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15대출.0419읽음.
- 고종은 1897년 10월 대한제국의 성립을 세계에 선포했다. -12-
- 명성황후 살해사건의 음모를 꾸민 오카모토의 무덤 앞에서 나는 섬뜩한 전율을 느꼈다. 언제 또 일본의 어떤 출중한 우국지사가 돌출해 한반도를 차지하지 않으면 일본의 미래가 없다고 주장할 까 두려웠다.
승자의 역사에는 학습효과가 있지 않은가. -31-
- 천황궁의 경비와 관리를 담당하는 궁내청 관계자는 북문을 통해 들어가라며 쪽문을 가리켰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 고대 로마 수도를 방문한 어리숙한 이방인들을 보며 로마의 문명인들은 얼마나 조소했을까? 로마의 귀족들은 "로마에 왔으니 이제 로마법을 따르라" 고 으스대며 문명의 힘을 역설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방인들은 귀국한 뒤 로마와의 친분을 자랑하고, 우리도 로마처럼 되어야 한다고 '민족개량운동' 을 벌였을까? 그결과 오늘날의 유럽을 탄생시킨 빛나는 문화적 전통이 형성되었을까?
한일합방 후 수많은 조선 귀족과 지식인들이 밟았을 그 길.
그들은 이 문 앞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33-
- 이토은 죽을 때 누가 자기를 저격했는지 물었다고 한다. 비서가 '조선청년' 이라고 하자, '바보 같은 녀석' 이라고 하더니 곧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이토는 조선을 식민지로 지배할 것이아니라, 통감정치를 통한 반식민지 상태에서 경제적.문화적 지배를 잘하면 충분하다는 실용적 생각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따라서 군국주의자들과는 달리 일제에 의한 조선의 식민지 지배를 반대했다고 한다. 그런데 자기가 조선 청년의 총알에 죽게되니,강경파에 의해 조선의 식민지화가 곧 앞당겨질 것이라는 생각에서 한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45-
- 20세기 강대국으로 군림해 온 일본의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느낄 수 잇었다. 그 힘의 원동력은 도서관과 박물관이다. 조선의 심장을 찌른 도오 가츠아키의 '히젠도' 도, 일본이 심장을 관통한 안중근의 총알도 모두 크고 작은 박물관에 역사의 증거로 남아 그들의 정신을 떠받치고 잇지 않은가. - 50-
- 역사는 되풀이 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최근 평화헌법개정을 둘러싼 일본의 움직임,팽창주의가 가속화되는 일본의 모습을 보면 100년 전의 사건과 유사성을 느낀다. 지난날 자신들이 저지른 과오에 대한 참회에 인색한 일본의 모습 또한 여전히 불안하게 느껴진다. ..........이러한 것들을 염두에 두면서, 아직 청산되지 않은 우리의 슬픈 역사의 현장을 114년 전 그자리에 있었던 일본 극우주의 엘리트들의 생각을 곱씹으면서 읽어 보자. [민후조락사건] 고바야카와 히데오 小早川秀雄 지음.을 읽어가도록 하자. -53-
- [민후조락사건] 고바야카와 히데오 小早川秀雄 지음 에서....
이 시기 조선 정치는 부패가 극도에 달해 수습이 불가능한 상태에 잇엇다. 당시 오토리 공사는 조선정부 개혁의 첫 단추는 민비 세력의 억제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민비를 억제하고 정권을 탈취하기 위해서는 대원군을 부추겨 궁궐에 들여 보내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 1894년 7월23일 대원군을 도와 입궐시켰다, -62-
- 조선의 정치가 중 지략과 수완에 잇어서 민비를 능가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민비는 진실로 당대 최고의 인물이었다. 대원군이 동양의 호걸이라 하지만 민비에 대항할 만한 힘은 없었다.
당대의 석학 외무대신 김윤식 같은 사람도 민비의 학문이 넓고 깊음에 경탄했다고 한다. -84-
- 조선에서도 협객이 출현해서 우리 지사들을 구원하고자 햇다, 그는 전직 군부 협판 '이주회' 였다. 이주회는 "미우라 고로 공사와 일본의 지사들은 대원군의 입궐을 돕고 김홍집 내각의 위기를 구한 일대 은인이다. 그들잉 히로시마 형무소에 수감되어 형사처벌을 받게 된 것은 의리상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라고 주장했다. 또한 자신이 '민비 살해의 주범' 이라고 법정에서 자백, 일본 지사들의 무죄를 진술햇다.
.........이주회와 같은 사람은 조선에서는 좀처럼 찾아 볼 수 없는 의협 인물이라 할 것이다.
