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286 / 조선견문록 - 이영관 지음

최해식 2015. 6. 9. 01:57

-150623읽음

-나는 역사유적지를 답사하면서 전국 각지의 문화원과 시.군청의 관련 전문가들과 문화유산해설사,향토사학자들의 도움을 받았다. -5-

 

- 조선이 건국되자 고려의 왕족들은 강화도로 끌려와 '염하'에서 수장당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일부 살아남은 왕족들은 玉,全,龍씨로 개명하여  산 속과 오지 등지를 전전하며 살았다. -11-

 

- 1392.7월 이성계는 왕으로 즉위 후 고려의 국호를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1393.3월 국호를 '조선'으로 바꾸었다.  이로써 475년간 존속했던 고려는 공양왕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17-

 

- 경복궁의 백미는 근정전이다.  근정전 앞에는 세 폭으로 길이 나잇는데  이를 '三道' 라고 한다. 삼도 중 가운데  길은 임금이 다니는 어도이고, 신하들은  어도 옆으로 다녀야 했다. 품계석은 신분의 등급을 나타내는 품계가 적혀 있는 돌로서 어도를 중심으로 동쪽에는  동반이라하여 문관이 서고, 서쪽에는 서반, 무관이 서는 각각 12개가 서 있다. -19-

 

- 사림정치의 선구자인 김종직(1431~1492) 선생은 밀양사람이다  마침 영남루 인근에 밀양문화원이 있어 찾아갔다, -41-

 

- 세조는 즉위 후 첫째아들을 세자로 책봉했으나 의경세자가 2년 뒤에 원인 모를 병으로 죽자, 2子인  해양대군이 세자에  책봉되었다. 세조의 뒤를 이어 제8대 예종(1450~1469)으로 즉위했지만 1년2개월 만에 죽고 만다. 예종사망 후 그의 아들 제안대군은 4살으로 왕위계승이 어려웠다.  그러자 세조비 정희왕후 윤씨는 장자인 의경세자의 2子인 자을산군을 제9대 왕(성종)으로 정하였다. 장자 대신 2자(차자)를 왕으로 내정한것은 정치적 담합이었다,  당시 의경세자의  2자인 자을산군은 13세로  한명회(1415~1487)의 사위였다.  한명회는 수양대군(세조)을 왕이 디는데 기여한 일등공신이자, 예종 사망 후, 자신의 사위인 자을산군을  왕으로 추대함으로써 신권이 왕권을 통제할 수 잇는 선례를 남겨 신권이

정치를 주도하는 계기를 남겨 조선정치사의 전환점이 되었다. -47-

 

- 사림정치의 선구자로 불리는 김종직은 경남 밀양에서  1431년에  태어났으며 1453년에 진사가 되고, 1459년에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한 후에 교리,경상도 병마평사 등을 역임했다. 김종직이 죽은 후인 1498년 (연산군4)에 그가 생전에 작성한 '조의제문'을 사관이자 제자였던  김일손이 사초에 적어 넣은 것이 문제가 되어 무오사화가 일어낫다.  이미 사망한 김종직은 부관참시를  당하였다. 김일손과  함께 그의 제자들은 처형당했다. 

 조의제문은 항우에게 죽은 초나라 의제의 죽음을 애도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는데, 이는 세조에게 죽음을 당한  단종을  의제에 비유하여 세조의 정통성에 문제가 잇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엇다. -48-

 

- 원균(1540~1597)은 칠천량해전에서 패해,자신도 전사하고,전함도 대부분 잃엇다.  칠천량 패전에 대한 정보는 여태껏 없다.  역사란 승리자의 관점에서 기록된다고 말하지만 실패의 교훈도 후세에게 전해 줄 가치가  잇다 는 점에서 패전의 교훈을 되새겨볼 수 있도록  관련 유적지를 복원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163-

 

 

- 통영의 야경은 홍콩의 백만불 야경에 견줄 만하다. 밤이 되면 운하를 오가는 배들과 바닷물에 투영된 도시의 불빛은 방문자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173-

 

- 선조 대에는 훈구세력이 약화되었다.

그대신, 이황(1501~1570)의 동인세력과 이이(1536~1584)의 서인들이 대립하던 시대였다.   동인은 영남학파가 주축이 되었고, 서인은 기호학파가 중심이 되었다.  동인의 이황은 우주 만물의 실재를 理로 보았고 서인의 이이는 氣로 보고,  성리학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심한 차이르 보였느데 이는 정치가 통합된지 못하고 갈등을 야기시키는 단초를 제공했다.  동인과 서인의 대립은 학문적 견해 차이를 정치적으로 악용한 것이라 할 수잇다.  본래 학문이란 건전한 비판과 수용을 통해 발전하는 것인데, 사림세력 간의 대립은 학문적 견해를 같이하는 문인들이 정치적 이해집단으로 발전하면서 나타난 부작용이라 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 왕들이 왕권강화를 위해 의도적으로 붕당정치를 조장했다고 볼수 잇다.

