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06대출받음.
-왜의 본토로부터도 외면당하고 있는 대마도가 기댈 데라고는 조선밖에 없다는 거였다. 대마도주가 다시 예전처럼 문호를 개방해달라는 요청을 해온 것이 벌써 여러 차례라는 것도 허균은 잘 알았다. -13-
- 사명大師 惟政유정이 西山大師 休靜휴정의 부음을 접한 것은 갑진년(1604년) 2월 이었다. 묘향산 원적암에서 실제 서산대사가 입적한 1월24일로부터 보름도 더 지난 뒤였다. -22-
- 허균은 '이달' 의 빼어난 시를 모아 시집을 간행하고 [손곡산인전]이라는 한문소설을 써서 그 불우한 천재를 기린다. 저 나중에 쓰게 되는 저 유명한 한글소설 [홍길동전]의 영웅 홍길동 또한 이 '이달' 을 닮아 있다. 홍길동을 닮은 이달, 그는 바로 홍길동처럼 서얼이었다. -47-
- 허균이 성장하면서 일찍이 그 집안 식구들은 허씨5문장이라 불렸다. 어버지 허엽, 허성,허봉,허난설헌,허균까지 해서 문장이 빼어난 허씨가 다섯이었다. 허균이 초시에 급제한 것은 17세.문과에 급제한 것은 26세, 그 재주가 승한 것에 비해 도리어 급제가 늦었다. -50-
-할아버지 임종원은 어린 임응규(사명대사 유정의 속가 이름)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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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산군 시절, 응규의 증조부 임효곤이 중앙 관직에 있다가 무오사화를 피해 한때 자신이 수령으로 지낸 적이 있는 대구로 솔가해 살았다. 그 아들 임종원은 다시 집을 옮기게 되었으니 그곳이 바로 응규의 태 자리가 된 것이다.(경남 밀양군 무안면 고라리)
.....임종원은 응규 아버지 (임수성) 과 상의해서 마침내 응규를 데리고 영동의 황악산 아래에서 임효곤과 동문수학한 후배 황여헌이 송안정이라 이름붙인 정자를 짓고 후학을 가르치며 지내고 있었다.
응규는 열네 살 때 아버지를 어의고, 그 이듬해 어머니를 여읜다 -58-
-대마도는 물산이 넉넉지 않았고 그래서 한반도의 홀대를 받는 일이 잦았다. 그럴 때 생존을 위해 그들잉 택한 행동이 바로 노략질이었다. 동아시아 역사 속에 등장하는 왜구의 주요 근거지의 하나가 대마도였으며, 그피해는 한반도를 비록해 중국 대륙의 동남해 연안까지 널리 퍼졌다.
고려 말 나라를 다스릴 힘잉 떨어지자,왜구의 출몰은 극에 달했다. 이때 왜구 침략을 분쇄한 장수가 바로 조선의 개조 이성계다.-77-
- 언젠가 류성룡이 취중에 임금 선조를 두고 한 말을 떠올렸다.
바르게 결단한 일은 결단한 후에도 길게 망설이고, 그르게 결단한 일은 신속하고 단호하다..... . 그때 류성룡은 중얼거리듯 말하고 나서 스스로 그 말을 추스르느라 혼이 빠진 낯빛이었다. -88-
- 유정은 '김충선' 대신에 먼저 '사야가' 하는 말을 내뱉을 뻔했다.
사야가는 임진년 4월에 왜군의 선봉으로 나서 부산에 상륙했다가 수하 병사들을 이끌고 경상도 좌병사 박진에게 투항했다. 이런 왜군들을 일컬어 항왜降倭라 했다. 이 항왜의 숫자가 1만이 넘었다.
