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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애 유성룡 ]
1542년 10월1일, 서애 유성룡은 안동시 풍산면 하외 마을에서 태어났다. '하외' 는 굽이굽이 흐르는 낙동강이 돌면서 만들어진 마을이라 강물이 돌아간다는 뜻으로 河回라 이름이 바뀌었고, 마을에서 강 건너 서쪽 절벽의 경치가 너무 아름다웠는데 유성룡이 그곳을 사랑해 '서애' 라는 호를 자호 로 삼았다. 그는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아버지 '유중영' 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119-
-서애 유성룡은 화합과 조정의 명수인 정치지도자였다. 지도자느 조화를 이루고 조정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극단적인 대립이 벌어지고 각을 세운 논쟁이 치열할 떼 조정을 통해 실마리의 얽힘을 풀어서 화합의 분위기로 이끌 수 있어야 한다. -122-
-서애는 충장공 '권율'과 충무공 '이순신'을 천거하여 임진왜란으로 패망해버린 조선이라는 나라를 되살리는 데 큰 공을 세웠다.-124-
-400년 전에 세상을 떠난 서애는 '안동시 풍산면 소동리' 라는 마을의 뒷산에 누워 잇다. (......) 병산서원에서는 지금도 수시로 학술토론대회가 열리고 있다. -126-
-하회마을에는 겸암'유운룡' 의 종가인 '양진당'과 서애의 종가인 '충효당'이 거기에 있다.이곳은 민속관광촌으로 되어 있다.-128-
-서애는 [징비록] 이라는 명저를 남긴다. [시경]에 '징전비후懲前毖後' 라는 글귀가 잇다. '과거의 잘못을 반성해 미래르 대비한다' 는 뜻인데 여기서 책의 제목으로 삼았다, 이 책레서 서애는 나라의 비극을 다시는 겪지 않기 위해 재건을 위한 비전을 제시했다. 이 책 하나만으로도 서애는 영원한 역사적 인물이 되기에 충분했다. "이제야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리오마는 다만 뒷날에 경계로 삼아야 하겠기에 자세하게 적어둔다" 는 저작 목적이 오늘날 더욱 새롭다. (.......)
형조 정랑 '권율'을 추천해 의주 목사로 삼았고,정읍 현감 이순신을 추천해 전라좌도 수사로 삼았다" 는 부분이 그것이다. 사람을 천거함은 이런 일을 두고 하는 말이다. 현감을 수사에 오르게 하는 일은 유례없는 승진이나, 바로 서애의 안목을 그런 데서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충신이자 명장을 천거했기에 임진왜란과 같은 큰 난리에도 나라를 중흥시킬 수 있었으리라 여기면,서애의 공은 필설로 다 표현할 수 없으리라.
옛말에 "집안이 가난하면 어진 아내가 생각나고,나라에 난리가 나면 훌륭한 재상이 생각난다.' 고 했는데, 서애야말로 나라가 어지럽고 난리가 날 때 언제나 생각나는 재상의 대표적 인물이다. 그만한 학식과 능력,그만한 지혜를 지닌 인물이 있기 때문에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망할 지경에도 중흥의 대업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다. -131~132-.
- [백사 이항복 ]
한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 일생을 마치고 세상을 떠난 뒤에 그의 삶을 제대로 평가해 역사적 지위를 올바르게 인정받을 수 있는 일처럼 의미 있는 일이 또 있을까.
