20-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수락의 조건을 제시하였으나,미국이 수락하지 않자, 1953년6월18일 25,000명의 반공포로들을 승인없이 대통령 임의로 전격 석방하였다. -26-


-"자식이 부모의 은공을 알고 효도하려 할 때는 이미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이 세상에 없다" 는 옛말이 바로 나를 두고 하는 말이다. ........소학교 때부터 줄곧 최우등생이어서 부모님께서는 내게 희망을 크게 걸고 계셨다.  제일 기대를 걸고 키운 자식이 후에 제일 불효자식이 되었다는 말이 있듯이, 내가 바로 그러한 불효자식이 된 것이다. -45-


-추위와 굶주림에 야윈 내 몸을 만지면서 갑자기 서러운 마음과 어머님 생각에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마음과 몸이 약해지면   어머님 생각이  간절한 것은 자연의 이치다.인간이란 별것 아닌 존재이며,며칠사이에 흉한 몰골이 될 수있는 약한존재임을 느꼈다-61-


-조개 속에 들어간 모래알 때문에 진주가 생겨나는 것처럼, 거제도는 포로를 싸안고 고통 하던 아픔 때문에 이제 세계적인 명소가 되엇다. -73-


-다부동 전투에서 국군이 한때 밀렸을 때 맥아더 사령부는 다부동을 빼앗기면 미군을 한국에서 철수시키겠다고 정일권 참모총장에게 위협한 일화가 있다는 곳이다.-96-


-우리들이  소처럼 끌려 다니지만 언젠가는 자유 천지에서 활개 펴고 다닐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개처럼 먹고 돼지처럼 엉겨켜서 자는 지옥 같은 환경과 역경 속에서도 우리는 생을 포기하면 안 된다.-100-


-미8군 정보처(CIC)에 근무한다는 최문관의 진짜 이름은 정박민이었다. 그는 과거 일제시대 친일파였던  자기의  정체를 감추기 위해  이름과 성씨도 최 씨로 개명한 것이다. -102-


-'가네모도(최문관)'는 일본군 충견이 되어당시 조선학도병 출신 탈영병은 거의 모두 그가 잡았다고 한다.  당시 일본군 헌병 하사는 대단한 권력을 가지고 세상에 아무것도 무서운 것이없엇다고 한다. ......그 '가네모도' 일본놈 밀정은 지금은 미군 수사기관에서 문관으로 세도를 부리고 있고, 옛 상관이던 이명춘은 감시병의 총부리 밑에서 잡초를 뽑고 있는 포로 신분이엇다. -105-


-MP들에게 우리들은 모두 우익 반공포로들이라고 밝혔지만 그들이 중얼거리는 말투는 우익이고 좌익이고 너희들에게는 필요한지 몰라도 우리들에게는 상관없다 하는 표정들이다.   동족끼리 서로 싸우고 죽이는 파렴치한 인간들이라는 눈치이다.-109-


-반공포로수용소에는 태극기를 높이 달아 휘날리고, 친공포로수용소들에선 북한의 인공기를 휘날리고 있엇으니, 거제도 땅은 당시 순전히 대한민국과 인민공화국이 함께 공존하는 섬, 또는 대한민국 속의 북한인민공화국이 공존하는 것 같은 진기한 풍경르 연출하고 잇었다. -148-


-미군들은 대부분 반공정신이 투철하지 못해서인지 아니면 정치적으로 무관심해서인지, 좌익,우익에 대하여 전혀 관심이 없는것 같았다. 우리들이 반공구호를 이치면 "시그럽다(샤랍!) 하고 소리를 지른다. 친공,반공으로 서로 나누어 목에 힘주고 악을 쓰며 서로 잔인하게 살상하는 종자는 오로지 세계에서 우리 민족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59-


