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284 / 왕의 하루 - 이한우 지음

최해식 2015. 6. 9. 01:56

-150618읽음

 

- '해동육룡' 이란 이성계으 고조부부터 아버지까지 4대를  임금으로 추존하면서 태조와 태종을 함께 일컫는 말이다. 제2대 조선 국왕인 정종은 계통에서 제외했다.  이성계의 고조부 목조, 증조부 익조, 조부 도조, 아버지 환조, 그리고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을  '해동육롱'이다.-38-

 

- 고려 우왕집권기에 왜구의 침입이 극에 달했다. 1377.5월 "바다를 덮을 만큼"  많은 수의 왜구들이 조선을 침략했다.  그중 대규모 부대가 지리산 쪽으로 들어왔는데 이때 이성계는 아들 이방원을  데리고 출전해 그들을 섬멸시켰다.  이방원의 나이 열한 살 때의 일이었다.

이 기록을 담고 잇는 [고려사]가 이방원의 아들인 세종 때에 저술되었음을 감안한다면 이방원의 참전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도 잇다. -50-

 

- 1392.7.17일, 마침내 고려는 34대 475년 만에 멸망하고 태조 이성계가 즉위하면서 향후 500년을 이어갈 새로운 조선왕조가 시작된다-59-

 

- 강희맹(1424~1483)은 조선 초 화가이자 서예가로 유명한 강희안의 동생이다  이들의 아버지 강석덕이 세종의 동서였으니  강희맹 형제에게 세종은  이모부였던 셈이다.

강석덕은 아들의  이름을 지어주면서  강희안으 경우에는 공자의 수제자  '안회' 를  본받으라는 뜻으로 지었고, 강희맹의 경우에는 '맹자' 를 본받으라. 해서 지었다고 한다. -65-

 

-1569.12월경 선조가 현령 박응순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였다.그녀가 의인왕후 박씨다. 의인왕후는 '살아 잇는 관음보살'이라 불릴만큼 후덕했으나,안타깝게도 아이를 낳지 못하는 석녀였다. 의인왕후의 할아버지인 박소 (1493~1534)는 1519년(중종14) 문과에 장원급제했다. 박소에게는 아들5명과 손자17명이 있었는데 모두 학식과 덕행이 뛰어나 

'5응 17동' 이라는 말이 퍼졌다,  박소의 아들 대에서 반남 박씨는 조선으 주요가문으로 급속도로 성장한다. 맏아들 박응천은 세자의 스승이 되었고, 둘째 박응순은 선조으 장인이 되엇으며 넷째 박응복은 문과를 거쳐 참판에 올랐고, 박응복으 아들 박동량은 형조판서에 올랐고 박동량의 후손중에서 그 유명한 연암 박지원이 나왔다. 이렇게 박소는 반남 박씨의 중흥을 이루엇다.

의인왕후는 적장자를 낳고 싶어 하는 선조의 갈증을 풀어주지 못했던것이다. 그래서 선조는 후궁을 즐겨 찾았고  임진왜란 당시 선조는 의주로 몽진하면서 인빈 김씨를 데리고 갓고 정비인 의인왕후는  따로 강계로 피난을 갓다. 1593년 한양 수복후에도 의인왕후는 줄곧 황해도 해주에 머물렀다, -87~89-

 

- 1608.2.1. 오후2시경 선조는 쓰러져 더이상 눈을 뜨지 못했다.

그다음 날, 1608.2.2일 정릉동 행궁에서 광해군이 보위에 올랐다.

강해군이 왕위에 오르고 처음으로 한 국사는 1608.2.8일 묘호를 선종에서 선조로 바꾼 것이었다. 제왕이 공을 세운 경우에는 祖라고 일컫고 ,

덕이 잇는 경우에는 宗이라고 일컫는다.고 한다. -117-

 

 

- 광해군의 집권은 결과적으로 선조의 꿈인 '내성외왕' 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말았다.

'內聖外王'에 다가가려 했던 선조의 꿈은 아들 광해군에의해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118-

 

 

- 1636.12.14일 인조가 도성을 버리고 남한산성으로 피할 때부터 이조판서 최명길을 적진에 보내 강화 조건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최명길은 서울 홍제동 일대까지 내려왔던 청나라 장수 '마부대' 를 만났다.

최명길의 아버지는 '최기남' 이시다. -123~126-

 

 

- 청나라 장수 '용골대'는 출성 절차에 대해 왕이 직접 나와항복하되 제1 등 정목은 '함벽여츤'이고, 제2등 접목은 신하의 예를 갖춰 '삼배구고두례' 를 행하는 것으로서 세 번 큰절을 한 다음 아홉 번 머리를 숙여 충성을 맹세하는 것이엇다.  삼전도에서 인조가 청 태종을 향해 행했던 예가 바로 그것이다. -129-

 

- 1636.12.14일 청군은 압록강을 넘어 파죽지세로 한양 서북부까지 쳐내려왔다.

병지호란이 나던 그해 겨울에는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다.