표면상이나마 민비를 살해한 사람잉 조선 사람이었음잉 밝혀졌으므로, 지사들을 살인죄로 처벌할 필요가 없게 되엇다. 이것이 예심판사가 '면소판결' 을 내릴 수 잇었던 또 하나의 중대 원인이었다. -182-
- <민후조락사건>은 1895년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를 암살하기 위해 건청궁에 난입했던 48명의 일본인중 한 사람인 고바야카와 히데오 가 아 남긴 수기이다. 당시 고바야카와는 26의 청년으로 ,<한성신보> 의 편집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를 포함한 사건 관계자 48명 전원은 사건 발생 이듬해인 1896년
1월 20일 '증거불충분' 으로 무죄 선고를 받았다. -200-
- 이주회는 "미우라 공사와 일본의 지사들은 대원군이 입궐을 돕고 김홍집 내각의 위기르 구한 일대 은인이다." 라고 주장한 조선인으로, 일본인들의 입장에서 의협 인물로 묘사되어있다. 그는 법정에서 자신이 "명성황후 암살의 진범 ' 임을 자백하고 사형당했다. 이주회의 역할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주회의 자백과 처형은 명성황후 살해의 진범이 잡혔기 때문에 히로시마 형무소에 수감된 일본인들은 범인이 아니라는 논리적 근거를 재공한다. 따라서 그들이 '증거불충분' 으로 무죄 방면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205-
- 명성황후의 죽음 이후,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1896년 2월 아관파천을 단행한다. 정국은 일시에 변화해서 김홍집 내각의 붕괴와 친일파의 몰락으로 이어진다.
1897년2월, 고종은 내외의 압력에 의해 덕수궁으로 환궁하고, 10월 대한제국을 선포햇다. 명성황후의 폐서인 조치는 철회되고, 2년2개월 만에 장례식을 치렀다. 고바야카와의 지적대로 명성황후가 제거된 후, 조선의 국운은 급속도로 기울었다. 1905년 을사늑약, 1910년 '조선병합'은 성공리에 이루어 졌다. -213-
- 을미사변응 단발령과 함께 19세기 말 항일 의병이 봉기하는 원인이 되었으며, 고종이 이듬해 2월 러시아 공사관을 피신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아관파천)
1896년 초 청년 김창수(김구)가 일본군 밀정을 살해하고 이후 독립운동에 투신한 계기나, 1909년 안중근이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한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이 사건, 을미사변이다. -231-
- 마음속에 치밀어 오르는 수치심,분노 같은 것들이 글을 써내려가기 어려울 정도로 머리를 산란케 했다. 특히 사건 종료 후인 오전 8시 일본도를 어깨에 둘러메고 광화문을 빠져 나온 뒤, 광화문 앞을 유유히 걸어가는 그들의 모습이 떠올라 나는 오랫동안 넋을 놓고 앉아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그들은 우리 땅에서 그토록 거리낌 없이 행동할 수 잇었던 것일까? -299-
- 최문형, [명성황후 시해의 진실을 밝힌다], 한영우, [명성황후와 대한제국] , 윤덕한, [이완용 평정; 애국과 매국의 두 얼굴] 을 읽어 보자
-.....................-303-끝. 잘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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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원군 ;
경성 남부 10여 리 정도 떨어진 곳. 작은 언덕이 펑퍼짐하게 내려가다가 한강 을 끼고 일대 평야가 펼쳐진다. 이곳에 인적도 드물고 한산한 공덕리란 마을이 잇다. 아침이면 구름잉 남산 위에서 사그라지고, 저녁 무렵이면 두루미가 하늘에서 내려앉는 맑고 고요한 곳이다. 여기에 조선 반도의 노영웅 대원군잉 가슴 가득 분노를 품은 채 노구를 이끌고 만년을 보내는 장원잉 있었다. 당시 78세.대원군은 아직도 대장부의 기개가 남아 있었다. -87-
- 전원에 묻혀 高遠한 이상을 찾고 고요한 산림취미를 즐기는 것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맹렬하고 자유분방한 행동은 길거리로 뛰쳐나온
야생마 같앗고, 광야에서 뛰놀던 호랑이와도 같았다. 그는 덕을 지닌 군자라기보다 호쾌한 영웅이었다. -88-
- 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柳之助는 입궐하는 날짜는 추후 결정하여 통보하기로 약속하고 대원군 사저에서 물러나왔다.
.......격변의 비밀스런 조짐은 지극한 고요함 속에 간직되어, 눈앞의 나뭇잎조차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무심한 논밭에 가을빛이 충만해 평화로운 광경으로 펼쳐졌다. 격변의 세월이 적막 중에 묻혀 있음을 아느 사람은 누구인가! 大事의 계획은 이처럼 비밀에 싸인 채 조용히 진행되고 있었다.-96-
- 공덕리로 향하는 우국지사들 ;
10월 8일 새벽.
음력 20일의 밝은 달은 얼음처럼 정갈하게 맑은 밤하늘 위에 걸려 있었고, 머리 위에는 북두칠성이 빛나고 있었다. 차가운 가을바람은 갑옷을 스치고, 싸늘한 서리는 살을 에며 서늘한 칼날 위에 차갑게 내려앉았다. 멀리서 다듬이질하는 소리가 들려와 한밤중의 정적을 깨웠고, 기러기 소리는 이어졌다 끊기는 것이 고향 생각에 젖게 했다.
.......달빛이 버드나무 그림자와 어우러진 길을 내달려 경인가도의 교차점을 통과했다.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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