-1953년6월8일, 이대통령는 원용덕 헌병사령관을 경무대로 부러 6월18일 새벽을 기해, 모든 반공포로들을 일제히 석방할 것을 지시했다. 이대통령으로서는 일생일대의 커다란 모험이고 도박이었다. -165-


-한국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에서 제시한 통계는  한국군은 전사 58,808명,부상 178,632명,실종 및 포로 82,318명을 합계319,759명이다.        유엔군은 전사36,991명,부상115,648명,실종및 포로 6,944명으로 합계159,583명이다. 여기서 미군은 전사33,629명,실종자9천여 명을 포함하여 약15만 명에 이른다.       공산군측의 손실은 북한군과 중공군을 합하여 인명피해가 총 140만 명에 달한다고 했다. -177-


-추위와 굶주림을 우리 포로들은 모두 초주검이 되었다.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집 생각을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왜냐하면 집 생각을 하면 정신적으로 약해지고 병이생겨 나를 죽이기 대문이다. 나는 포로수용소에서 3년간 포로생샐활을 햇다. 그러나 나는 집에 돌아온 후, 과거 생각을 모두 잊으려고 노력했다. -188-


-한반도는 지리적으로 일본열도와 아시아 대륙을 잇는 교량 모양을 한 지리적 특성 때문에 주변의 강대국과 때로는 멀리 서방국가들의 간섭과 침략을 받아 왔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1천2백 년 동안 나라와 민족을 굳건히 지켜왔다.  한반도의 현대사는 과거 역사와 밀접히 연계되어 있으므로 오늘의 한반도 분단의 현실을 올바르게 분석하고 판단하려면 백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우리의 아픈 역사를 이해함으로 오늘날 한반도 분단과 함께 6.25 사변의 역사적 원인과 근원을 찾아볼 필요가 있다. -205-


-조선의 정부 관리들은 백성들로부터 과도한 세금을 징수해 백성들은 더욱 궁핍하게 되었으며 1901년에는 전국적으로 많은 아사자들이 발생하여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 1901~1902년에는 봉건지주들의 가혹한 수탈과 가난에 시달리던 농민들이 '활빈당'을 조직하고 또한 '동학당'을 조직해 정부에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208-


-1904년2월9일 일본은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에서 러.일 간 지상전투가 벌어진 결과, 승리한 일본은 한반도를 점령하고 보호국을 만들었다.  러일전쟁의 발발은 한국으로서는 대재앙의 시작이엇다.  1905년11월7일 조선의 외무상 박제순과 일본정부의 '하야시 곤스게' 간에  '을사 보호조약'이 체결되었다. 처음엔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은 후  점차로 식민지화하였다...........1904년2월에 미국의 주한공사 앨렌Allen은 미국무성에 보고하기를  "조선 황제는 일본이 그를 위협할수록 더욱 ㅁ미국에 의존하려고 한다. 미국은 조선과 우호와 친선을 바라지만 정치보다 경제와 상업에  더 관심이 있다" 라고 말하며 조선의 청을 거절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한국보다 문명이 발달하고 세력이 강한 일본 편에 서서,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기를 원했다. 일본을 지지해줌으로서 미국의 중국진출을 일본이 방해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209-


-1907년7월30일,러시아주재 일본대사 '모도노 이찌로'와 러시아 외무대신 '이쯔폴스키' 간에 [외몽고에 대한 러시아의 특별한 관심사에 일본이간섭하지 않는 대신, 일본의 조선합병을 묵인한다] 는 밀약을 체결했다. -211- 


-1909년10월26일, 안중근(1879~1910) 의사가 만주의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 를 암살하고 형장의 이슬로 순국했다. 12월22일에는 당시 조선정부 총리대신이던 친일파 '이완용'이 암살됐다. ......1910년 8월부터 1918년 사이에 20만 명의 한국인들이 체포되어 온갖 경찰고문을 당했으며, 많은 애국지사들이 참수형을 받고 집단처형 당햇다. 일본의 근본적인 경제정책은 일본을 위해 한국에서 보다 많은 식량을 생산하고 보다 저렴한 공업원료와 노동력을 얻어 일본의 공업과 산업을 발전시키는 것이엇다.....함흥의 흥남시에 세계적인 규모인 동양 최대의 흥남공업단지를 건설해 중공업과 경공업의 발전을 도모하였다. 이 또한 일본의 군수산업과 경제발전을 위한 것이었다. -212-


