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30대출함.0401읽음.
- 갑신정변은 1884.10.17일 저녁 9시경에 시작되어 10.19.일 오후 7시경에 막을 내렸다. 정변이 진행된 시간은 46시간 정도로 만 이틀이 채 안 되었다. -137-
- 임오군란 진압 이후 청은 은혜의 나라로 인식되기도 했으나, 청의 제국주의적 내정간섭과 경제적 침탈, 주둔군의 행패 등으로 반청 감정이 확산 되어갓다. 특히 양반 관료인 이범진을 청의 상무공서로 끌고 가 문초한 사건은 고종과 개화파, 의정부 세력의 반발을 일으켰다. -265-
- 1875년 8.25일 일본군은 닻을 내리고 영종도를 공격하여 35명의 조선인 사망했으며, 성과 민가가 불에 타는 피해가 발생햇다. 1875년11월에는 왜관잉 설치되어 있었던 동래부에서 총과 칼로 무장한 일본인 59명이 왜관에서 나와 문을 부수고 두모포와 개운포 등으로향했으며, 이를 저지하는 조선인에게 칼을 빼들고 총을 쏘았다. 당시 동래부 왜관의 일본인들은 원칙적으로 왜관 밖을 출입할 수 없었다.그럼에도 왜관을 나와서 칼을 빼들고 총을 쏘는 등 오만하게 행동했다. 개항에 대한 논의가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던 시점에서 나타난 이런 행위는 일본 정부의 대한정책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444-
- 1880년 11월에 청수관에 일본 공사의 서울 상주가 묵인 되었다. 이때 공사관에는 일본 국기가 게양되었으며, 이곳에서는 공사 외에 일본인
40여 명이 상주했다. 당시 서울 사람들은 서울에 일본 국기가 휘날리고 일본인들잉 거리를 활보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여 이들이 통행할 때에는 온 성안이 소연해졌고 이들에게 돌을 던지기까지 했다. 이런 민중의 반감은 임오군란시 그대로 반영되어 청수관은 방화.소실되었다. -445-
- 1881년 윤7월에는 동래부 왜관에 머무르고 있던 일본 장사꾼들이 40리 가량 떨어진 양산에 사는 사람에게 빚 받을 일이 있다고 하면서 경계선을 넘어가 행패를 부린 사건잉 있었다. [일성록 고종 18년(1881) 윤7월15일]. 이 사건이 야기된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일본인잉 조선인을 상대로 상품 판매와 고리대 자금을 대여 운영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또 울릉도에서는 목재르 탐낸 일본인들이 채벌하여 몰래 실어가는 일이 많았다. 이외에도 부산 개항이후 일본인에게 미곡을 잠매潛賣하는 경우가 많아 이를 처벌하기도 했다. -446-
-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났을 때 민중은 정변의 주범이 일본인이라고 인식하고, 일본인을 보기만 하면 살상하려 했다. 당시 민중은 정변을 "난당과 일본병이 입궁하여 왕을 핍박하고 대신을 살육 " 한 침략적 사건으로 이해했으며, "금번 변란이 일본 사람들로부터 나왔다 " 라고 이해하고 있었다. 이와같이 갑신정변을 일본의 침략적 사건으로 이해한 민중은 ' 통한절치' 痛恨切齒 의 마음으로 설욕하고자 했다.-452-
- 고종은 정변을 통해 청을 물리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려 했으며, 이에 정변을 암묵적으로 묵인했다. 그러나 정변 정국이 자신의 기대와 다르게 전개 되자 결국 등을 돌리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 점에서 갑신정변 실패의 중요한 원인으로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즉 10.18일 새벽에
고종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한규직.이조연.윤태준.민영목.민태호 등의 친위세력을 살해한 것이 직접적으로 고종이 등을 돌리게 된계기가 된 것이라 하갰다. 이에 경기도 관찰사로서 경우궁에 들어와 있었던 심상훈을 통해 자신의 반정변 입장을 외부에 전달한 것으로 보인다. -506-
- 갑신정변의 주도세력을 문명개화론자들로 규정한 경우에는 "조선 사회 내부의 사상적 동향에서 돌출적인 것 " 으로 보고,기독교의 수용까지도 인정한 西道西器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반면 동도서기론의 경우 전통적 가치인 동도를 유지하면서 서구의 기술을 수용하려 한 것으로 보고 타문화의 주체적 수용이라는 측면에서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563-
- 갑신정변은 봉건적 지배체제의 틀 내에서 부분적으로 근대적 요소를 받아들이고자 한 것으로, 반봉건적 입장이 철저한 것은 아니었으며 '혁명' 과는 거리가 멀었다.
정변 주도세력이 달성하려 했던 '서양 제국과 동렬' 에 서는 근대적 자본주의사회는 결국은 봉건적인 정치.경제.사회적 질서의 철폐를 거져오는 것이었으며,그런 점에서 '혁명' 의 요소를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당대 사회에서는 갑신정변을 기존 지배 질서를 뒤엎는 혁명적 사건으로 이해했다. -598-
-..........-600-끝.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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