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450/ 명성황후 , 제국을 일으키다 - 한영우 지음

최해식 2016. 4. 15. 17:53

-0415대출.0415읽음.

- 장충단공원.

이곳은 1895년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를 위해 목숨을 던진 홍계훈과  이경직 등 애국충신들을 추모하기 위해 1900년에 국가에서 祠殿사전을 세우고 봄가을로 재사를 지내던 성역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1910년 일본은 장충단 제사를 중단시키고, 여기에 상해사변 때 죽은 일본 육탄 3용사의 동상을 세우고벚꽃을 심어 시민공원을 만들고,그것도 부족하여 이토 히로부미를 위한 박문사博文寺라는 절을  세워놓았다. 그리하여 장충단은 화사한 벚꽃동산에서 일본혼을 추모하는 휴식처가 되어버렸다. -5-

 

- 우리 학계에서 황후와 민씨 척족을 바라보는 시각은 그다지 곱지 않았다. 그것은 우리 학계가 급진개화파나 척사파의 시각에서 근대사를 바라본 것과 관련이 있고, 또한 민씨 척족의 세도와  활동적인 여성을 곱게 보지 않는 그 시대의 민심과도 무관하지 않다. -35-

 

- 위기의 나라를 구하기 위해 29년간 노심초사하며 고종을 보필했던 황후는 4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우리 역사상 유례없는 만행사건이 불과 100여년 전에 벌어진 것이다.-57-

 

- 아관파천잉 이루어진 2월11일 고종은 즉시 '을미4적'  으로 불리는 김홍집,유길준, 정병하, 조희연  등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총리 대신 김홍집과 농상공부 대신 정병하는 광화문 앞 경무청 문앞에서 살해당했다. 김홍집의 죽음에 대해 [한국통사] 와  [대한계년사] 는 고종이 경무관 안환에게 명하여 경무청 문앞 작은 돌다리 위에서 참살하고, 두 사람의 시체를 종로 거리에 내걸었다고 쓰고 있다. 단발령에 분개한 시민들은 시신에 기와와 돌멩이를 던지고 肢體지체를 물어뜯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난 [고종실록] 에 의하면 2월11일 김홍집과 정병하는 "민중에 의해 살해되었다. " 라고 되어 있다.  어떤 것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고종이 김홍집과 정병하에 대해 감정이 좋을 리는 만무하다. -72-

 

- 군부대신 조희연,권형진,훈련대장 우범선, 이두황 등은 일본으로 도피했다. 우범선은 도피 후 아예 일본으로 귀화햇다. -73-

 

-대한제국은 한국인이 가슴 속에 하나의 국가로 인정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대한제국이 남긴 유적도 처참하게 파괴되었다.

대한제국의 정궁인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은 중화전 앞의 회랑이 없어졌다.  대한제국의 상징인 환구단은 지금 어떤 모습인가.  하늘에 제사지내던 황금색 둥근 지붕의 환구단은 헐려나갔고 지금은 위패를 모시던 황궁우만이 외롭고 초라하게 서 있다. 이곳에 가보면 황궁우 주변에 널려 잇는 환구단 석재들이 마치 로마의 폐허를 연상시틴다.

대한제국 건설의 정신적 기둥이었던 명성황후와 그를 위해 목숨으 ㄹ바친 충신을 추모하기위해 1900년에 새운 장충단은 지금 어떤 모습인가.장충단은 없어지고 공원만 남았다.   우리는 지금 장충단의 뜻은 잊어버리고 그 공원만을 즐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황후가 죽은 비극의 현장 건청궁은 어떻게 되었는가.

다 아는 바와같이 경복궁이 헐릴 때 이 전각도 헐리고 그후 국립민속박물관잉 들어섯다가 헐리고, 그 자라는 잔디로 덮여 있다.

대한제국이라는 14년의 '역사' 를 기억하지 않기 때문에 그 유적잉 천대받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대한제국은 일본에게 빼앗긴 '자주독립'  을 되찾기 위해 전국민의 열화와 같은 요청과 합의를 바탕으로 새웠다 는 것을 먼저 기억해야 한다. 대한제국은 근대적인 자주독립국가의 시작이다. -352-

 

-.............-354-끝.잘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