-봉건적 지주,양반계급,부자들에 의한 착취와 멸시에 농민들은 수백 년 동안 시달려 왔다, 그러므로 경제적 평등사상을 주장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사상에 쉽게 감화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었는지 모른다.  더욱이 일본제국주의 식민지하에서 나라를 잃고 온갖 멸시와 수탈을 당하는 현실에서 지식인들 대부분은 백성들의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경제적 평등사상을 주창하는 공산주의 마르크스 사상에 심취할 수밖에없었다.한국의 민족주의 독립운동과 공산주의 운동은 서로 일치하고 밀착되어 일본으로 부터 해방과 독립을 추구하였다.  민족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이 곧 반일이고 독립운동이었던 것이다. -214-


-1945년2월에 있었던 얄타회담은 소련의 대일본 참전약속을 한 것으로 전후 한반도가 남북 분단되어 불행한 운명을 결정짓는 데 기여한 잊을 수 없는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두 전승국 미국과 소련이 일방적으로 38선을 그어 분단했고, 남북분단과 그에 따라 수립된 두 정권이 남북한에 수립됨으로 한국전쟁의 직접적 원인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222- 


-38선을 확정하는데 소요된 시간은 단 30분이었으며, 이 30분이 우리 민족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이 38선이 훗날 한국전쟁을 일으키는 원흉이 되었고, 오늘날 만리장성보다 더 튼튼한 난공불락의 철책 휴전선이 될 줄을 그 누가 알았으랴! -226-


-1945년12월16~25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5년간의 미.소.영.중국에 의한 신탁통치를 실시한 후 완전 독립을 보장한다는 결의를 하였다. 그러나 한국국민들은 이 신탁통치 안을 적극 반대하며 격려한 시위를 하자 미국은 한국문제를 유엔에 상정하여 1947년11월4일 유엔 감시하의 국민투표를 실시할 것을 가결하였다. ㄱ리고 남한만의 단독선거(5월10일)를 실시하고,북한은 9월에 단독선거를 실시하여 결국 이념이 서로 다른 친미.친소 두 정권이 남북한에 각각 탄생하게 된다. .......신탁통치 5년을 당시 한국민들은 아주 오랜 시간으로 간주했는데 남북 간 적대관계 66년을 생각해보면 비교도 되지 않는 짧은 세월로 느껴지기도 한다. "지속된 66년간의 민족분단과 또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르는 현 상황을 돌이켜보면, 그때 5년간의 신탁통치 안을 우리가 받아들였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어느 쪽이 우리 민족을 위해 보다 유리하고 빠른 통일정책이었을까......" 곰곰히 생각해 보자. -230-

***역사에는 '만약'이라는 가정은 없다고 한다.


-하지Hodge 미군정은 상해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정치적으로 중립을 표방하자, 남한 내에서는 좌익 단체들도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게 되고,결국 송진우가 이끄는 조선인민당, 안재홍이 이끄는 국민당, 여운형이 이끄는 조선인민당, 박헌영이 이끄는 조선공산당 등 수많은 정당들이 난립했는데 1945년 11월에는 정당수가 205개에 달했다. 중심세력이 없는 국내정치는 극도로 혼란했으며 민생은 암울하기만 했다. -234-


-1904년 당시 한반도는 일본과 러시아가 한반도를 놓고 전쟁일보직전에 직면하고 있었는데 한반도는 두 강대국 사이에서 새우등이 터지는 형세였다. -239-