조선중기 명종 11년인 1556년에 태어나 광해군 10년인 1618년에 63세로 서거했던 '백사 이항복'은 백척간두에 서 있던 나라를 구하고 학문과 문장, 탁월한 경륜으로 나라를 중흥시킨 위인이다. -155-
-백사 이항복과 5세 연하의 한음 '이덕형'은 같은 해에 과거에 합격해 조정에서 함께 벼슬하면서 임진왜란과 광해군의 폭정을 극복해내는 경륜을 발휘했다. (.....) 영의정을 지낸 '권철'은 이항복의 이웃집 노인이었다. '권철'은 아들 '권율'에게 권해 백사는 19세에 권율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골목대장이던 백사는 도원수이자 문무에 능한 권율의 사위가 되면서 더욱 공부에 힘쓰고 노력해 선조 13년인 1580년에 25세로 병과丙科에 급제해 벼슬길에 오른다. 이 해에 이덕형도 20세로 을과乙科에 1인으로 급제해 함께 벼슬을 시작했다. -157~158-
-파란만장했던 선조가 붕어하자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외교 역량은 우수했으나 내치는 문제가 많았다. 당파싸움이 치열해지면서 광해군은 이복형제를 죽이고 어머니 왕비를 폐하는 큰 날리를 일으킨다. 이에 이항복은 죽음을 무릅쓴 항거에 나섰다가 끝내 '탈관삭직'되어 망우리로 옮겨 은거했으나 다시 북청으로 유배되었다.
63세의 노인 백사는 1618년 1월18일 회양의 철령을 넘으면서 피눈물이 솟아나는 시조를 읊었다.
철령 높은 재에 자고 가는 저 구름아,
고신원루를 비 삼아 띄워다가
임 계신 구중심처에 뿌려본들 어떠리.
북청 유배지에 도착한지 3개월째인 1618년 5월13일 새벽닭이 울고 동이 틀 무렵 백사는 63세를 일기로 운명했다. 그 후 백사를 수행한 장군 '정충신'이 시신을 거두어 선산이 있는 포천으로 6월17일 출발해 7월12일 도착하여 8월4일 장사를 지냈다 .일세의 영웅 백사 이항복은 그때 이래 포천에 잠들어 계신다. -161~162-
- 임진왜란中 더욱 어려운 판국은 중국의 '정응태'라는 사람이 조선을 무고해 조선이 명을 침범한다는 거짓보고를 올려 선조 31년, 우의정이었던 이항복은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명나라에 들어가 황제를 설득하여 정응태의 무고임을 밝혀내 명과 조선이 틈을 메우고 이웃이 되어 왜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영의정에 올랐고, 왜군을 무리쳐 나라를 구해낸 공로가 인정되어 '오성 부원군' 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백사 이항복은 '오성 대감' 이라는 명칭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61-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방축리 산 16-1에 '화산서원'이 있다. 이곳에 백사의 영정과 신주를 모시고 제향을 올리고 있다.
화산서원에서 멀지 않은 '금현리' 의 백사선생 묘소를 찾았다. 이곳이 명당이 아니라면 후손들이 대대손손 훌륭함을 자랑할 수 있었으랴.
"착함을 쌓은 집안에는 여경餘慶이 있다" 는 古經의 말대로, 백사 이후의 경주 이씨 문중은 조선 굴지의 명가로 백사 자신이 영의정에 대제학이되었고 , 증손자인 '세필'과 '세귀' 는 당대의 명인으로 좌찬성과 영의정에 각각 증직되었다. '세귀'의 아들인 '광좌' 는 대제학과 영의정에 올랐고 , 세필의 아들 '태좌'는 좌의정에 올랐다. '태좌'의 아들 '종성' 역시 영의정에 올랐다. 후손인 '이경일' 도 좌의정에 올랐으며, 한말 고종 때의 '이유원'은 이조 판서 '이계조' 의 아들로 또다시 영의정에 올랐다. '이유원' 의 후손이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인 성재 '이시영' 이었으니
[이계조 - 이유원 - 이시영 ] 거명하지 못한 이조 참판,이조 판서 등이 셀 수 없이 많다. 조선시대 명문 중의 명문으로 꼽힐 만하다.-163~165-
- [고산 윤선도 ]
[표해록] 의 저자 금남 '최부' 는 문과에 급제해 서울에서 벼슬하다가 해남에서 활동하며 제자를 양성했다. 그중에서 해남 윤씨 가문에 혁혁한 제자를 두었으니 그가 바로 어초은 '윤효정'이다. 갑자사화와 을사사화에 절의와 정도를 지키다 효수당했던 스승인 금남의 정신을 이은 '윤효정'은 진사과에 합격한 뒤로 패악한 정치에 발을 끊었다.
