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역사는 돌고 도는 것 이라 말한다.
근대의 시작과 함께 중국은 한낱 종이호랑이를 넘어서 동네북으로 전락해 갖은 수모를 겪게 되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백년 뒤,상황은 다시 일변해 우리는 또다른 중국의 변신을 목도하고 잇다. 그것은 새롭게 세계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는 중국의 부상이다.
21세기에 그들은 전지구적으로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르는 미국과 맞설 대안으로 여겨지고 있으며,그들 스스로도 천하를 추구하고 천하를 자신의 손아귀에 넣으려는 야심을 공공연하게 드러내고 잇다.
이제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중국으로 몰리고 있다. 오랜 세월 중국의 수도 였던 베이징,베이징은 또다시 세계의 수도를 꿈꾸고 있는가? -10-
-봄은 만물을 소생하게 하기도 하지만,우리들 마음도 들뜨게 한다.얼음이 풀린 작은 시내가 졸졸 소리를 내기 시작하면 숲에서는 가장 먼저 산수유가 노란 꽃을 피우고 계곡은 그 향기에 까무룩 잠긴다. -41-
-중국 현재문학의 거장 ' 루쉰(盧迅,1881~ 1936) ' 역시 베이징대학에서 잠시 교편을 잡은 적이 있다.-87-
-베이징 도심에서 가을을 느끼기 가장 좋은 곳은 쿵쯔(孔子)의 사당인 '쿵먀오(孔廟공묘) '와 근대 이전의 국립대학 격인 ' 궈쯔졘(國子監
) 이 있는 청셴졔(成賢街) 이다.
현재 '쿵먀오'와 '궈쯔졘'은 옛 영화를 잃어버리고 퇴락해가고 잇다. 사시사철 관광객으로 붐비는 베이징이지만,이곳만큼은 사람들의 바ㅏㄹ길이 닿지 않아 고적함마저 느껴진다. 한여름의 열기가 사위어가고 이미 서늘해진 바람에 오히려 햇볕이 따사롭게 느껴지는 가을 오후 에는 '킁먀오'와 '궈쯔졘'에서 깊어가는 가을의 정취를 맛보는 것도 하나의 별취別趣라 할 수 있다. -147~ 155-
-청나라 때 연행사로 베이징에 왔던 조선의 지식인들이 자주 찾았던 곳은 '남당' 으로 천주교 성당이다.
연암 박지원의 천주교 예수상을 표사한 글을 보고 저자는 (조관희)는 아래와 같이 평했다.
그림이 얼마나 사실적으로 그려졌는 지,바라보던 박지원 일행은 "눈이 휘둥그레지도록 놀라 어쩔 줄 모르고 손을 벌리고 떨어지면 받을 듯이 고개를 젖혔다. " 박지원은 세세한 부분까지 손에 잡히돌록 생생하게 묘사하는 게 눈에 띈다. -160-
-따사로운 가을 햇볕이 꼬리를 길게 늘이면 베이징의 가을은 깊어만 가고,성당 앞마당이나 광장에서 발 쉼을 하노라면 바삐 가던 시간도 잠시 숨을 고른다.
" 시간은 날더러 기다리라 하는데,
내 청춘은 저만치 뒤에서 날 바라보고 있네. " -163-
-외부의 적을 방어하기 위해 쌓아올린 장성이 갑각류의 두터운 외피처럼 중국을 감싸안고 변화를 거부하는 동안 세계사의 흐름은 걷잡을 수 없이빠른 속도롤 흘러갔다.과연 중국인들이 장성을 쌓아서 지켜내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오늘도 장성은 말없이 그 자리에 서 있을 따름이다. -182-
-황궁은 일반적으로 '구궁'으로 불리는데,흔히 '쯔진청(紫禁城) '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다.
