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281 / 20세기 우리역사 -강만길 지음

최해식 2015. 6. 9. 01:54

- [150610 읽음.]

 

- 어느 시인이

"모든 강물은

바다로 흐른다

백두산위에  떨어진 빗방울이

바다로 흘러가는 그 이치를 아느냐"  고 한 시구가 기억난다. 

좌측으로 흐를 때도 잇고 우측으로 흐를 때도 있지만 결국 모든 강물은 바다로 흘러가게  마련이지요.인류의 역사도 장구한 세월을 통해 결국은 민주주의 바다로 나아가게 마련입니다. -7-

 

- 영국은 영일동맹에서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인정했고,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로우즈벨트( Theodore Roosevelt'는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찬성했다. -24-

 

 

-'토막민'이란 토막에 거주하는 백성으로 농촌에서  쫓겨나 전국의 각 도시 주변에 빈민촌을 이룰어 살앗던 백성들을 말한다. (토막은 지면을 파내려가서 토벽으로 하고 간단한 지붕을 덮은 원시적 주택을 말한다.)

 

1928년의 조사에 의하면 서울 시내에 사는 1143명의 토막민중 31.6%가 날품팔이를 했고, 8%가 지게꾼, 그 나머지는 상점고용인,목공,인력거꾼 ,석공,회사직공등, 그리고 44.6%가 무직이었다.

일제는 1920년대는 이들 토막민들을 날품팔이 혹은   토목공사장 인부로 사용하다가, 1930년대에 들어서 '만주사변' 을 일으키고 중일전쟁을  도발하고서야 이들 조선사람들을 전쟁노동력으로  쓰게 되엇다.

태평양 전쟁을 도발한 후에는 이들뿐만 아니라 농촌에 남아 있는 노동력까지 보국대.징용 등으로 강제 동원하여 광산이나 군수공장의 노동력으로 쓴 것입니다. -91~92-

 

 

 

- 1920년대까지도 각급 학교에서 일본어를 국어라 하여 주로 가르쳤지만, 우리말도 조선어라 하여 약간은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중일전쟁 도발 후 그것마저 완전히 없애버렷고 (1938.4) , 일본어만 쓰도록 강요했다. -137-

 

 

-역사를 가정해서는 안되지만, 만약 히로시마에 원자탄이 투하된   후 소련이 참전하기 전에 일본이  항복했다면, 한반도 전지역의 일본군은 미군에게 항복하게 되엇을 것이다.

반대로  일본의 항복이 더 늦엇다면  소련군은 한반도 전체와 홋까이도오 까지 점령했을 가능성이  크다. -204-

 

- 미국이 한반도의 남쪽만이라도 그 영향권 안에 두어야 했던 중요한 이유는 , 대륙에서 소련이 강대국으로 등장한데다가 중국의 사회주의혁명마저 성공한 상황에서 , 한반도 의 남반부가 일본의  안전을 지키는 전초기지 내지 보호벽의 역할을 하는 데 있었다. -290-

 

- 4.19는 이승만정권을 무너뜨린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이 정권을 쥐지지는 못했고,따라서 정권 교체가 있엇을 뿐 지배계급의 교체는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정권은 교체되었으나 지배계급까지는 교체되지 않은 정치적 변혁이며, 사회혁명을 수반한 역사적 의미의 혁명은 아니았다.

따라서 4.19는 완전한 혁명이라기보다 미완의 혁명이다. 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역사책에서는 혁명이 아닌  '혁명' 으로 표기할 수밖에 없다. 고 하는것입니다.-310-

 

- 국방경비대로 출발한 한국군의 지휘부는 대부분 일본제국주의 군대의 정규 육군사관학교 출신,학도병출신,일본 제국주의 군대의 일부나 다름없었던 괴뢰만주국군 장교 출신 등으로 이루어졌다. -322-

 

-이승만이 미국의 한반도정책 노선에서 일부 벗어나게 되엇을 때, 또  휴전을 반대하고 그 협상을 방해했을 때도  박정희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군부 에서는 쿠데타를 계획했다.  그러다가 4.19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함으로써 일단 보류되엇다가, 장면정권이 성립한 지 불과 8개월 만에 결국 박정희를 중심으로하는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 