윤효정의 아들'윤구' 는 홍문관 부교리의 당당한 문신이었으나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더는 벼슬을 하지 못했다. 윤구의 증손자가 고산 '윤선도'다. 윤구의 아들 '윤의중' 은 좌참찬을 지내고
그 아들 '윤유기' 는 강원도 관찰사 였는데, 그가 바로 고산의 큰아버지이자 양아버지였다. 1587년 고산 윤선도는 서울 종로구 연지동 에서 태어났지만 생활의 근거지는 선대의 고향인 해남이었다.-193~194-
-해남 하면 '녹우당'이다.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 '윤선도' 의 고향집은 윤선도의 고조할아버지 '윤효정' 이래로 500년이 넘은 명승지다. 녹우당이라는 현판의 글씨는 성호 이익의 형인 옥동 '이서' 가 쓴 것이다. 이서는 고산의 증손자 공재 '윤두서'와 가까운 친구였다. 천하의 명필로 유명한 '이서'가 친구를 위해 글씨를 써준 것이다. (........) 해남의 녹우당은 한국 최고 명승지 가운데 하나이다. -210-
- [창계 임영 ]
창계 임영은 일반 학자들과는 다르게 '칠성례' 리는 특별한 의식을 정해놓고 실천에 옮겼다.
'칠성례'란 글자 그대로 일곱 차례 반성의 기회를 갖는다는 것이다. 자신을 깨우치고 반성할 자료가 되는 글이나 격언를 선정해 놓고 하루에 일곱 차례인 ,즉 새벽, 조반을 들기 전/ 후 , 정오 , 석식 전 /후 , 잠들기 직전의 시간에 "자기반성" 의 기회를 갖는 것이다. -254-
- [ 성호 이익 ]
조선 후기 18세기의 대표적 실학자는 성호 이익 이다.
17세기는 반계 유형원 이라면,
19세기는 다산 정약용 이 최고의 학자다.
성호가 일생동안 반계의 학문을 천착하고 정리 했듯이,
다산은 일생을 성호의 학문에 천착하고 연구하면서 조선의 실학사상을 집대성했다. (.........)
모든 강물이 흐르고 흘러서 큰 바다로 들어오듯이, 성호의 넓고 깊은 학문 때문에 학문을 배우고자 하느 학자들이 '성호장' 으로 모여들어 학문의 바다를 이룬 곳이 성호학파였다는 뜻이다. -280-
- [ 번암 채제공 ]
사람은 살아 잇는 동안에는 제대로 평가받기가 어렵다. 운명하고 난 뒤, 관 뚜껑을 덮고 나야만 그 사람에 대해 올바르게 평가할 수 있다는 것이 옛날부터 전해지는 이야기다. 이는 당대의 명재상이자 경륜 높은 정치가에 시문에도 뛰어났던 '채제공' 은 죽은 뒤에 훨씬 높은 평가를 받았다. -289-
- [존재 위백규 ]
-존재 위백규는 18세기를 살아가면서 조선 후기의 실학을 꽃피운
호남 3천재 실학자, 순창의 실학자 여암 신경준, 고창의 이재 황윤석,
존재 위백규, 중 한사람이다. -312-
- 강진 에 다산 정약용의 '다산초당' 이 있다면,
장흥 에는 존재 위백규의 '다산정사' 가 있다.
장흥군 관산읍 다산. 계항산 속에서 존재 위백규가 '다산정사'를 짓고 학문에 힘쓰며 제자들을 가르쳤다.