'금'이란느 말은 황제가 거주하는 곳이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의 접근이 엄격히 금지된다는 의미에서 붙은 것이다. 그러므롤 쯔진청이라는 말에는 '황제가 살고 있는 성역' 이라는 의미가 가 담려 있다. -184-
-'구궁' 의 궁중 여인들은 온갖 사치를 다하면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부귀영화를 한손에 쥐고 살았지만,한편으로는 황제의 환심을 사기 위한 암투를 벌여야 했고,다른 한편으로 구궁에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죽을 때까지 바깥 세상으로부터 절연된 상태에서 살아야 했으니,비빈으로 간택되어 궁궐로 들어간다는 것이 과연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판단하기 어려운 일이었는지 모른다. 그리하여 자객의 틈입을 염려하여 주변에 나무 한그루 심어놓지 않은 구궁의 가을은 깊어만 가는데,구중심처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은원 역시 바닥을 알 길 없는 심연 속으로 침잠해 들어갔던 것이다. -205-
-1929년 12월의 어느날,베이징 서남쪽의 작은 마을 '저우커우덴(周口店)에서 중국의 젊은 학자 '페이원중(裴文中,1904~82)이 베이징원인를 발견했다.당시 베이징의 '세허의학원'의 해부학 교수 로 있던 블랙(D. Black,1884~1934) 은 이 유골이 약 50만년 전인 구석기 전기에 활동했던 인류의 유골임을 확인했다.
하지만 베이징원인 및 발굴물들이 감쪽같이 사라져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현재로서는 발굴작업을 지원했던 '록펠러재단' 측이 안전한 곳으로 운반하다가 분실한 것이 아닌가 추정할 뿐,이 사건은 지금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현재 '저우커우덴'의 베이징원인 유지박물관에 전시된 것은 모조품이다. 아무튼 베이징에 사람이 살았던 때는 적어도 구석기 시대로 까지 거스럴 올라간다는 것이 입증돼다.-214~ 219-
-'주위안장'은 황제에 오르자 가장 먼저 자신과 함께 전쟁텅에서 고락을 같이했던 공신들을 하나씩 숙청해갔다. ' 교활한 토끼를 잡으면 사냥개를 삶아 먹느다'(狡兎死,走狗烹) 고 했던가?흔히 '토사구팽' 으로 줄여 부른느 이 말은 사냥이 끝나면 더이상 사냥개는 필요 없다는 말인데,멀리는 한나라 때 류방(劉邦)과 한신의 고사로부터 금군禁軍출신으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던 송 태조 자오쾅인(趙匡胤조광윤) 이 가장 먼저 금군을 없앤 일까지,개국공신이 하루아침에 찬밥 신세가 된 것은 이러한 역사의 아이러니가 끊임없이 반복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명 태조 역시 자신을 포함해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공신들을 모조리 제거해버렸다. -229-
-주위안장' 의 아들중 베이핑에 분봉된 연왕 '주디(朱逮주체) ' 는 1399년 '정난의 변' 을 일으켜 어린 조카에게 반기를 들어 황제 자리를 빼앗았다.우리 엿사의 '단종애사' 와 흡사한 면이 있다. 연왕은 1402년 영락이라 연호를 ㄹ바꾸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영락제는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북원의 위협에 대비하고자 즉위 다음해(1403년) 에 수도를 '진링金陵 (지금의 난징 ) ' 에서 다시 베이핑으로 옮기고 이름을 '베이징' 으로 바꾸었다. 오늘날 베이징이라는 명칭은 이때 처음 생긴 것이다. 영락제의 베이징 천도은 현재까지 이어지는 ㅇ베이징의 기본틀을 만든 일대 사건이엇다. -231-
-위안밍위안(圓明園) 에 가보았는가?
위안밍위안은 '이허위안' 과 함께 역대 왕조의 정원 가운데 하나로, 잘 알려진 명소 가운데 하나다. (...) 위안밍위안,이곳에서는 제국주의의 잔혹함과 오래된 왕조의 퇴락한 모습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242~ 246-
-시타이허우(西太后) 와 이허위안(이和園) :
'시타이허우'는 청말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황후이다.