동인의 수장인 이황은 안동에서 태어났다. 또 도산서당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185~203-

 

 

 

 

- 안동 하회마을은 풍산 류씨의 집성촌으로 낙동강물이 동쪽으로 흐르다가 S자형을 이루면서 마을을 돌아나가 河回가 되었다.  류성룡(1542~1607)이 태어난 곳이다.

안동 하회마을은 낙동강이 천연요새의 역할을 담당했기에 외침의 간섭 없이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시킬 수 있었다. -192-

 

 

- 하회마을 인근에는 류성룡 대감이 세운 병산서원이 잇다. 

병산 절벽을 마주보고 있어 경치가 참으로 아름답다.  병산서원을 둘러보고 만대루에 올랐다. 확 트인 만대루에서 서원 앞쪽으로 펼쳐진 아늑하면서도 서정적인 분위기를 체험하고 나니 병산서원이 유명해진 이유를 알 것 같앗다. -195-

 

- 오죽헌, 율곡 이이가 태어난 방에는 몽룡실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신사림당은 이이를 낳기 전에 흑룡이 바다에서 집으로 날아들어오는 꿈을 꾸었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이이가 태어난 방을 몽룡실이라 부르고 잇다. 역사의 현장에서 타임머신을 타보는 것은 역사여행의 묘미라 할 수 있다.  

원래 오죽헌은 형조참판 최응현(1428~1507)의 소유였다.

최응현의 2女를 '이사온'에게 시집보내면서 사위에게 물려 주엇다.

이사온의 외동女을  한양의 '신명화'에게 시집보냈다. 그녀(외동女 이씨)가 친정에 내려와 신사임당(신명화의 女)을 오죽헌에서 낳았다.

신사임당도 한양의 이원수에게 시집갔다.

신사임당은 강릉의 친정어머니( 외동女 이씨 )를 모시기 위하여 그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고, 오죽헌에서 이이를 낳았다.  이 집은  신사임당

의 어머니 이씨가 넷째딸(권씨 집안에 시집 갔다= 權室  )의 아들인 '권처균'에게 물려주었다.  권처균이 지신의 호를 오죽헌이라 지으면서  오죽헌으로 불리고 잇다.(권처균의 고모=신사임당 )(권처균과 이이는 고종,이종사촌之間이다 )  역사의 현장에서 타임머신을 타보는 것은 역사여행의 묘미라 할 수 있다.  -195~199-

 

- 율곡 선생의 생활환경을 보다 생생하게 이해하려면 오죽헌을 돌아가 작은 문을 통과하여, 안채와 바깥채 등도 살펴보아야만 한다.

특히 바깥채가 매력적인데, 이곳은 신사임당의 외조부 이사온, 이이의 외조부인 신명화, 그리고 이이의 아버지 이원수 등이 거처했던 공간이다

바깥채의 기둥에는 추사 김정희가 쓴 주련을 볼 수 있다. 주련이란 고택의  기둥이나 바람벽 따위에 장식으로 써 붙이는 글씨를 말한다.

이곳의 주련 문구에는  "밖에 많은 일이 있는데도 한가로움을 얻어낸다. 소년시절에 만족하는 것을 알앗다. 꽃씨를 심으려고  봄에 눈을 쓸었다.선비가 공부하는 곳에는 악한 세상이 없다" 등의 문구 내용이 잇다. 오죽헌 옆 율곡기념관에 율곡이 쓴 [격몽요결]의 아래 문구를 되새겨보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학문을 하지 않으면

마음이 막히고 소견이 어두워져

올바른 사람이 될 수 없다.

학문에 임하는 사람은

누구나 뜻을 세워

자기도 성인이 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서두르지 말고 쉬지도 말며

준히 정진해야 할 것이다." -200-

 

 

- 정철 :

1536년에 서울 장의동에서 태어났고, 큰누이가 인종의 귀인이다.

작은누이가 월산대군의 손자인 계림군의 부인이다.

그래서 궁중에 자주 출입하면서 명종과 친분을 쌓았다.

그러나 10세 때 을사사화가 일어나 그의 아버지가 유배를 가게되자,집안이 몰락하였다. 그후 아버지가 유배에서 풀려난 후 조부의 고향인 담양으로 이주하자 정철도 아버지를 따라 담양으로 낙향하였다.