1960.3.1일 실제 쿠데타가 잇기 45일 전에 한국군에 쿠데타가 잇음을 미국정부는 보고받고도 그냥 잇엇다.  민주적으로 성립된 장면정권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린 5.16군사쿠데타는 바로 미국의 묵인과 협조가 잇엇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잇엇던 것이다. -323~324-

 

- 뱍정희는 제국주의 일본이 조선사람의 '황민화' 를 위한 기초교육을  담당할 교사를 양성하기 위해 만든 사범하교르 나온 후, 괴뢰만주국 군관학교를 거쳐, 성적이 우수하고 충성심 높은 자만이 갈 수 있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괴뢰만주군 장교  출신이었다.  해방 후에는 한국군 장교가 되어 군내 남로당 군사조직의 상당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여순군란 후의 '숙군' 과정에서 처형될 뻔했으나, 군내 좌익조직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살아남아 군에 복귀했다.  이후 몇번의 군사쿠데타 계획에 관련되엇다가 장면정권 아래서  '성공' 한 것입니다. -325-

 

-박정희는 야당의  윤보선을 15만표 차로 누르고  제5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1963.12.17)

미국은 박정희 쿠데타정권의 취약한 정통성을 이용해서 압박하여, 월남전 파견협정을 맺엇습니다. (1964.10.31)

또 박정희 정권은 미국의 강력한 요구로 한일협정을 졸속으로 감행했다. 35년간의 민족적 희생이 확인되지도 ,정당하게 보상되지도 못한  졸속 협정을 체결하고 만 것입니다. 북한과는 조약이 아직 맺어지지 않고 잇어,장차 조.일 조약이 체결될 경우, 선례가 될 가능성을 남기게 되었다.

한일회담 반대운동으 위기를 넘기면서 제6대 대통령선거(1967.5.3)에 출마한 박정희는 야당의 윤보선 후보를 큰 차이로 누르고 재선되었다.

야당은 김대중을 대통령후보로 선출하여 대통령선거를 치렸으나 예상보다 높은 43.6%의 득표를 하였고, 박정희는 고전을 치른 끝에 제7대 대통령에 당선되엇다. (1971.4.27)

1972.10.17일  '10월유신'을  단행하여 유신헌법을 만들고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간접선거에 의해 단독 출마한  박정희가 제 8대 대통령에 당선되엇습니다. (1972.12.23)

'유신헌법' 에 의해 임기 6년을 끝낸 박정희는  다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9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1978.12.21) 종신집권체제를  굳혀갔으나, 경제개발을  내세운 독재정치는 이미 한계점네 다다라 있었다.

마침내 김재규가 박정희를 살해한 '10.26사건' 이 일어나, 18년간 군사독재정권은 무너졌다. (1979.10.26)

어떻든 김재규에 의한 박정희 살해사건의 진실은 올바른 역사 서술을  위해서도 좀더 밝혀져야 할 것이다. -326~333-

 

 

 

-민족분단 후 남북 정부가 합의 발표한 최초의 공동성명인 7.4 남북공동성명은 비록 쌍방 집권자들 간의 합의이긴 하지만, 통일문제의 원칙에 대한  최초의 합의라는 점에서, 민족통일운동사상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박정희. 김일성, 이후락.김영주 는 모두 죽고 현재는 없다. 하지만 7.4남북 공동성명발표의 주역들은 가고없지만, 그 발표된 사실은  아직도 우리들의 기억속에 생생히 남았다.  역사적 사실의 발자취는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 우리들의 기억에 생생히 남아 있음은  '역사적 의미' 의 중요성을  다시 생각나게 한다. "그때 그사람은 가고 없어도, 역사는 생생히 남아 있다" 라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고 살아가자. ) -340-

 

- 박정희정권 때부터 시작된 외자경제체제는 이후 한국을 만성 무역적자국이자,  외채과잉국가로 만들엇다.  1980년대 무역흑자로 돌아섰으나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다시 적자국으로 전락햇다.

