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07대출함.0407읽음.
- 윤웅렬은 윤치호의 아버지로, 군부대신 등 고위 관료를 역임한 인물이다. -51-
- 1886년 6월 프랑스 전권대신 조르주 꼬고르당과 조선 측 전권대신 김만식 사이에 한불수호조약과 통상장정이 조인되고, 1887년 5월 협정서가 교환되었는데, 이때 홍종우가 비서 자격으로 참석했다고 한다. 홍종우는 후일 프랑스에서 화가 펠릭스 레가미의 주선으로 꼬고르당을 만났을 때 그에게 이 사실을 상기시녔다. -63-
- 홍종우는 조선 역사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이를 프랑스에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어느 프랑스 작가의 말을 인용해 "그리스 인들과 로마인들이 프랑스를 만든 것처럼 중국과 코리아는 일본을 만들었다" 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나아가 서기 3세기에 일본인들은 우리의 문하생이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81-
- 1892년 4월, 민씨 일파 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민영소의 밀명을 받은 이일직은 무역상으로 가장해 일본으로 들어갔다. 이일직의 최종 목표는 개화 망명객의 우두머리인 김옥균과 박영효를 살해하는 것이었다. -95-
- 김옥균은 자신이 기숙하던 도쿄 황궁 앞의 유라쿠죠有樂町에서 매일 모여드는 빈객들에게 항상 오찬을 대접했다. 이때 홍종우가 프랑스식 일류 요리와 조선식 요리를 직접 만들어 맞았는데. 당시 홍종우가 어떤 요리를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서구 지향성이 강한 일본인들로서는 세계 최고의 요리 강국 프랑스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97-
- 김옥균을 따르던 이발사 가이군지甲斐軍治는 능지처참 당한 김옥균의 유발遺髮을 위험을 무릅쓰고 훔쳐와 도쿄 본향구 봉래정 신조우지 眞淨寺에 안장할 정도로 김옥균에 대한 충정이 대단했다. -100-
- 대한제국 후반기에 이르면 일본의 정치적 압력이 강화되어 문명개화론자들의 세력이 강해졌다. 반면, 황실 중심의 근대화를 추진하던 홍종우 일파는 중앙 정계에서 점차 도태되었다. 일제의 강제병합 전후에는 아예 신변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세력을 완전히 잃는다. -244-
- 홍종우는 프랑스와 같은 유럽의 선진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 이를
조선의 근대화에 적용시켜 부국강병이라는 과제를 달성하고자 했다. 홍종우의 근대화 개혁 논리는 성리학적 질서와 체제를 유지하고자 했던
수구적 위정척사론자들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또한 한국사의 독자성과 한국 문화에 대해 강한 자부심을 표명했다.-255-
- 개화파와 1884년의 갑신정변, 1896~1898년 독립협회, 만민공동회의 역사적 역할은 강조되어야 함은 마땅하지만 이러한 인사들만이 유일한 근대지향 세력이었다고 이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점이다. 또한 같은 개화 인사임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달리 대외적으로 '자주와 독립' . 내부적으로는 '공론과 공도 ' 를 핵심으로 하는 홍종우와 같은 제3의 근대화 방안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편견과 무지에 의해 역사의 '미라 ' 가 된 홍종우에게 이제 '심장' 을 박아주어야만 할 때가 되었다.-260-
-.........끝. 잘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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