사야가는 왜란이 종격된 뒤 국왕으로부터 김충선이라는 이름과 종2품 벼슬을 하사받고 진주목사의 딸과 결혼해서 경상도 달성에서 후학을 기르며 지내고 있었다. 김충선은 인조반정 직후에 일어난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 데 힘을 보태고, 병자호란 때는 임금의 명이 내려지기도 전에 스스로 북방으로 달려가 오랑케를 치는 공을 세운다.-125-
- 조선이 예로부터 중국에 속한 나라라는 뜻으로 도진唐人이라 비하해서 쓰는 일도 많습니다. 조선잉 일본을 왜라 부르는 것은 그만큼 습관에 의지해 일본을 얕잡아본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얕잡아보던 일본잉 결국 조선을 침략해 왔지요.이제 조선은 일본을 업신여기기만 할 것이 아니라 엄연히 이웃해 있는 한 나라로 인식해야 다시는 일본에 당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128-
- 남묘南廟는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장수 관우를 모시는 사당인 관왕묘의 하나로 숭례문 밖 도동에 자리한 남묘는 동묘에 비해 규모도 작고 금동상에 비하지 못할 소상이지만, 도성에서 한강으로 나가는 길목에 있어 나라의 명을 받고 외방으로 나가는 관원들이면 반드시 들르는 명소가 되어 있었다. 이태 전부터 나라에서도 매년 봄 가을 경칩일과 상강일에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왔다. -152-
- 왜에서는 한 사람 한 사람 속마음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전체의 화를 해치지 않기 위해 다른 뜻이 있어도 속마음을 드러내지 못하게 습관이 된 사람들이 일본인들입니다. -179-
-규슈 북단의 나고야名護屋(명호옥)성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의 다이묘들을 불러모아 1591년 가을부터 1592년 봄 사이 6개월간 17만 평방미터 넓이로 쌓아올린 성이다.오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천하를 제패한 뒤 세운 오사카성 다음 가는 규모였다. 지금은 규슈의 사가 현
진제이마치鎭西町 나고야 성 유적지로 남아 있다.-255-
- 함경도 경성에서 선무(민십을 수습하고 안정시키는 일) 활동을 하던 선조의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을,그 지역 아전인 '국세필' 과 '국경인' 이 잡아 바친 것이다. -270-
- 안토쿠 덴노가 죽은 뒤,일본에서의 덴노는 나라를 대표하는 상징으로만 남고, 실제 권력은 쇼군을 정점으로 한는 막부가 가지는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 이 시대를 가마쿠라 시대라 한다. -296-
- 기우는 해를 어떻게 건져올릴 수 있겠습니까? -302-
- 일본 승려 '후지와라 세이카' 가 그리워하는 '강항' 은 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온 조선인 학자였다.
강항이 일본으로 잡혀간 것은 정유재란 때인 1597년이었다. 그때 형조좌랑인 강항은 휴가를 받아 고향 영광에가 있던 강항은 물밀 듯 쳐들어오는 일본군에게 맞서기 위해 순찰사 종사관 김상준과 함께 격문을 돌려 의병 수백 인을 모았으나 역부족으로 왜군의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압송되었으며 , 강항이 일본 승려 '후지와라 세이카' 를 만난 것은 1598년 오사카를 거쳐 교토의 후시미 성으로 이송된 때였다.
강항은 사서오경을 일본식 한문 독법으로 읽을 수 잇는 화훈본和訓本 간행에 참여해 발문까지 썼다. -317-.
- 일본 유학의 성립에는 이 후지와라 세이카이 학문잉 절대적이었다. 이 덕분에 후지와라 세이카는 일본 유학의 開祖개조라 불리게 된다.
......강항은 자신이 유학을 가르친 '후지와라 세이카' 등의 일본인 학자들의 도움으로 1600년 일본 탈출에 성공햇다. 귀국한 뒤에는 한때 이덕형을 도와 책을 엮는 일에도 참여햇으나 나라에서 주는 벼슬도 마다하고 전라도 남원 땅에 머물면서 책 읽고 후학들을 기르는 일에만 전념했다. 강항이 피로 경험을 쓴 여러 편의글들이 그의 제자들의 힘으로 한 권의 책[간양록] 으로 엮여 오늘에 전하고 잇다. -318-
- 장보고......
한반도보다 중국과 일본에 더 잘 알려진 장보고는 신라가 멸망 한 이후 고려를 거쳐 조선으로 넘어오는 동안 제대로 평가되지 못하고 있었다. 유정도 신라의 장보고가 중국의 산둥성에 큰 절을 세우고 서해를 오가는 이들에게 크게 음덕을 베푼 승려였다는 얘기를 몇 차례 듣기만 햇을 뿐 달리 감흥을 내어 본 적이 없엇다. -331-
- 오래전에 도쿠가와 쇼군에게 쓰라린 패배를 겪게 한 다케다 신겐武田信玄 이라는 영주가 이런 말을 했다.
