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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8 / (심리학으로 보는 ) 조선왕조실록 - 강현식 지음

최해식 2015. 3. 12. 19:41

-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이 있다.  바로 어머니 앞에서는 아내 편을 들고 아내  앞에선느 어머니 편을 드는 것이다.  이럴 경우 고부갈등은 오히려 사라지지 않고 더 커진다.

조선 9대 성종의 어머니는  인수대비 이고 그의 처는 폐비 윤씨이다.

이는  10대 연산군의 생모이다.  연산군는 작은어머니인 정현왕후 윤씨가  친모인줄 알고 자랐다

인수대비는 의도적으로 의도적으로 그녀의 아들(성종)을 빼앗긴 고통을 느껴 보라고 연산군을 떠어 낸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그랬다.  인수대비의 분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윤씨에게서 둘째 아들까지 뗘어 놓았다.  인수대비는 이렇게 윤씨에게서 두 아들을 모두 빼앗아 버린 것이다.

윤씨가 폐위된 뒤 윤호의  딸이 정현왕후가 되어 중전이 되었는데, 연산군은  정현왕후가 어머니인 줄 알고 자랐다. 

안타까운 사실이지만 사람은 자신이 받아 보지 못한 것은 알기 어렵다.  따뜻한 배려를 받아 본 사람은 다른 사람을 따뜻하게 배려할 줄 안다.  반대로 미움을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미워하기 쉽고, 멸시의 눈초리를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멸시의 눈초리로 쳐다보기 쉽다.  그런 면에서 연산군의 삶은 자신이 받은 것을 그대로  되돌려 주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고 차갑고 냉정하게 대하며, 자기 멋대로 하고 쉽게 미워하고 죽이는 것은 어머니 뱃속에서  오장육부가 생길 때부터 그런 대접을 받았기 때문이다. -103~105-

 

 

- 성종은 세종과  더불어 명군으로 칭송받는다. 하지만 세종이 근면한 왕이고 학문에 매진하는 왕이었다면, 성종은 학문 못지않게 시와 사냥,주색과 여색을 탐했다.  야사에는 밤에 궁을 빠져나가 규방을 출입했고, 어우동과 함께 유흥을 즐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또한 연산군도 성종을 꼭 빼닮았다.  치세 초기에는 오히려 성종 말기에 나타난 퇴폐와 부패를 일소할 정도 였다가  무오사화를 통해 사림을 축출하면서 조정을 장악하자  연산군은 날마다 잔치를 열고 기생을 궁에  들였다 성균관을 폐비하여 유흥장으로 만들었으며 , 심지어 여염집 아낙을 겁탈하거나 큰어머니뻘 되는 월산대군의 부인을 겁탈하기도 했다.

성종과 연산군, 아버지와 아들의 공통점은 끊임없이 여인의 품을 떠나지 못하여 여색에 빠졌다는 것이다.  그 원인은 이들의 어린 시절에 잇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은 어린 시절에 부모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아야 한다. 어린 아이들의 얼굴이나 신체 구조가 유난히 귀여운 이유도 바로 부모에게 사랑을 끌어내기 위해서라고 한다.  특히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따뜻한 신체 접촉이다.  아이들은 부모에게 안기기를 원한다. 따뜻한 엄마의 가슴과 아빠의 품은 아이들에게 심리적 평안함을 가져다준다. -105~106-

 

 

- 부모에게 받지 못한 것을 배우자에게 받으려는 노력은 대부분 실패하고 만다.  왜냐하면 부모는 전적인 사랑과 헌신으로 자녀를 사랑하지만, 배우자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배우자는 무조건적이고 전적인 사랑을 해 주지는 못한ㄷ.  결국 배우자에게 부모의 품을 기대했다가 그것이 채워지지 않으면 끊임없이 다른 사람을 찾는다.  끊임없이 여자 문제를 일으키는  남성의 어린 시절과 심리상태는 모두 비슷하다.

