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793/ 마을로 간 한국전쟁 - 박찬승 지음

최해식 2019. 4. 7. 12:04

-6.25전쟁 이전 한국 사회는 갈등요소가 대단히 많은 사회였고(신분제,지주제,씨족 간 갈등, 마을 간 갈등 등) 한국인들은 이러한 갈등을 현명하게 해결하지 못해으며, 그 결과가 한국전쟁기에 격렬한 충돌과 반복적인 학살로 나타났다는 점이다. 어느 사회든 갈등이 없는 사회는 없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갈등을 어떻게 현명하게 풀어나가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한 미숙함의 결과가 그토록 엄청난 비극을 가져오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11-


-마을 내부에서의 갈등은 당진군 합덕면의 한 마을 사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마을의 사례는 한 마을 내에서 집안 간의 오랜 갈등이 해방 이후 좌우 갈등을 확대되어 전쟁기에 치열한 보복살육으로 나타난 경우이다. -34-


-영암군 덕진면 영보리의 영보마을은 산간지역의 유격대와 평야지대의 경찰 사이에 경계지점이 되었다. 낮에는 경찰이 진주하고, 밤에는 유격대가 내려와 활동하는 지점이 된 것이다. -173-


-충남 부여군의 양반마을과 평민마을의 충돌;

A마을은 평민마을이고 B마을은 양반마을이라는 신분의 벽 때문이었다.  조선 사회에서 신분은 사람들을 규정하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근거였다. 그리고 그 신분은 어느 마을에 살고 있는 무슨 성씨인가 하는 것에 의해 일차적으로 규정되었다. ......양반들의 신분의식은 1894년 신분제가 공식적으로 폐지된 이후에도 사람들의  머릿속에 여전히 남아 있었다. -192-


-1930년대까지도 양반가의 구성원들은 나이에 관계없이 평민들에게 말을 낮추어 하는것이 일반적이었고 반촌인 B마을 사람들은 민촌인 A마을 사람들을 下視하는 것이 일반적인 분위기였다. 下視의 표현은 반말을 하는 것이었다. 심한경우에는 이 마을의 유력한 조씨들이 말을 잘 듣지 않는 강씨들을 붙잡아다 볼기를 치기도 했다. -194-


-한국전쟁기 평민마을과 양반마을사이에서 벌어진 충돌은 오랜 세월 동안 쌓여왔고, 또 여전히 남아 있던 신분 갈등이 폭발한 것으로 볼 수있으며,  이는 내전으로서의 한국전쟁이 한편에서는 옛 신분 간의 투쟁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19세기 말 조선시대의 신분제는 비록 제도적으로는 폐지되었지만,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218-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일제강점기하의 지주-소작인 관계에 주목하고, 이러한 오래된 계급관계에 기초한 깊은 원한이 해방 이후 남한에 혁명적 정세를 조성했다고 보았다. -222-


-지주의 대리인인 마름들은 소작료 인상을 통해 자신들의 이익을 얻을 수 잇었기 때문에 소작권을 미끼로 하여 소작료 인상을 끊임없이 기도했다. 여기서 마름과 소작인간의 갈등은 끝이 없었다. -255-


-........-287-끝.잘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