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443 / 개화파열전 - 신동준 지음

최해식 2016. 3. 20. 20:06

-0330대출함.  0330일 20;30에 읽음.

- 1884.12.4일에 일어난 갑신정변은 '비상한 삶'  으로 일관한 김옥균의 모든 것을 압축시켜 놓은 사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갑신정변과 김옥균을 두고 비록 3일천하로 끝나기는 했으나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근대지향성을 보였다. -15-

 

- 명문가 집안에 장원급제 출신인 그는 자신을 과신하는 긍심矜心과 자신의 공을 주변사람에게 자랑하고픈 벌심伐心이 강했다. 난세를 사는 사람에게 긍심과 벌심은 금물이다. 고래로 자긍심이 강한 사람은 주변의 칭송에 우쭐한 나머지 남에게 이용당하기 십상이다.

.......지나친 자긍심으로 인해 패망의 길을 걷게 된 실패한 혁명가 김옥균의 행보는 여러 면에서 '신생申生' 과 닮았다.

'申生'은 [춘추좌전]에 나오는 춘추시대 '진헌공'의 태자 '신생' 을 말한다. [춘추좌전] 에서 "옛말에  '지나친 순수함은 우둔함에 가깝다'  고 했습니다. "  라고 했다. -19-

 

- 김옥균은 1851(철종2년)에 충남 공주에서 안동김씨 문중의 호군 '김병태'와 은진 송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안동김씨는 왕실의 외척으로 60년 동안 세도정치를 행한 당대의 벌문이었다.

........5촌 당숙뻘인 좌찬성 '김병기' 가 김병태에게 김옥균을 양자로 줄것을 요청햇다.  김병태는 총명한 장남의 앞날을 위해 이를 수락했다. 김옥균의 나이 6세였다.  -20-

 

- 최근에 출간된 [그래서 나는 김옥균을 쏘았다 - 조재곤 지음,푸른역사,2005 ] 는 홍종우가 뛰어난 프랑스 요리 솜씨를 매개로 김옥균에게 접근한 것으로 묘사해 놓았다-47-

 

- 와다도 심부름 차 잠시 아래층에 내려간 사이였다. 2층에는 오직 홍종우와 김옥균만이 각각의 방에 남아 있었다. 김옥균은 심기가 좋지 않은 듯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는 이누카이가 전별회식 때 준 [자치통감]  을 펼쳐 들었다. 난세의 지략을 터득하는 데에는 [자치통감] 보다 나은 책은 없었다. -55-

 

- 김옥균은 갑오경장 때 총리대신 김홍집과  내무대신 박영효의 연립내각이 들어서면서 복관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초에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복권조치는 취소되고 말앗다. 그는 합방이 이뤄지는 1910년 7월18일에 종3품인 규장각 직각에 추증되었다. -59-

 

- 민영환은 고종에게 개화방안을 제시했다 그것이 바로 [천일책千一策]이다. 이는 [사기] <회음후전淮陰侯傳>의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천 번을 생각하면 반드시 한 번은 얻는 것이 있다'  는 뜻의  '우자천려필유일득愚者千慮必有一得 '  에서 따온 것이다.

 

- 박영효의 저서인 [사화기략](1882)에 따르면 선상에서 애스턴 및 선장 제임스의 협조로 태극 8괘도를 참작해 태극기를 만든 뒤 코베 항에 입항하자마자 니시무라 옥상에 태극기를  게양했다. 이로 인해 박영효는

오랫동안 태극기를 최초로 제작한 인물로 알려져 왔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이보다 넉 달 앞선 1882년 5월 조미조약 체결 당시 역관 이응준이 최초의 창안자였다 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럼에도 박영효가 태극기 창안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것만은 확실하다. 수신사 임무를 마치고 귀국한 지 얼마 안 돼 태극기가 조선의 공식 국기로 인정받은 사실잉 이를 입증한다. -203-

 

- 헤이그밀사사건으로 고종은 부득이 황위를 태자에게 대리케하는 조칙을 반포했다. 이때 이완용은 이를 양위로 못박고 나섰다.

박영효는 이완용 등을 암살하고 일제의 음모를 분쇄코자 했으나 기밀잉 누설되는 바람에 제주도로 2년간 유배를 가게 되었다. 1년 만에 사면된 그는 상경이 금지돼 마산에 칩거하던 중 한일합방을 맞게 되엇다.

합방 직후 그는 일제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고 1911년에 작위를 받은 자들로 조직된 조선귀족회의 회장에 피선되었다.-211-

 

- [이완용] - 1858년 경기도 광주출생.

이완용과 함께 초대 주미공사관의 서기관을근무했던 '이하영' 은 법부대신으로 을사늑약을 찬성한 뒤 자작 작위를 받았다.

그의 장손은 해방 후 육군참모총장과 국방장관을 지내면서 박정희의 쿠데타 제의를 거부해  '참군인'  의 표상이 된 이종찬 장군이다.

'민병석' 은 궁내부대신이 되어 합방에 반대하는 궁중여론을 무마한 공로로 자작의 작위를 받은 뒤 중추원 부의장등을 역임하며 친일행각에 앞장섰다.  그의 아들 민복기는 대법원장을 두 번이나 역임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후손의 손에 의해 폐묘까지 된 이완용으로서는 유독 자신만이 만고의 매국노로 매도되는 현실에 억울해 할지도 모르 일이다.-283-

 

- 이완용은 1858년6월 경기도 광주군에서 우봉 이씨 집안의 寒士 이호석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대대로 과거에 급제하지 못해 양반 행세르 제대로 하지 못한 잔반殘班에 불과했다. 이완용은 10살때 먼 친척인 '이호준' 의 양자로 들어갔다. 이호준은 예방승지(의전비서관)로 고종을 측근에서 모시고 있었다. -286-

 

 

- 초대 주미공사관에는 전권공사 박정양을 비롯해 참찬관 이완용과

 번역관 이채연, 서기관 이상재와 '이하영' 등이 잇었다.

