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795/ 한국전쟁에 대한 11가지 시선 - 역사문제연구소 지음

최해식 2019. 4. 7. 12:07

-[영혼의 집]이라는 제목의 영화는 "인간의 기억은 덧없고 인생은 짧다.  우리가 미처 사건들 사이의 연관성을 파악하지 못할 만큼 그렇게  순식간에 모든 일들이 일어난다" 라고 시작된다. 이처럼 6.25전쟁은 참전국들에게조차 '잊혀진 전쟁'이 되었다.-33-


-6.25전쟁이 끝날 때쯤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동맹체제는 깨졌고, 새롭게  과거의 적들 사이에 군사동맹이 맺어진 것이다.  바로 직전까지 적국이었던 서독과 일본의  재군비를 미국이 추진했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41-


-해방후  북한 공산주의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조선혁명과 중국혁명을 '하나' 로 인식하고 있었고 중국도 미국을 한 번은 싸워야 할 상대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 전장이 한반도였다는 점이 북한에게는 불행이었고, 중국 측에게는 소련의 간접지원까지 받는 유리한 기회였다. .......6.25전쟁 시기 중조연합사령부가 성립되면서 군사지휘권이 중국 측에 귀속되어 펑더화이 彭德懷가 사령 겸 정치위원을 맡았다. 펑더화이는 김일성을 무시했으며 심지어 조선인을 경멸했다.-42-


-흐루쇼프는 1956년 2월 소련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보고를 통해 스탈린을 '독재자' '폭군' '살인자'로 규정하고 스탈린시대 30년을 '암흑시대' '폭정과 테러의 시대' '강제노동수용소의 시대'로 묘사했다. 스탈린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리틀 스탈린' 김일성에게 바로 연결되었다. -45-


-1950년대의 대자본가들중  2명은 원조자금으로 건설한 국유기업체를 불하받아 성장했다.  이병철은 막대한 원조자금을 배정받아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을 세웠으며,  정주영은 미8군 공사와 정부의 전후복구 사업에 참여해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외국에도 널리 알려진 한국의 대표적 재벌 삼성과 현대는 이 시기에 대기업으로 성장한 것이다. -149-


-越南월남은 해방 이후부터 1946년까지 활발했으며, 전쟁 기간에 다시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1945년8월의 해방이후 전쟁이 끝나는 1953년까지 북한 주민 약 120만 명이 남한으로 이동했다. 그중 전쟁 기간에 월남한 인구는 65~72만 명 사이로 추산된다. -150-


-역사에 비약은 없다. 예외적으로 비약이 이루어질 경우 그에 상응하는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함을 역사는 보여준다.  한국전쟁은 근대적 혁명의 효과를 낳았고,    한반도가 국제냉전의 대표적 대결장이 되면서 거액의 원조자금이 들어와 경제발전을 위한 종자돈이 마련되었다. -162-


-1951~1961년간 총 25억 달러에 달하는 경제원조가 남한에 제공되었다. ......1950년대 후반 남한 정부의 세입에서 해외 경제원조가 차지하는 비율은 50%를 상회했다. -185-


-1960년대 초 남한과 북한은 대조적인 모습을 나타냈다.   남한에서는 1960년 학생혁명과 1961년 군사쿠데타를 통해 권력교체가 이루어졌고, 북한은 국가건설단계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체제를 공고화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사회적 긴장감과 정치적 격변이 해외 개발원조의 성격에 긴인한 바가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북한의 높은 산업적 발전상태는 당시 많은 남한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비쳤으며, 이는  남한의 정치적 불안정을 초래하는 데 일조했다. -186-


-남한과 북한에 대한 개발원조는 동서 양진영에서 모두 냉전적 체제대결의 중요한 도구로 사용되었다......동독이 다양한 이니셔티브와 프로젝트를 통해 북한의 재건을 적극적으로 도왔던 반면,  서독은 비유럽 국가로서   국가적 이해관계가  크게 걸려 있지 않은 한국원조에 유보적 태도를 견지했다. -207-


-다른 국가들에서처럼 대량학살에 연관된 일부 퇴역군인들은 과거에 대해 침묵할 것을 선임자들에게 명령받았다. -224-


-과거에 그랬듯, 물질적 보상은 정부가 과거의 잘못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때 희생자를 위로하는 가장 좋은 수단이었다. 하지만 정당성을 결여한 지배적 정치권력은 진실규명 중단에 동의하는 대가로 배상 및 보상을 통해 피해자들과 타협하려 한다. -229-


-과거는 분명 돌이킬 수 없다. 그러나 과거의 잘못은 여전히 현재의 정치,법률,제도,사회 전반에 지속적인영향을 끼치고 있다.  만일 과거의 잘못과 국가범죄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 현재에도 권력을 쥐고 있다면, 그 피해자들이 살아 잇다면, 그 잘못을 어떻게든 바로잡아 진정한 법과 정의의사회를 만들어야한다-232-


-한국전쟁은 해방이후 시작된 이념전쟁의 결과였다. 한국전쟁 勃發발발 前부터 38선 일대가 치열한 남북 국지전의 무대였다. -241-


-......-257-끝.잘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