많은 사람들이 연산군에게 손각락질을 한다.  그러나 정말 비난받아야 할 사람은 연산군이 아니라  인수대비일지도 모른 다  그녀는 아들을 위해 며느리와 손자를 내쳤기 때문이다. 아들 때문에 며느리의 아들을 버린 셈이다.

인수대비의 바람대로 성종는 성군으로 기억된다. 비록 연산군과 여러 모로 비슷한 점이 있었지만 어머니 덕분에 그렇게 된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잇느냐고  따져 묻고 싶지만 앞서 살펴본 인수대비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도 연약한 피해자다. 자신의 약함을 감추기 위해 끊임없이 강해져야만 했던 연약한 여인이다. 누가 연산군이나 인수대비에게 돌을 던지겠는가?-107~108-

 

 

- 심리학자들은  부모들에게 자녀가 성공하고 행복하기를 원하나면  자녀를 믿고 기다리라고 조언한다. -123-

 

 

- 명종이 친정을 시작하면서 흉년이 계속되고, 양주에서는 백정 출신인 임꺽정이 나타나 의적 행세를 했다.  또한 명종 10년인 1555년 5월에는 왜구가 전라남도의 남해안 쪽으로 침입한 '을묘왜변' 이 일어났다.

명종은 문정왕후와 외숙부 윤원형 일파의 세력을 견제해야 했고, 흉흉해진 민심을 잡고 도적떼를 소탕해야 했다. 대외적으로는 허술해진 국방을 틈타 침략하는 왜구를 물리쳐야 했다. 이렇게 명종은 끊임없이 국정에 시달려야 했다.

명종의 외아들(순회세자)도 13세 때인 1563년에 죽었다. 명종은 생모인 문정왕후가 죽은 지 2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왕이 될 후사는 아무도 없었다. -142-

 

 

- 1627년 1월, '정묘호란' 이다.후금은 3만의 병력을 이끌고 남하했다.

인조는 한양을 떠나 강화도로 몸을 피했다.

'이괄의 난' 때  공주로 피신한 지 3년 만에 다시 한양을 버린 것이다.

1636년 12월 , '병자호란' 이다. 淸 태종은 12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불과 14일 만에 개성에 도착했다. 

인조는 정묘호란 때처럼 강화도로 피신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아서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이는 淸의 남하 속도가 너무 빨랐기 때문이다

淸은 남한산성을 포위했고 , 군량미는 40일 만에 바닥을 드러냈다.  

결국 1637년 1월, 인조는 세자와 함께 남한산성의 서문으로 나가 한강 동남쪽에 위치한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무릎을 끓고 신하의 예를 갖춘다 이것이 삼전도의 굴욕이다.  조선은 대대로 후금(여진족)을 오랑캐라면서 무시했다. 외교도 할 가치가 없는 떠돌이 부족민들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그 오랑캐에게 무픞을 끓고 청과의 군신관계를 맺는데, 이 관계는 1895년 청일 전쟁에서 청이 일본에게 패할 때까지 계속된다.

청 태종은 2월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등 인조의 아들들과 신하들을 볼모로 데리고 심양으로 돌아갔다. -176~178-

 

 

- 조선 역사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삼전도의 굴욕, 도대체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이르렀을까? 나라를 구하겠다는 기치를 걸고 반정을 일으킨 인조와 서인은 평소 오랑캐라고 무시하던 청 태종에게 머리를 숙일 때까지 무엇을 했단 말인가? 조정은 상황이 이렇게 악화되기 전에 사태를 막거나 혹은 누그러뜨릴 기회가 몇 번 있었다.  후금을 무조건 상대할 가치도 없는 민족으로 몰아붙이지 않고 후금의 군사력이 어떠한지, 후금에 대항해서 싸울 수 있는 조선의 병력이 어느 정도인지, 명나라의 내부 사정이 어떠한지 등 사태를 현실적으로 파악했더라면 삼전도의 굴욕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조와 서인은 그러지 못했다.  어떻게 이러한 일인 일어난 것일까?-179~180-

 

 