'함풍제'의 의비이며 동치제(1856~74) 의 생모로, 나이 어린 황제 '동치제' 를 섭정하였고,동치제가 죽자 여동 생의 아들인 조카 '자이톈' 을 추천하여 '광서제(1871~ 1908) ' 로 즉위시켰다. 시타이허우는 해군창설 예산을 전용하여 '칭이위안' 재건비로 충당하였다.
역사가들은 이 때문에 중국 해군이 청일전쟁 때 일본군에 처참하게 패배했다고 말한다.
역사에는 가정법이 없다고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역사를 돌이켜 보면서 항상 깊은 아쉬움 속에서 만약 그때 이랬더라면 하는 탄식을 냉뱉곤 한다. 당시에 예산을 제대로 집행해 근대적인 해군을 창설했더라면 중국이 청일전쟁에서 지지 않을 수 있었을까? 하지만 사람들은 회의적이다.
결국 역사의 흐름은 도도한 강물과 같아 어느 누구의 힘이나 어느 한 계기에 의해 뒤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이허위안'은 1900년 의화단 사건 때 8개국 연합군에 의해 다시 파괴되지만,1902년 피난에서 돌아온 시타이허우에 의해 재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시타이허우는 이허위안을 여름별장으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47~ 250-
-[홍루몽]은 청대의 소설로 현대 중국인들에게 [홍루몽]은 만리장성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홍루몽] 의 저자는 '차오쉐친(1715~63)으로 알려져 있다. 차오쉐친은 명문가의 귀공자로 태어나 고금에 정통한 학식과 교양을 쌓고 남부럽지 않은 호사를 누렸지만,말녕에는 가문이 몰락해 빈곤과 천대 속에 살았다.
"나무에 상채기가 나면 옹이가 되듯이,사람은 곤경에 처하면 내면에 잠재해 있는 천재성이 발휘되는 것인가? "
집안이 망한 이후 차오쉐친은 염량세태의 냉혹함과 비정함을 동시에 맛보게 되었으니,이를 통해 세상사의 허망함을 느끼게 된 것은 망외의 소득이라고 해야 할지. -251~ 252-
- 베지징 서쪽 교외에 차오쉐친이 살았던 '황예춘'에 '차오쉐친 기념관'이 세워져 잇다. 차오세친은 세계문학사에 빛나는 명작을 쓰기 위해 말 그대로 자신의 뼈를 깎아 붓을 삼고,피를 찍어 글을 쓰는 심정으로 [홍루몽]을 창작했을 것이다. (....) 차오쉐친 개인의 삶과 [홍루몽] 쟈 씨 가문의 영욕은 어느 한 개인이나 집안의 일에 그친지 않고 어찌 보면 중국의 역사와 닮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한때 그럴 수 없을 정도로 영화를 누릴다 몰락의 길을 걸어간 것이 중국의 굴곡진 근현대사의 모습과 많아 닮아 있기 때문이다. -258~ 259-
- 다스라(大柵欄)에 가다.
쳰먼의 정식 이름은 '정양먼' 이지만,우리가 숭례문을 남대문이라 부르듯 베이징 사람들은 '정양먼'을 '쳰먼'이라 한다.
쳬먼을 중심으로 남쪽으로 똑바로 난 길이 '쳰먼다졔'다.그리고 '쳰먼'을 등지고 '쳰먼다졔' 오른쪽으로 ' 다스라 ' 가 있다.