한편 강진의 '다산초당'에서는 다산 정약용이 귀양 살면서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323-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에는 '만덕사' 라는 절이 잇다. 다산초당에서 오솔길을 따라 등선 하나만 넘으면 있는 절이다. 18년의 귀양살이 동안 다산 정약용이 가장 많이 드나들던 절이다. 그렇게 절친했던 스님 혜장선사 가 머물던 절로, 만덕사 또는 백련사 라고 부른다. 고향에서 멀지 않은 곳이어서 위백규도 이곳을 찾은 적이 있다. 다산이 찾아오기 이전의 일이었다. (......)
위백규가 쓴 [만덕사] 라는 제목의 시가 있다. 만덕사의 동백꽃 군락지는 세상에 유명한 경관이다. 위백규가 찾았던 그때의 만덕사에도 동백숲은 우거져 꽃이 지고 피었나보다. 이런 시를 짓고 만덕사에서 노닐었던 위백규가 세상을 떠나고 3년 뒤에 다산은 강진으로 귀양 온다. 그리고 8년 뒤에 다산초당에 숨어 지내면서 수시로 백련사에서 노닐었다. 정약용의 동백꽃 시는 너무 많아 인용할 수도 없다. 당대의 실학자들이 노닐었던 만덕사에는 지금도 동백숲이 푸르게 우거져 군락지를 이루고 있다. 존재 위백규는 1727년 태어나 1798년, 72세로 타계했다.-326~327-
- [다산 정약용 ]
조선 최고의 학자이자, 희대의 실학자, 개혁가이던 다산 정약용은 1762년 6월 16일 태어났다. 이날은 바로 한 달 전에 조선 최대의 비극으로 꼽히는 '임오사건' 즉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어가야 했던 참극이 일어났다. 사도세자의 죽음을 계기로 '시파' 와 '벽파' 사이의 당쟁이 격화되었다. 다산의 집안 가계는 '시파' 에 속했다.
사도세지를 정치적인 이유로 중상모략해 죽인 것이라고 믿는 부류가 시파였다.
세자의 죽음에 한없이 분노한 다산의 아버지 '정재원' 이 벼슬을 버릴고 고향으로 낙향해 세월을 보내던 때에 다산이 태어났다. -333~334-
-정약용이 다산초당에서 4서6경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해 '주자학' 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다산학' 을 수립해 냈다.
18년의 귀양살이 가운데 유배 초기에는 강진 읍내의 '사의재' 라는 주막집 방에서 연구하고, 강진 읍내의 뒷산에 있던 '고성사' 에서도 연구는 계속했다. 그러나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귤동마을의 뒷산인 다산에 있던 윤씨들의 서재인 '다산초당' 에서 '다산학'이 완성되었다. 이론 위주의 학문인 성리학에서 관념보다는 실용적이며 실천적인 '다산학'을 연구했음은 조선500년 학문의 역사에서도 손꼽히는 금자탑이었다.(........)