그는 '기대승'과 같은 여러 스승들을  만나 공부한 끝에  1562년에 별시문과에서 장원급제하여  당시 임금 명종과 재회한  후 정철의 집안은 명문가문으로 발돋움하엿다. -214-

 

- 화양서원은 우암 송시열이 은거했던 곳에 새워졌으며,만동묘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군을 보내준 명나라 황제인 신종과 의종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227-

 

- 추사 김정희는 당대의 석학인 박제가(1750~1805)로부터 글을 배우기 시자가여 청나라의 학문에 간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는 24세 때 동지부사로 임명된 부친 김노경(1766~1840)과 함께 자제군관으로 중국의 연경을 방문하여 청나라 학자들고 교류하였다,

자제군관이란 오국에 파견되는 사신의 아들이나 동생이 동행한 제도로서 현지문물을 자유롭게 접할 수 잇는 기회가 주어진다.  추사가 중국에서 관심을 가진 분야는 考證學 이다. 당시 청나라에서는 시대 변화를 주도하기 위해 고증학을 발전시키고 잇엇다. -

영.정조 대에 조선의 실학자들이 청나라의 고증학을 연구하면서  실학을 보다 논리적을 발전시키려는경향이 보였는데, 이를 북학이라 한다.  조선의  북학은 홍대용,박지원,박제가로 이어지면서 성숙되엇다. 그리고  김정희는 북학을 조선의 실정에 맞게 집대성하여 정립시켰다. -235-

 

-추사 김정희는 1840.9.2일에 제주도의 대정현에 위리안치 되었다.

위리안치란 가장 혹독한 귀양살이로 유배지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시울타리를 치고 그 속에 가두는  형벌이다. 김정희는 유배지 대정현에서 서예와 그림 연구에 몰두하면서 마침내 추사체를 완성하는 쾌거를 이룩하엿다.   그의 글씨는 유배 이전과 이후로 확연히 구분된다. 유배이전의 글씨는 기존의 글자체를 모방한 것이라 할 수 있고, 유배생활 중에 그의 글씨는 군살이 빠지고 모방을 뛰어넘어 추사만이 표현할 수 잇ㅆ는 창조적인 글씨로 발전했다.  추사에게 제주도의 유배생활은 그의 예술혼을 승화시키는 인고의 세월이었던 것이다. -237~238-

 

-  행궁이란 도성 안의 궁궐과 달리 임금이 외부로 행차할 때 머무는 별궁이다. 남한산성에 위치한 행궁은 상궐과 하궐로 구분되고, 좌전(행궁의 종묘)과 우실(행궁의 사직단)을 배치했다. -250-

 

- 현륭원(후에 융릉) :

수원 용복면 화산에 있다. 정조는 1790.9월에 현륭원 동쪽 1km 떨어진 곳에 용주사를 세워 관리토록 했다.

사도세자가 잠들어 있는 현륭원을 찾아나섰다.

소나무와 참나무로 우거진 숲 속은 속세와 단절된 공간처럼 마음의 여유와 편안함을 안겨주엇다. 융릉은 추존 왕릉임에도 불구하고 왕의 품격에 어울리는 왕릉의 품격을 갖추엇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두엇다.

영조와 후궁 영빈 이씨 사이에서 태어난 사도세자는 11살 때 노론인 홍봉한의  딸과 가래를 올렸다.  15세부터 군사와 인사권을 제외하고 영조를 대신해 대리청정도 하였으나 1755년에 소론이 일으킨 '나주 벽서 사건' 과 함께 정치적 위기를 맞았다. -255-

 

- 화성과 화성 행궁을 보다 생동감 있게 체험하려면 해마다 10월 초에 개최되는  '화성문화제'에 참여하는 것도 좋다.-266- 

 

- 흥선군 이하응이 순원왕후 김씨의 동생인 좌의정 '김좌근'의 집을 방문했을 때 모욕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김좌근은 흥선군으로 하여금 그의 첩에게 절 하라고 하였던 것이다.  흥선군은  거절하지 않고 첩에게 절 하면서 세도정치의 위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흥선군은 인격적인 모독까지 참아내면서 후일을 기약했다. -272-

 

- 인정전 ;

창덕궁의 중심건물로 조선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순간을 지켜본 곳이다.   순종은 1907년 고종으로부터 왕권을 이어받았다.  그는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1910.8.22일 인정전에서 나라를 빼앗겼다. 마침내 500여 년 동안 통치했던 조선왕조는 막을 내렸다. -286-

 

- 창덕궁 후원에 있는 '부용정'은 창덕궁 후원의 아름다움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잇다.  -292-

부용은 연꽃을 뜻한다.

(퍼온글) :  http://bbs2.agora.media.daum.net/gaia/do/kin/read?bbsId=K150&articleId=816516

 

출전 ; 디카동   http://www.dicadong.net/dslr/?m=gallery&bid=free&uid=50832

-..........-295- 끝.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