1637.1.30일 새벽 출성을 결심한 인조는 청나라옷,남색의 융복(오랑캐 옷)을 갈아입고 침소를 나섰다.  그를 맞은 것은 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과 허리까지 올라오는 눈이었다. 그리고 웅성거리는 가운데 여기저기서 터져나오는 백성들의 비탄이 귓가를 울렸을 것임은 현장에 있지  않아도 상상해 볼 수 잇다.

서문을 나선 인조는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말을 탈 수도 없어 엉금엄금 눈 덮인 산길으 손으로 땅을 짚으며 내려와야 하는 길이엇다. 인조는  빙판에 미끄러져 나뒹굴기까지 했다.  청나라를 얕잡아보다가 대패한 조선 왕의 적나라한 처지를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어렵사리 산을 내려온 인조 일행은 숨 돌릴겨를도 없이 삼전도를 행해 길을 재촉했다.  삼전도는 한강진(한강나루),양화도 (노들나루)와 더불어 조선조  한강의 3대 나루 중 하나였다.   인조 일행은  마천리,오금리,가락리, 송파리를 거쳐 삼전도로 행했다. -134-

 

 

- 수항단受降壇, 말 그대로 청 태종이   인조의 항복을 받는 예를 거행하기 위해 설치해놓은 단상이 인조 일행의 시야에 들어왔다.  당시 현장을 직접 보았던 나만갑은 [병자록] 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잇다.

"군진이 정연하고 엄숙하며 병기가 햇빛에  번쩍였다." -135-

 

 

-조선 16대 왕 인조 는 인렬왕후 한씨 사이에 아들 다섯을 두엇다.  그 군왕의 장남이  소현세자, 차남 이 봉림대군이다.

소현세자, 보기에 따라서는  조선의 개화,서구화,근대화를 300년 앞당길 수 있는  인물이었다. -136-

 

- 인조이후  왕실에는 아들이 귀해졌다. (인조는  아들 다섯을 두엇다 )

효종(봉림대군)은 1남6녀를 두엇다.

현종도 1남3녀를 두었다.

숙종은 희빈 장씨에게서 아들 둘을 낳았지만 한 명은 어려서 죽었다.

숙빈 최씨(영조의 친모)도 아들 셋을 낳았지만 첫째, 셋째가 죽었다.

명빈 박씨도 연령군을 낳았지만 일찍 죽었다.

경종에서 적통은 끊어졌다.

이런 상황을 보면서 숙종은 무슨 생각을 햇을까? 혹시 인조가 소현세자와 강빈, 그리고 그 집안을 몰살시켰기 때문에 천벌을 받고 잇다고 생각하지 는 않았을까?

 

영조도 왕후 2인에게서 자손이 없엇고 후궁 이씨에게서 난 효장세자 일찍죽고 또 다른 후궁 이씨에서서 난 아들이 사도세자인데 그도 죽었고, 사도세자의 장남이 세손으로 책봉되지만 일찍 죽고 둘째 아들이 다시 세손으로 책봉되는데  그가 22대 임금 정조다.

정조도 효의왕후 김씨 사이에 자손은 없엇고,결국 수빈 박씨와 사이에서 태어난 순조가 왕위를 이었다.

순조는 순원왕후 김씨 사이에 효명세자는  의문사했고 다른 아들은 어려서 죽었다. 효명세자의 아들 헌종이 있어 왕위를 계승할 수 잇엇다.

헌종 은 정비 2명과의 사이에 자식이 없없고, 2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왕실은 남자의 씨가 말라 사실상 대통이 끊어졌다.

겨우겨우 찾은 가까운 혈육이 사도세자와 숙빈 임씨 사이에서 난 은언군과 은신군이다.  '강화도령' 으로 유명한 철종이 은언군의 손자다.

철종이 낳은 아들은 하나같이 모두 일찍 죽엇다. 철종이 죽자 왕실 사람들은 다시 족보를 뒤져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된 남연군의 손자 익성군을 선택했다. 그가 고종이다.   숙종의 우려는 역설적으로 마지막 임금인 순종 때에 가서야 풀린다.

고종은 명성왕후사이에 4명의 아들을 두어3명은 일찍 죽고, 적자 순종이 왕위에 올랐다. 

순종도 2명의 황후를 맞아들였지만 이들 사이에도 자식이 없엇다.  숙종의 우려가 조선 왕실 후기사에서 그대로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140~142-

 

 

-숙종은 1718.4.4일 소현세자와 강빈의 위패와 시호를 회복시켰다.

숙동은 그이유를 구체적으로설명햇다. 강빈은 억울하게 죽엇고 그 아버지 '강석기'도 대단히 현명한 재상이엇다는 것이다. 또 [주역] 의 곤괘에 나오는  말 즉 "선을 쌓는 집안은 반드시 남는 경사가 있고, 불선을 쌓는 집안은 반드시 남는 재앙이 있다"는 대목을 언급하면서, "소현세자의 후손인 임창군의 자손잉 번창하는 것이 이 말이 옳다는 것을 입증해준는 것"  이라고 했다.