다산초당은 소유권도 전혀 없는 남의 산정山亭을 다산은 자신이 소유주인 양 경관을 아름답게 꾸며 놓았다. 물을 끌어다가 비류폭포인 인공폭포도 만들고, 그 물이 고이는 곳에 연못을 파서 경치를 단장했다, 흐르는 물을 받아 산자락에 계단밭을 일구어 미나리를 가꾸고 용돈도 벌고 반찬감도 장만했다. 바위 절벽에 '丁石' 두 글자를 새겨 징표로 여기고, 샘물인 약천과 차를 달이던 부뚜막인 다조 등을 만들어 선비의 연구처로 삼았다. 가을이면 노랗게 유자가 익어갔다. 마을 앞까지 밀려오던 구강포의 바닷물은 빠져나가면서 다산의 시름을 덜어주기도 했다. 그리고 초당의 뒤로 난 오솔길을 따라 걸으면 학승 혜장선사가 거처하던 백련사 절이 있어 답답한 가슴을 식히기에 넉넉했다. -341~343-
-임진왜란 이후롤 조선사람의 대부분은 일본을 '왜' 라고 얕잡아 보았고, 병자호란 이후로는 청나라가 야만국이자 '되놈' 의 나라라고 백안시했다. 그러면서 조선인들은 한 .당. 송 .명의 중국은 한없이 우월시하면서 시를 지어도 중국시,글을 지어도 중국글이어야 참다운 시이자 글이라고 고집하고 살았다. 역사책을 읽어도 중국의 [사기] [한서] [송사] 등에 매달리면서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등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자기 자신이나 자기 나라의 역사나 문학의 전통은 아예 업신여기고, 그저 미국을 비롯한 서양의 학문과 사상에만 매력을 느끼는 현대인들과 어짜면 그렇게도 닮았느가. 중국의 역사와 학문을 섭렵했고 조선의 역사와 학문으 제대로 연구한 다산은 그렇던 당시의 지식인들의 태도에 한없이 분노하면서 "나는 조선사람, 즐거이 조선시를 짓겠노라" 는 혁명적 선언을 감행했다. 역사적인 사실을 인용해도 우리의 역사적 사실을 인용하고 , 글을 지어도 우리식 글을 짓자는 그의 주장은 바로 오늘날 우리나라 지식인들에게 고하는 주장이 아닐는지. -346~347-
- '가장 한국적인 것만이 가장 세계적' 이고 '가장 조선적인 것만이 가장 보편적' 이라는 것을 다산은 익히 인식하고 있었으니 그의 혜안은 역시 높기만 했다. 내 나라, 내 민족, 우리 정서에는 눈을 감고, 세계화를 피상적으로만 인식하여 밖으로 외국으로만 향하는 지식인들은 이 점에서 다산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348-
- [향산 이만도]
향산 이만도는 경북 안동출신으로 퇴계 이황의 11대 후손이다. 할아버지, 아버지와 함께 3대가 문과에 급제했다. 특히 이만도는 장원 급제를 했다. 안동댐 건설로 '향산고택' 은 안동시 안막동에 옮겨져 있다. -443-
- 나라가 망히자 신분이 높고 귀한 집안에서는 일본에 아부하고 협력하며 그들과 동화되는 일에 앞장서는 경우가 많았다. 비록 적은 수효지만,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생명까지 바친 사람이 있었던 것은,그래도 의리를 숭상하던 유교정신이 길러준 민족혼의 긍정적인 측면이었다.-445-
-향산 이만도는 융희 4년인 1910년,69세의 노인이 되었다. 그해 음력으로 7월25일(양력8월29일) 나라가 일본에 합방되어 고종황제는 '덕수궁왕' 으로 , 융희황제는 '창덕궁왕' 으로 강등되었다. -447
- [영재 이건창]
영재 이건창은 1852년 강화도 사곡에서 태어났다.
이충익 - 이면백 - 이시원 - 이상학 - 이건창 - 이건승으로 이어지는 학자들의 집안이다.
이충익은 학자로 높은 이름을 얻었고,
그 아들 대연 이면백 은 다산 등과 교류하던 당대의 학자였다.
이시원은 판서 였다.
이상학은 양산 군수르 지냈고,
그아들이 이건창 . 이건승이고 ,그의 당질인 난곡 이건방은 위당 정인보의 스승이었다. -464-
- 영재의 할아버지 사기沙磯 '이시원' 은 그의 아우 '이지원' 과 함께 외국의 군대에 함락된 '병인양요' 의 억울함을 참지 못해 형제가 나란히 목숨을 끊었다. 벼슬이 이조 판서에 이른 고관대작으로 나라를 위해 지푸라기처럼 목숨을 버린 할아버지 , 그의 의혼에 이어 영재도 나라를 위해서 의로운 벼슬아치로 살았고, 당대 최고의 문장가라는 명성을 얻었다. 이처럼 강화도는 의리와 문장이 함께 빛나는 역사의 땅이다. -462-
- 이건창의 아우인 경재 '이건승' 은 나라가 망하자 친구들인 '홍승헌 . 정원하' 등과 함께 가족을 이끌고 중국으로 망명해 풍찬노숙으로 독립운동에 힘쓰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이제는 종적도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으니 너무나 슬픈 일이다. -470-
- 이건창이 타계한 지도 벌써 110년이 넘었다.