지하철 쳰먼역에서 내려 유유히 큰길을 가로질러 쳰먼다졔 오른쪽 주바오 시장의 좁은 골목으로 들어서면 제일 먼저 비단상점 '쳬상이' 를 마주하게 딘다. 이 건물을 지나 별별 잡동사니를 잔뜨 벌여놓은 작은 가게 골목을 여유로운 마음으로 지나치면 '다스라' 가 시작되는 조금 더 큰 골목 어귀에 들어선다.좌우에 즐비한 '라오쯔하오' 들을 지나쳐 곧장 길을 따라가면 유명한 '류리창' 까지 도달한다. 연도에 늘어선 이런저런 가게들을 구경하다 보면 그야말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루르 보내는데 그 와중에 가게 점원과 실랑이 끝에 허접한 물건이라도 몇개 사게 되면 하루의 전리품을 삼을 수 있으니,이것이 거리 구경의 덤이라고 할 수 있을지. '다스라'에 가면,진짜 베이징사람을 만날 수 잇다. -266~ 267-
-베이징의 명동,왕푸징(王府井)
명대에 이미 상업이 번성했고,중국인들은 이곳을 미국의 '맨해튼'이나 토오꾜오의 '긴자'에 견주고 있다.
'왕푸징' 에 다녀왔다는 것은 그가 현재 살고 있는 한 지점을 벗어나 베이징이라고 하는 새로운 장소에 가본 적이 있다는 것을 확증해준다. 단순히 베이징에 갔다온 적이 있다는 언명은 듣는 이에게 별다른 감흥을 주지 않느다. 하지만 '왕푸징' 이라는 소리의 울림은 중국이라는 외국의 수도인 베이징의 어느 지역이라는 의미를 넘어서,그것으로 촉발되는 수많은 이미지들을 이끌어낸다. -270-
- '판쟈위안' 골동품시장 :
유명한 '류리창' 이 문방사우 위주의 비교적 정제된 물품을 판매하는 곳으로 우리의 인사동에 비한다면,판쟈위안은 주로 생활용품을 위주로 하기때문에 황학동 정도에 해당한다고 보면 된다.
판쟈위안을 찾기 전에 명심할 것 :
첫째,시간을 넉넉히 확보하고 가야 한다.
둘째,흥정는 필수라는 사실이다.
시간을 넉넉하게 잡고 가야 하는 이유는 우선 볼거리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고,무어보다 흥정 때문이다. -275-
-1992년에 맺어진 한중수교 는 당시로서는 파천황의 경천동지할 사건이었다. 냉전시대를 거치며 공산당이라면 머리에 뿔이 달리고 입에서는 피를 뚝뚝 흘리는 괴물을 연상하도록 교육받아온 많은 사람들이 직접 가서 경험해본 중국은 우리와 별로 다를게 없이 살고 있는 인간들 세상이었다. 중국 역시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심상한 일상이 이어지는 세계였다는 사실이 오히려 충격인 정도였던 것이다. -279-
- 누군가 말했다.
"뜻없는 우연을 만드는 건 쉽지만,의미있는 우연을 만드는 건 어겹다. "
사람들은 살면서 이런저런 일을 겪고 ,많은 사람을 만난다. 하지만 그 모든 일과 사람 들에게 의미르 부여하며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지나고 보면 그때는 물랐던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돌아보면 그때 그 일이 내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될 수도 있었는데,그 사람과의 만남이 내 삶의 한 계기가 될 수도 있었는데 하는 만시지탄을 자주 격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또 누군가는 말했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나는 베이징 북역에 서 있었다.
스산한 베이징의 겨울바람을 맞으며 일부러 찾아간 북역의 한귀퉁이에서 나는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에게 나는 이방인일 뿐이다. 나는 영원히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그들의 삻을 이해할 수 잇을까?그들의 고통을 ,기쁨을 같이할 수 있을까? 짧은 상념 속에 어느 새 해가 뉘엿이 기울었다. 그리고 쓸쓸한 가운데 휘몰아온 바람은 모든 것을 쓸어가버렸다. -283~ 284-
끝. 여행기를 소설처럼 이렇게 잘 쓸 수 있을까? 잘 읽었습니다.
- <베이징에서의 에드거 스노우>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장졔스' 의 국민당군은 공산다에 대해 토벌전을 펼쳐 궤멸할 위기로 몰아붙였다. 이에 공산당은 마오쩌둥'을 새로운 지도자로 춛한 뒤,역사적인 대장정에 돌이배 해 이후 2년여간의 사투를 거쳐 산시성' 황토 고웑 지역에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하고 권토중래를 ㄱ 꾀하게 된다.