-1950년6월28일 새벽1시에 유재흥 대령이 육군본부에 나타나 미아리 방어선이 무너지고 적이 서울시내로 진격중이라고 보고하자, 채병덕 참모총장은 국방차관 장경근가 함께 차를 몰아 한강을 도강하면서 이곳에서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한강다리를 즉각 폭파할 것을 지시했다. 채병덕 참모총장이 직접 폭파를 명령했는데 후일 그 실행책임자인 최창식 대령만 사형을 당했다. -282-


-서울에서 3일간 지체한 인민군;

개전후 3일만에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은 서울에서 또 3일 동안 지체하면서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다. 이 3일은 대한민국으로서는 행운의 3일이었다. 그동안 한국군에게는 재정비의 시간이 주어졌고,  미군들에게는 일본에서 부산항에 상륙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주었다. .......인민군이 서울에서 3일을 지체한 이유는 남한 내 빨치산과 민중봉기를 기다렸다. 라는 주장이 유력했어나, 그 기간에 민중봉기는 없었다.-284-


-1950년 7월18일 微明미명,미군 폭격기들이 당시 우리나라에 단 하나뿐이었던 원산 정유소를 폭격했다. 원산 정유소는 1935년 일본이 당시의 일본 돈으로 5천만 엔을 투자하여 건설하였는바, 하루에 500톤의 기름을 정유 생산하였으며 150톤의 휘발유를 생산하는 우리나라 유일의 정유공장이었다. -307-


-1950년9월15일 새벽,미군 함정들과 공군기들은 월미도를 폭격하기 시작하여 인천상륙작전을 개시하였다. ......인천상륙작전은 그 전에 어느 영국기자에 의해서 사전에 누설되었다.  모택동은 이 정보를 김일성에게 통보했다고 한다. -313-


-불필요한 2년10개월간 소모전투에서 휴전선이 38선 근처에 설정되었으므로 잃은것만 있고 얻은 것은 없이 전쟁은 무승부로 끝나게 되었다. .....총체적으로 한국전쟁은 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승자도 패자도 없는 무승부 전쟁이다" 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318-


-중공군은 10월19일에 압록강을 도하하기 시작했는데 抗美援朝라는 명분하에 인민지원군의 이름으로 한국전쟁에 개입했다. -331-


-모택동,밴프리트,클라크,워커,아이젠하워들은 그의 아들들을 먼 한국전선에 보내어 직접 전투에 참가하게 함으로서 지도자롯의 모범을 보였다. 이 분들은 자기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코리아를 지켜주기 위해 한국에 와서  전쟁을 치루면서  희생된 16개국의 용사와 그 가족들이다. -350-


-맥아더는 의회 고별연설에서 "노병은 결코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질 뿐이다"Old soldiers never die, they just fade away 라는 미 육군사관학교 교가의 일부를 인용한 유명한 고별연설을  남기고 군 생활을 마감했다. -357-


-남북한 국력차는 한때는 북한이 우위에 있었으나 1980년대 중반부터 날로 벌어져, 남과 북의 국력이 크게 역전되엇다. 그러나 무모한 전쟁은 단 한번으로 족하며 동족상쟁의 전쟁은 다시는 없어야 한다. 어떠한 대가를 치루더라도 전쟁만은 막아야 하며 '통일은 전쟁이 아닌 평화적 통일'  이어야 한다는 것을 재차 강조하고 싶다. -360-


- 작금에 한반도를 둘러싼 새로운 4강의 힘겨루기는 100년 전 이조말엽의 정치정세와 형식적으로는 서로 다를지 모르지만 본질적으로는 대동소이 하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379-


-온화함은 강함보다 강하며,진정한 용기는 '온화함'에서 나오며 그 온화함은 연약함이나 자기비하를 뜻하지 않으며 온화함 속에서 진정한 강인함이 생겨납니다. 그러나 작금의 한반도 사태는 그렇지 못하여 안타깝습니다. -385-


-.......-387-끝.잘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