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794/ 끝나지 않은 전쟁 6.25 - 남도현 지음

최해식 2019. 4. 7. 12:05

-출전 ;한국전쟁 http://cafe.daum.net/625changwon/Q2uB/782

-3년1개월2일간 계속된 한국전쟁은 무려 500만 명의 인명피해와 1,000만 명의 이산가족 그리고 10만 명의 고아가 발생했다. .....특히 네 번이나 주인이 바뀐 서울 일대는 쑥대밭이 되었다. 6.25전쟁은 우리 민족이 오천 년 역사 동안 겪었던 일 중 최악의 피해를 남겼고 그것도 외침이 아닌 민족 간의 전쟁이라는 비극적인 사건이다. -54-


-의정부와 포천지역을 담당한 국군 제7사단은 당시 거의 4할 정도의 병력이 영내를 벗어난 상태여서 6월25일 새벽 4시 기준으로 제3,4사단, 제105전차여단으로 구성된 북한군 대 국군 제7사단의 전력차이는 병력으로만 약7대1정도였고  화력까지 계산한다면 약 18대 1정도로 열세였다. 이런 결과를 본다면 북한이 선택한 개전 날짜는 놀라울 정도로 정확히 국군이 약했던 시기를 선택한 셈이었다.그만큼 효과도 컸다. .....당시 비상 경계령이 해제되자 육군본부에서는 병사들이 외출이나 외박을 나가도록 적극 장려했는데 그 이유는 바로 군량미가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으나 이것이야말로 상당히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85-


-6.25전쟁 초기 북한군의 공세는 미군의 최초 예상를 훨씬 뛰어넘는 수준ㅇ었다. 오만에 가득 차서 적을 얕보고 전장에 아무 생각 없이 달려들었던 결과가 얼마나 참혹한 것이었는지 미군은 제24사단의 굴욕으로 똑똑히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북한군과 처음 遭遇조우한 스미스 특임대의 죽미령전투는 그들이 두고두고 기억해야 할 교훈이 되었다. .......사자가 한 마리의 토끼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한다는 너무나 잘 알려진 것을 죽미령에서 미군은 망각했다.......미 육군사관학교에 그려진 스미스 특임대의 죽미령 전투는  자랑스런 승전이 아닌 이런 악몽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노력하는 미군 당국의 臥薪嘗膽 자세를 우리 또한 反面敎師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128-


-유엔군이 북진함에 따라 북한지역에 새로운 통치권이 필요하게 되자 한국과 유엔군을 주도하는 미국 정부 간에 점령 지역통치권에 대한 갈등이 발생했다. ....한국 정부는 북한 지역에 민정관을 급파해 통치를 시도했고, 10월24일에는 유엔군 사령부에서 한국 정부와 관련이 없는 민간인 12명을 선발하려 평양시관리위원으로 취임시켰다. 이 때문에 점령 지역에 우리 정부가 파견한 관리와 유엔군 사령부가 임명한 행정관이 서로 통치권을 주장하며 대립하게 되었고 북한 주민들은 누구의 말에 따라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했을 정도였다.이런 일은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결코 벌러지지 말아야 할 적전 분열상이었다.......하지만 이런 대립과 타협의 과정은 10월25일 중공군이 전쟁에 개입하고 전세가 급격히 변하자 그것으로 흐지부지되었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잿밥에만 신경 쓰다 모든 것을 잃은 것과 같은 아쉬운 순간이었다.-211-


-10월 말 갑자기 등장한 중공군의 제1차 공세에 의해 순식간에 청천강 선으로 밀려나게 디었다. 그런데 이와 동시에 중국군은 아군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렷다. 급하게 공세를 시작했던 중공군은 국군과 유엔군을 청천강 이남으로 놀아낸 뒤 이틈을 타서 부대를 재편하면서 다음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미군의 입장에서는 중공군의 공세가 계속해서 있어야 하는데 바로 그 시점에서 중공군이 전선에서 자취를 감춘 것처럼 보인 것이다. 세상살이에 미움보다 더한 것이 무관심이라는  말처럼 유엔군 지휘부는  이런 사태를 어떻게 해석해야할지 몰라 주춤했다. -216-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는 하지만 전사를 들여다 볼 경우 이럴 때는 이렇게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 까 하는 상상을 많이 하고는 한다.  성공했던 작전이든 실패했던 작전이든 차후에 반복될 경우 他山之石으로 삼기 위해서다. -218-


-6.25전쟁 당시 중공군은 보급에 상당한 문제를 안고 있던 군대였다. 사실 보급능력이 제한된 중공군의 공세는 통상 일주일을 지속하기가 힘들었다.-326-


-아군은 평양도 서울도 과감히 포기하고 300여 킬로미터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쳐 나왔는데, 여차하면 낙동강까지 물러날 수도 있다는 패배적인 분위기가 감돌고 있어서 불과 50킬로미터만 더 밀린다면 유엔군은 즉시 철군할 예정이었고  그것은 대한민국의 종말과도 같은 이미였다. 결과적으로 1951년1월10일을 전후한 시기는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한 이래 최대의 위기상황이었다. 다행히 서울을 점령한 중공군은 더 이상 공세를 유지할만큼 전력이 소진된 상태여서 일단 진격을 서울에서 멈추었다. 만일 한 번만 더 중공군이 공세를 가할 능력이 있었다면 그것으로 전쟁은 끝이었고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상황이었다. -335-


- 청성부대를 직접 내방한 이승만 대통령은 화천호 인근에 세워진 전적비에 오랑캐를 섬멸한 곳이라는 뜻에서 破虜湖파로호란 휘호를 친히 써주고 장병들의 전공을 치하했는데 이후부터 호수의 이름이 파로호로 바뀌었다 -365-


-계속딘 시련과 실패에도 굴하지 않고 이를 극복하고자 切齒腐心절치부심하여 필사의 노력으로 목적한 바를 성취해 낸 선배들의 노고가 있기 때문이다.-367-


-육상에 설치된 DMZ나 해상을 나누는 NLL은 국경이 아니라 군사경계선일 뿐이고, 국제법상의 국경선으로 취급할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375-


-1960년대 말부터1970년대 중반까지는 북한의 대남 도발 의지가 극도로 표출디었던 시기였다. 그때까지 경제력,군사력에서 우리를 앞서고 있던 북한은 노골적으로 적화야욕을 표출하고 했다. -377-


-3년1개월2일간의 6.25전쟁은 '국내적으로는 승자도 패자도 없는 동족상잔의 참혹한전란'이었다.-402


-.......-404-끝.잘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