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494/ 흑산 - 김훈 지음

최해식 2016. 12. 22. 15:18

 

-초겨울 남풍이 불어서 흑산행 돛배는 출항하지 못했다. -7-


-무안 관아의 장교가 유배 죄인 정약전을 끌고 저녁 무렵에 무안 포구에 당도 했다. 장교의 여정은 멀었다. 장교는 정약전을 흑산도까지 압송해서 흑산도 수군진 별장에게 인도하고  다시 물길로 돌아와야 했다. 흑산은 나주목 관할이라지만 물길로 구백 리가 넘었다. -8-


-고통은 벼락처럼 몸에 꽂혔고, 다시  벼락쳤다. 이 세상과 돌이킬 수 없는 작별로 돌아서는 고통이었다. 모든 말의 길과 생각의 길이 거기서 끊어졌다. 고통은 뒤집히고 또 뒤집히면서  닥쳐왔다.   육신으로 태어난 생명을 저주했지만 고통은 맹렬히도 생명을 증거하고 있었다.-10-


-무릇 배고픔을 면하자면 오직 먹어야 하는데, 하고 많은 끼니 중에서도 지금 당장 먹는 밥만이 주린 배를 채워줄 수가 있습니다. 아침에 먹은 밥이 저녁의 허기를 달래줄 수 없으며,오늘 먹는 밥이 내일의 요기가 될 수 없음은 사농공상과 금수축생이 다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똥이 되어 나간 밥이 창자를 거슬러서 되돌아올 수 없으므로 , 눈앞에 닥친 끼니의 밥과 지금 당장 목구멍을 넘어가느 밥만이 밥이고 지나간 끼니의 밥은 밥이 아니라 똥입니다. -23-


-조선 사신들은 북경에서 황제를 알현하고 신년을 하례했다. 사신들은 진귀한 토산품들을 공물로 바쳤고, 천자는 답례로 신년 달력으 내려주었다. 조선 사신은 천자의 달력을 받들고 돌아와 임금에게 올렸다. 천자 가 내려주는 시간은 그렇게 해서 조선으로 흘러왔고, 그 시간 속에서 조선은 세계의 질서에 편입될 수 있었다. -

..............청이 심양에 나라를 세우고 명이 아직 북경에  남아 있던 시절에 사행은 북경과 심양을 따로 따로 오갔다. 그때 사행의 발걸음은 느리고 고요했다.-34-


-마을과 마을 사이에 길이 있어서, 그 길을 사람잉 걸어서 오간다는 것이 마노리는 신기하고  또 편안했다.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갈 뿐 아니라, 저 마을에서 이 마을로도 가면서, 길 위에서 서로 마주치기도 하고 마주친 사람들잉 어긋나게 제  길을 가고 나면 길은 비어 있어서 누구나 또 지나갈 수 있었다. 길에는  오느 사람과 가는 사람이 있었고 주인은 없었다. -41-


-진사로 급제한 뒤 황사영은 처가 마을 마재로 가서 장인 정약현을 만났다..........정씨 문중의 長子 정약현은 장성한 남동생 약전,약종,약용과 그 권솔들을 거느리며 가부장의 위엄을 문중에 드리웠다.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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