- 정묘호란 후에도  조선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비록 정묘호란 후 형제 관계를 맺기는 했지만,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 후금과의 관계를 개선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아니었다. 여전히  인조와 서인은 후금을 오랑캐로 무시하는 생각이 강했다. 그러다가 후금이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황제의 나라로 선포하니, 이들과의 관계단절까지 선언 한 것이다.  -182-

**  << 1634년 후금은 만주의 대부분을 차지했고 명나라와의 일전을 치르기 위해서 주변국들의 지원을 요청 했다.  하지만 조선은 명을 배반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에 인조는 명과 청 사이에서 고민한 끝에 명을 선택했고, 후금과의 관계를 끊겠다고 선언했다. 이때가 인조 14년,

1636년 3월이었다. 다음 달인 4월, 후금은 국호를 淸으로 고친 뒤 황제의 나라인 제국으로 선포한 뒤 조선에게 형제국이 아닌 군주의 나라로 섬기라고 압력을 넣었다.  다시 말해 신하의 예를 갖추라고 한 것이다. 이에 인조는 조정의 논쟁을 거쳐 주전론으로 의견이 모였고 인조는 청과 전쟁을 선포하는 교서를 내린다.  이에 淸 태종은 그해 12월, 12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다. 호란이 일어난 것이다. -177->>   

 

 

 

 

- 숙종 때 '갑인환국' 을 실시했다.

환국이란 왕이 조정의 대신들을 전면적으로 바꿔 버리는 일종의 정권교체를 의미한다.

갑인환국 이후  서인의 손에 잇었던 조정은 남인에게 넘어갔고,숙종은 어머니인 명성황후 김씨의 천거를 받아 김석주를 요직에 앉혀 놓았다.

2번 째 환국은 '경신출척' 이다.  숙종 6년(1680)에 일어났다.

남인의 영수였던 '허적' .  그의 아들인 서자 '허견'이 역모에 가담했다하여 100여 명에 달하는 남인을 사형시켰다. 

3번 째 환국은 '기사환국' 이다.

 이는 장희빈의 아들  '균' 을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세자에 책봉에 반대한 서인에게 사사를 내려  서인의 영수인 송시열도 사사를 당했다.

숙종의 정비는 인경왕후 김씨이고, 그녀가 죽자 인현왕후 민씨를 계비로 받아들였다. 인현왕후도 아이를 갖지 못하자 숙종은 장희빈에게 마음을 두었다.  한편 인현왕후는 서인 출신이었고 희빈 장씨는 남인과 연결되어 있던 것도 기사환국의 중요한 원인이다. 이로인하여 서인은 축출되고 남인이 다시 조정을 장악했다.  -216~217-

 

 

- 원자로 태어난 숙종 은 어린 시절부터 늘 궁중 예절과 격식에 맞게 생활해야 했다. 

어린이들은 어리게 행동해야 한다. 어리광도 부리고, 변덕도 부리는 것이 어린아이들만의 특권이다. 그리고는 한없이 공감과 이해를 얻고자 하는 것이 아이들의 마음이다. 

그러나 숙종은 이러한 어린 시절이 없자 자신의 마음을 공감해 준느 사람을 찾아헤맸으나 누구도 자신의 마음을 채워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게 되면 이내 내치고 마는 전형적인 '지기애적' 성격이 된 것이다. -225- 

 

 

- 1884년 우정국 낙성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갑신정변' 이 일어났다. 

김옥균, 박영효등 급진 개화파는 고종과 민씨를 협박하여 민씨 척족을 이들이 보는 앞에서 살해했다. 이에 민비는 청군에게 다시 도움을 요청하여 , 청군이 창덕궁으로 진입하자 김옥균, 박영효 등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를 통해 청나라의 간섭이 심해졌다. 청의 북양대신 리홍장은 갑신정변에서  고종의 어리석음,나약함,민씨 척족의 세도정치, 친일 개화파의 반청 행보를 비판하면서 조선을 대놓고 간섭했다. -294-

 

-......-300-끝.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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