1936년 6월의 어느날 미국 캔자스 출신의 젊은 기자 에드거 스노우' 는 비밀리에 홍군의 통치지역에 잠입해 지도자들을 인터뷰하고 돌아와 생생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끄때까지 밖에선느 홍군의 실체에 대해 궤 체적인 정볼르 전혀 갖고 있지 못핶기 때문에,스노우의 [중국의 붉은 별] 은 당시로서는 마오쩌둥ㅇ르 비롼 홍군 지도자와 대장정 및 그후의 상황에 대한 가장 객관적이고 정확한 기록으로 인정받았다.
에드거 스노우가 중국에 처음 발을 디딘 것은 1928년을 여러 신문사의 특파누 원으로 활동했고 1932년말 일본의 미국대사관에서 [아리랑] 의 저자로 유명한 ' 님 웨일즈 ' (본명은 헬렌 포스터) 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1933년 봄 베이핑(北平)에 도착해 메이자후퉁(煤渣胡同매사호동)21호에 방을 얻고 베이진 생활을 시작했다. 그뒤 현재 베이징역 바로 옆에 잇는 '쿠이쟈창 후퉁' 13변지에서 2년 남짓 머물렀다. 스노우가 자신의 출세작이라 할 수 잇는 [중국의 붉은 별]을 집필한 것도 바로 이 집에서 였다. 두사람은 1949년에 성격 차이로 이혼했다. 만년에 스위스 제네바에서 살앗던 스노우 는 이후 몇차례 더 중국을 방문했으며 그때마다 ' 중국 인민의미국 친구 ' 로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스노우는 생전에 중국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 중국에 있어서 나 개인의 의미란 역사라는 커다란 물결 위에 떠서 흘러가는 하나의 낟알 이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중국은 나의 일부가 되어 다음과 같은 생생한 장면과 인격으로 다가왔다. 기근이란 백만살은 된 것 같은 말라붙은 가슴을 지닌 처녀를 의미했으며,공포란 불타는 전쟁터에 방치되어 아직 숨이 남아 있는 병사들의 살을 뜯어먹는 쥐떼를 의미했고,반역이란 짐승처럼 네발로 기어 다니며 짐을 나르는 아이를 보았을 때 느꼈던 분노를 의미해으며, '공산주의' 란 집안의 아들 셋이 공산군에 가담했다고 해서 일가족 56명이 처형당한 것에 복수하기 위해 싸우는 젊은 농부를 의미했다.
(....) 그렇다! 이들 모두에 나 역시 속할 것이다. "
1972년 2월15일 세상을 뜬 스노우는 생전에 자신의 유해를 반반씩 미국과 중국에 묻어달라는유언을 남겼는데,현재 베이징대학 교내 웨이밍후 (未名湖) 호반에 그의 무덤이 있다. (베이징대학 교내에 있는 에드거 스노우 의 묘비석에 '중국 인민의 미국 친구 ' 라고 씌어 있다-90~ 93-
- <베이징사람들의 삶의공간,후퉁>
우리는 역사적인 사건과 그것에 얽힌 인물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가끔 그들도 우리와 별반 다를 바 없이 평범한 일상을 보내며 어딘가에서 살았다는 생각을 잊을 때가 있다. 에드가 스노우가 紅區에 갔다 온 것은 약 넉달 동안이었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이 4개월이라는 시간이었지만,나머지 대부분은 베이징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보냈다. 스노우는 특히 옌징대학 근처의 집을 제일 좋아했는데,베이징의 생할공간은 뒷골목인 '후퉁' 이다. 후퉁은 베이징사람들의 일상이 지속되는 삶의공간이다.( *후퉁胡同은 뒷골목,빈민촌 슬럼가 말한다 ) -93~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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