'이하영' 은 부산에 있는 일본인 상점의 점원 출신이다. 그는 상점일로 나가사키를 다녀오다가 배 안에서 처음으로 조선을 찾는 '알렌' 을 만나 이후 서양인 여성 '노블' 의 사환과 조리사로 일하면서 영어를 익혔다. 마침 궁중을 출입하며 민비와 가깝게 지내던 '노블' 의 추천으로 외아문 주사로 재직하다가 공관원으로 발탁된 것이다. -288-

 

- 1904년 2월에 일본이 인천 앞바다에서 러시아 군함 2척을 격침시키면서 전쟁잉 발발했다. 러일전쟁의 시작이다.-299-

 

- 을사늑약은 이미  한 해 전 한일의정서를 제도적을 뒷받침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비록 러일전쟁이 끝난 뒤 맺어지기는 했으나 이미 전쟁 중에 일제의  임의 수용을 허용한 것 자체가 주권의 포기에 가까웠다. 을사늑약의 모든 책임을 이완용  등에게 떠넘긴 채 고종을 비롯한 황실인사와 여타 인사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은 역사왜곡에 가깝다. -301-

 

- 이완용이 덕수궁에서 총리대신의 자격으로 순종 즉위식을 거행하자 분노한 시민=순진하고 어리석은 시민?들이 '매국노의 일족을 잡아 죽이자'  는 함성를 지르며 이완용의 집으로 몰려가 그의 집을 불태웠다.

을사늑약 때까지만해도 백성들로부터 가장 많은 욕을  얻어먹은 사람은 주무 대신 박제순이엇다 그러난 고종 양위를 계기로 이완용은 매국노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302-

 

- 양위받은 순종은 그해 11월에 이토를 황태자의 태사로 삼고,이완용을 황태자의 소사小師로 삼는다는 조칙을 내렷다. 황태자는 아관파천 중에 고종의 은총을 입은 엄상국 소생의 영친왕 이은이었다. 고종에게는 큰 아들인 순종과 귀인 장씨 소생인 둘째 아들 의친왕 이강, 엄귀비 소생의 영친왕 이은 등 3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는 양위할 때 영친왕 이은을 순종의 뒤를 이을 황태자로 점지해 놓고 잇었다. -303-

 

- 이완용을 무턱대고 욕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이완용을 탓하기에 앞서 왜 이런 불행한 일잉 빚어지게 되었는지를 철저히 반성해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310-

 

- [홍종우]

홍종우가 제주목사로 내려간 이후의 행적은 전혀 알 길잉 없다. 언제 관직을 사임했는지도  오리무중이다.

........일각에서는 합방 직전인 1909년 12월에 상하이르 거쳐 파리로 망명햇다가 1년도 안 돼 귀국한 후 전라도 무안군에 은거하다가 1913년 초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잇으나 이 도한 무슨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홍종우가 을사늑약 전후로 사직서를 내고 은신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김옥균을 높이 평가하고 있던 일제가 저격범인  홍종우를 그냥 놓아둘 리는 만무했기 때문이다. 홍종우의 제주목사 이후의 이야기는 문학적 상상력의 영역으로 남아 잇는 셈이다. -328-

 

- [이범진]

이범진에 대한 평가는 아관파천과  밀접한 관련잉 있다. 그간 아관파천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가 주를 이뤄왔다. 일국의 국왕잉 타국의 공사관으로 파천한 것은 주권국가에서 잇을 수 없는 일이고, 그런 일을 획책한 이범진은  나라르 망국으로 이끈 자에 불과하다은 혹평이 그것이나, 이는 부득불 그럴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대한 분석잉 결여되어 잇다는 지적을 면기 어렵다.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직후 박영효와 김홍집을 중심으로 한 친일내각을 만들어 세력 확장에 박차를가했다. -369-

 

-  이범진의 둘째아들 이위종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 또한 조선의 패망과 더불어 부친과 함께 망각 속의 인물이 되고 만 것이다. 현재 러시아에는 이위종의 둘째 딸 니나의 손자인 비탈리 바실리예비치와 손녀인 예드모바 류드밀가가 각각 페테르부르그와 모스크바에 살고 잇다.  바탈리의 증언에 따르면 이위종의 부인 놀켄은 1943년 독소전쟁 당시 볼고그라드에서 아사했고, 이위종의 셋째 딸 제냐는 흑해 연안의 뚜아체에 거주했으나 이후 연락이 끊겼다고 한다. -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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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협회에는 두 개의 흐름이 존재했다.   하나는 서구의 자유민권

사상에 영향을 받은 西道西器의 흐름으로 서재필과 윤치호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다른 하나는 개신유교의 전통을 배경으로 한 동도서기의 흐름으로 남궁억과 정교 등이 그  중심인물이다. -416-

 

- 고영근은 민씨 세력을 배경으로 왕실과 연결돼 입신양명한 매우 보기 드문 인물이다. 그는 난세에 자신을 알아준 사람을 위해 헌신햇다. 그의 삶은 춘추시대 말기에 주군인 지백知伯을 위해 헌신적인 삶을 산 조趙나라의 충신 예양豫讓을 연상시킨다. -423-

 

 

-..........-453-끝.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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