"완전한 승리는 죄악이다. 반을 이기는 것이 최선이다."
다케다 신겐은 일본의 전국시대, 새로운 전법으로 승승장구 영역을 넓혀가던 전설적인 무장이었다. 오다 노부나가 군과의 싸움에서 급사하지만 않았으면 이 다케다 신겐이 맨 처음 통일천하를 이루엇을 것이다. -333-
- 교토는 794년부터 400년간의 헤이안 시대平安時代를 거쳐,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잡은 에도시대(1603~1867) 이전까지 국정의 중심이었던 교토다. -337-
- 1460년대 무로마치 막부시대에 쇼군 승계 문제로 일어난 소위 '오닌의 난' 이후 100년 하고도 수십 년 동안 수많은 전쟁으로 온통 피비린내의 역사를 이어온 전국시대를 마무리하고 있는 인물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아닌가.- 346-
- 후시미 성의 정원 양편에서 벚꽃나무가 다투어 흔들거렷다. 성미 급한 벚꽃은 벌써 꽃잎을 허공에 흩날리고 잇엇다.
"세상에 이 무렵의 벚꽃보다 더 슬픈 게 있을까 싶습니다. 이토록 흐드러지게 피었다가 눈꽃으로 화려하게 떨어지고 나면 어느새 지리멸렬한 몰골로 바닥에 흩어져 있게 되지요.저는 벚곷의 마지막 절정을 볼 때마다 장렬하게 죽어간 사무라이들을 보는 듯합니다. 내 운명도 저와 다를 바 없구나 하는 생각잉 들 때가 많지요.
1605년 3월4일 후시미 성 천수각에서 만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만개한 벚꽃에서 무수히 죽어간 사무라이의 운명을 느꼈다면 유정은 이 벚꽃에서 일본의 운명과 슬픔 같은 것이 느껴진다고 말하고 싶었다. -351-
- 지금은 쇼군을 비롯해서 어떤 다이묘도 조선 침략 운운하는 이는 없는 듯 합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도쿠가와 바쿠후를 비롯해서 모든 일본 사람들이 지난날 일본이 조선을 침략했건 안했건 그 사실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일본은 조선 침략에 대해 죄스러워하지도 부끄럽게 여기지도 않고 있어요. 지금에 이르러 조선과 교통이 필오한 것일 뿐, 지난 일은 조금도 문제될 게 없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387-
- 일본을 대할 때는 언제 어디서라도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부터 백까지 터럭 끝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바로 보아야 합니다. 귀국하시고 나면 이제 후세 사람들잉 일본에 오고 일본과 교류할 때 바로 이 점을 명심하도록 하셔야 합니다. 일본인들이 법도 없고 예도 모르는 미개한 족속이라 업신여긴다거나, 또 조그만 것으로 신기한 것을 잘 만들어내는 재주에 할 말을 잃고 외면하거나 하면 번번이 당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마음을 열되, 한편으로는 스스로 빈틈이 없어야 합니다. -390-
- 1592년에 발발해 7년을 이은 왜란은 사실 그때 그 사건으로 마감되기는 했지만, 그 무렵부터 일본의 의식에 소위 조선을 정복해야 한다는
征韓論이 역사적 가능성으로 자리잡았다고 할 수 있다. 왜란이 끝나고 300년 뒤에 일본은 한국을 강점한다. 이것이 왜란 때 구체화 가능성을 맛본 정한론의 명확한 실현이다. 이 정한론이 대륙으로 확장된 논리가 대동아공영론이다. 일본이 각국에서 저지른 만행에 대해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 일본의 당당함은 왜란 때 굳어진 정한론에 그 단단한 싸앗이 박혀 있다. 명명백객한 역사적 사실마저도 인정하지 않는 일본의 관습을
21세기를 사는 국제인들이 이해하지 못할 정도라면, 참으로 그 근원을 파헤쳐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이건 역사학자뿐 아니라 작가를 자극하는 주제가 아닐 수 없다. -399-
-......-407-끝.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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