숙종의 말은 현종과 자신 대로 이어지면서 아들이 많이 나지 않음을 염두에 둔 발언이었는지도 모른다. 특히 숙종은 아들 문제로 상상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143-

 

 

- 1398.8.26일 ,1차 왕자의 난으로 불리게 되는, 밤 10시경 경복궁 근처 송현에 있는 남은의 첩 집에서 , 남은과 봉화백 정도전,그리고 세자의

장인 심효생 등이 모여 술자리를 갖고 있었다.  세 사람은 태조으 막내아들 이방석을 세자로 추대한 후 7년 동안 막강한 권세를 누렸다.   군사들에게 잡혀온 정도전은 이방원에게 애원했다.  

"공이 예전에 이미 나를 살렸으니 이번에도 한 번만 살려주소서!"

"네가 조선의 봉화백奉化伯이 됐는데도 부족하더냐?"

다음 순간, 정도전의 목이 날아갔다.  정도전에게는 4명의 아들이 있었다. 정진,정유,정영,정담, 형제등이다. -176~178-

 

 

- 명과 조선의  외교 간계는 '일년삼사' 즉 신년에는 하정사, 황제 생일을 축하하는 성절사, 황태자 생일을 축하하는 천추사를 보낸는 것을 바탕으로 했다. 그 밖에도  사은사,주청사, 계품사 등 다양한 비정기 사행이 있었다.

명나라는 조선 사신의 입국을 요동성 밖 백탑에서 거부하였다.  입국을 거부한  배경에는 두 가지가 잇었다. 하나는 조선 해적이 중국 연안을 침입한 사건이었고 다른 하나는 요동 정벌론이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으로 명나라는 북벌에 필요한 말 1만 필을 보낼 것, 그리고 이성계의 장남이나 차남이 해적 사건의 범인을 직접 압송해 금릉으로 들어올 것 등을 요구햇다.  이에 이성계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섯째 아들 정안공 이방원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학식을 갖춘 아들이 없엇다. 이성계는 이방원을 불러 명나라 사신을 갔다 오라고 하자,  이방원은 크고 호방한  스케일을 보였다.

"종묘와 사직의 크나큰 일을 휘해서 어찌 감히 사양하겠습니까?"

실록은 이때 이성계가 눈물을 글썽거렸다고 전하고 잇다.

이렇게 해서 이방원과 남재 그리고 중추원지사 조반으로 구성된 사신단이 파견되어 일년삼사의 외교 관계도 회복하고,조선에 대한 주원장의 으심을 말끔히 풀어주고, 외교적 성공을 이룩하였다. -185~187-

 

 

- 계유정난의 성공은 한명회라는 무명의 서생을 하루아침에 당대 최고의 권력자로 바꿔놓았다. 한명회로 인해 그동안 왕권 우위를 견지해오던 조선의 통치 구도를 신권 우위,즉 왕권 약화로 이행하는 계기가 생겼다. 특히 성종이 즉위할 무렵에는 조정을 들락거리는 실세 대신의 90% 이상이 한명회와 연결된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명회는 역사의 격변을 거치며 형성된,유례를 찾기 힘든 거대한 산맥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206-

 

 

- 계유정난의 성공이 곧바로 집권은 아니엇다. 왕위는 여전히 단종이 지키고 잇엇고 ,수양대군은 정난 이후 영의정, 이조와 병조판서를 겸하는 겸판이병조,주외병마 도통사 등 정권과 병권을 손아귀에 지었지만 왕권은 다른 성격의 것이었다.

수양의 입장에서는 단종의 자발적인 선위가 가장 이상적이엇다. -207-

 

 

- 1455.윤6.11일, 수양은 금성대군과 혜빈 양씨를  역적으로 몰고 허수아비 국왕으로  3년 차인 단종은 그날로 왕위를 작은아버지 수양에게 넘겼다. 말 그대로 찬탈이엇다.  단종은 상왕으로 '추대' 됐다. -209-

 

 

- 경저인京邸人이란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가?

조선시대 중앙과 지방 관청의 연락 사무를 위해 지방관이 서울에 파견한 아전 또는 향리를 경저인 혹은 경저리, 저인 등으로 부렀다.  경저인의 임무는 공물상납,해당 읍의 부세 상납,공무로 상경하는 관리의 신변 보호 등 서울과 지방 사이의 연락을 담당하면서 지방 관청과  함께 지방 관리들을 견제하기도 했다. 또 중앙과 지방 간의 문서 전달, 기일 내에 도착하지 못한 상납물의  대납 책임도 졌다. -224-

 

- 종묘 배향 이란 임금이 죽게 되면 총애했던 신하나 통치에 공이 큰 신하들을 선정해 종묘에  위패를 모시고  함께 제사를 지내는 것. -267-

 

-25대 철종과 철인왕후 김씨 사이에는  왕자 하나가 잇었지만 어려서 죽었다.

숙의 범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영혜옹주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났다.

영혜옹주의 남편이 박영효 이다. -311-

 

 

-...........-385-끝.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