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07대출함. 0413읽음.
-이토伊藤는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가 암살당한 1878년 이래, 메이지 정부의 최고 권력자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명석한 두뇌와 법률에서 재정까지 폭넓은 지식과 영어실력을 겸비하고, 헌법 제정 등 일본의 근대화를 중심적 위치에서 추진했기 때문이다. -28-
- 최익현은 전라북도 순창에서 거병하여 1906년 6월 정부군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그때 그는 일본군과는 싸우지만 정부군과는 싸울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여 스스로 체포에 응했다. 고종은 최익현을 한국 법에 의해 재판을 요구했지만, 이토는 일본 군율에 맞추어 처단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 결과, 최익현은 금고 3년형을 받아 일본 대마도에 유배되어 1907년 새해 첫날 사망하였다. -90-
- 이하영 법부대신은, 미국 공사관 서기관.주일 전권공사 등의 경력도 있으며, 통감부 측으로부터 "일어와 영어가 대체적으로 통" 하는 "현대적 인물" 로 평가받는 개화파이다. -143-
- 한국 최초의 근대적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홍범 14조는 일본의 내정개혁안과 한국 개혁파(개화파)의 근대적 국민국가 구상 등을 집약해놓은 것이다. -236-
- 이토, 그는 과연 아무 사상도 갖고 있지 않고, 단순히 편의주의적이고 처세술에만 뛰어난 정치가가 헌법제정이라는 국가의 대사업을 지도하고 동아시아에서 처음으로 국회를 개설하며 결국은 스스로 하야하여 정당을 조직하는 것과 같은 모험을 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라고.
거기에는 역시 일관성 있는 철학이 개재되어 있다고 생가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 -271-
-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 두 사람의 첫 만남이 '바보' 대 '간웅' 이었을 정도로 서로에 대해 극단적인 시선이었던 만큼이나,100여 년 가까이 지난 오늘에도 이토 히로부미에 대해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와, 침략의 지휘자라는 상반된 평가가 한일 간에 병존하고 있다. -344-
- 박문사에서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의 자식들이(안준생과 이토 분키치) 연출한 '화해극' 은 조선인과 일본인이 '은혜와 복수' 를 넘어 '군국진호' 를 위해 결합하는 '내선일체' 의 드라마로 찬양되었다.
.........박문사 본당 유적지에 영빈관이 건설되어 1964년에 겨우 준공되었고, 1973년 삼성재벌에 매각되어 호텔신라가 건설되었다. 신라호텔은 각종 국제회의가 열리는 장소로 되어있다. 박문사의 유적지는 지금도 정치적 의미를 띤 장소로서 계속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401-
- .............-440-끝. 그냥 봄.
-
-
'한국' 카테고리의 다른 글
450/ 명성황후 , 제국을 일으키다 - 한영우 지음 (0) | 2016.04.15 |
---|---|
449/ 매천야록 - 황현 지음 . 허경진 옮김 (0) | 2016.04.07 |
447/ 자객 고영근의 명성황후 복수기 - 이종각 지음 (0) | 2016.04.07 |
446/ 그래서 나는 김옥균을 쏘았다. - 조재곤 지음 (0) | 2016.04.07 |
445 / 갑신정변연구 - 박은숙 지음 (0) | 2016.03.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