영재가 살아가던 시대가 어떤 때인가.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기전,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거치고, 임오군란에 갑신정변, 갑오동학운동에 갑오경장 등으로 급변하던 시국이었다. 마침내 을미년에는 민비시해라는 전대미분의 국란이 일어났다 왕비가 외국인의 침입으로 살해되는 비통한 시정에 그에게 어찌 나라에 대한 아픔이 없었겠는가. (........)
연재는 조선의 직신으로 암행어사라는 막중한 임무를 맡아서는 탐관오리들을 무섭게 다스리는 무서운 어사였다. 오죽하면 고종황제가 道臣이나 수령을 제수하면서 " 만약 잘못한다는 소리가 들리면 바로 이건창을 암행어사로 파견하겠다" 고 했을까. 이 말을 들은 벼슬아치들은 누구라도 벌벌 떨었다 한다. -471~472-
- 이건창은 15세라는 이른 나이에 과거에 급제했으나 곧고 바른 성품때문에 당로의 고관들과는 언제나 마찰을 빚어 벼슬길이 제대로 풀리지 않았다. '대원군'과도 사이가 좋지 못했고 권신들과도 늘 견해가 상반되어 귀양살이를 떠나거나 고향에 칩거하는 때가 많았다. 그는 불우한 시기에 시나 저술로 울분을 풀었다. 물우한 시절이 있었기에 그의 문장과 시가 세상에 이름을 날리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당쟁관계 저술이 바로 [당의통략] 이라는 책이다. 일단 조선의 당쟁사를 거론하려면 그 책을 참조하지 않을 수 없다.
이충익 - 이면백 - 이시원으로 내려 오는 역사학에 대한 추적이 바로 [당의 통략] 에 간추려졌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475-
- [매천 황현]
1855년 음력 12월11일 매천 황현은 전남 광양시 봉강면 석사리 서석마을에서 태어났다. (서석마을에 생가 가 복원되어 있다)
매천은 세종 때의 명정승 '황희' 의 후손이다 임진왜란 때 충청 병마절도사로 진주성 싸움에 서 순절한 이름난 장수 '황진' 의 10대 후손이다.
매천의 先代는 본디 남원에서 세거했다. 매천의 할아버지 '직' 이라는 분이 광양으로 내려와 석사리에 자리 잡고 살면서 가세를 일으켰다. 그의 아들은 '황시묵' 이고, 그 아들은 매천 '황현' , 그아들은 '황암현' , 또 그의 아들은 황 ? 교수이다. -481~488-
- 한말 최고의 역사책인 [매천야록] 은 매천의 높은 史眼과 통찰력 때문에 최근세사 연구에 높은 평가를 받는다. -483-
-구례군 광의면 수월리 월곡마을에는 그를 기리는 사당, 梅泉祠가 있다.
매천사를 뒤로하고 떠나오던 우리의 가슴에는 허전함이 가시지 않았다.
왜 오늘의 지식인들은 고전과 전통에 그리도 약한 것인지.그러니 높은 수준의 역사 창조가 어찌 가능하단 말인가. 우리 것만 알고 거기에만 빠지는 국수주의도 좋지 않지만, 밖의 것만 알고 우리 안을 모른다면 국적 없는 국제미아가 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내 나라 내 강산을 노래하고 우리 옛 선조의 경륜과 의혼을 배워 우리의 정체성을 제대로 확보해야 한다. -498- 끝.
-[퍼온글] ; http://blog.daum.net/marie2005/15720573
매천 황현 선생을 찾아서(광양~순천~구례) [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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