이후에도 외채가 급증하더니 결국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고 지불불능국을 면했고, 따라서 '경제식민지' 로 전락했다.  이 과정에서 사상 최대의 실업자를 양산했고, 국민이 겪은 고통은 형언할 수 없었다. -350-

 

-박정희정권의 외자경제체제는 외채도입과 수출신장을 바탕으로 공업부문에서 큰 발전을 이뤘다. 그 결과 한국경제가 IMF관리체제로 감으로써 국민 일반에게 엄청난 고통을 거져다준 것 또한 사실이다. -353-

 

-박정희 암살 이후  20년이 지난 1990년대 후반기의 한국사회에서는 '박정희찬양론'이 일어나는 기현상이 벌어졌습니다. 한데 1997년 말 한국경제는 이른바 'IMF'관리체제' 로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IMF관리체제' 로 된 것은 짧게 보면 1990년대 김영삼정권의 경제적 실책이 원인이겠지만, 좀더 길게 보면 이승만정권과 박정희정권 이래 계속되어온 재벌중심 경제체제의 구조적 모순에서 근본적인 원인을 찾을 수 잇을 것입니다.

박정희정권의 경제제개발 과정이 가진 문제점들잉  쌓이고 쌓였다가 20여년이 지난 1990년 후반기에 와서  한꺼번에 터져나온 것이지요.박정희정권의 재벌중심 경제체제는 엄청난 외채를 끌어들임으로써 우리경제의 대외종속성르 심화시키고, 국가의 경제력 전체를 몇몇 재벌에 집중시킴으로써 경제적 민주주의에 크게 역행했습니다.  70.80년대를 통해 축적된 이같은 구조적 결함이 결국 1990년대의 이른바 'IMF관리체제' 를 낳은 결과, 이같은 구조적 결함이 조성되고 축적된 일 자체에는 별 책임이 없는,엄청난 수의 성실한 직업인들을 실업자로 만들어 노숙자가 되게 하고 자살률이 급등하게 한 것입니다. -360~361-

 

- 근대 이후의 역사는 어느 개인이나 한 집단의 의지 또는 작용에 의해 전진하는 것이 아닙니다. 박정희정권 시기를 통해 경제건설이 어느정도 이루어졌다해도, 그것이 박정희를 중심으로 하는 일부 집권세력만의 공로나 업적이 아님은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이같은 폐단은 1990년대로 오면서 그 폐단과 허점이 한꺼번에 드러나 'IMF관리체제' 를 초래함으로써 구조조정이 하는 조치들이 등장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전쟁 후 복구과정에서 발휘되기 시작한, 오랜 역사를 통해 양성된 우리의 민족적 저력이, 군벌과 재벌의 유착에 익숙해진 제국주의 일본군 출신이 아닌 다른 지도력에 의해 더 민주적 방향으로 분출되는 것이 바람직했습니다.

비록 경제성장의 속도가 다소 늦어지더라도 정치,경제,사회,문화적 민주주의 발전이 병행되는 방식으로 경제건설이 이루어지는 것이  더 바람직했던 것입니다.

박정희정권이 우리 경제를 비민주적 방향으로 오도한 결과 1990년대의 'IMF관리체제' 를 가져오게 되엇다 . 앞으로는 군사독재권력이 아닌,민주적 지도력을 바탕으로 재벌중심 경제체제를 극복하면서,정치,경제,사회,문화적인 민주주의가 고루 발전하는 21세기의 새로운 시대로 나아갈 수  잇어야 할 것입이다.-362~363-

 

 

 

-1992.12.18선거 결과 민주자유당 후보 김영삼이  평화민주당 김대중을 물리치고  김영삼이 제 14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우리 역사가 5.16군사쿠데타 이후 30여년간 계속딘 군사정권 통치에서 벗어나게 된 것은 큰 의의를 가진다 하겠습니다. 한번 성립된 군사정권체제가 제거되기까지 많은 희생을 바치고도 30년이란긴 시간이 걸린 것입니다.   역사가 한번 잘못된 길로 들어서고 나면, 그 방향을 바로잡는 데 얼마나 많은 희생을 바쳐야 하고, 또 얼마나 긴 세월이 필요한가르 잘 말해주는 것이, 우리의 1960년대부터 90년대 초엽까지의  역사라고 하겠습니다. -383-

 

- 북경 아시안게임 때(1990.10) 한국이 9백만달러의 광고사업에 참가하고 400여대의 차량을 제공한 것을 계기로 양국간에 무역대표부 설치 에 합의햇다가 결국 중국과 수교가 이루어졌다. (1992.8)-385-

 

-김영삼정권은 남북정상회담을 제의했다.(1994.6.18)

제1차 남북정상회담이 1994.7.25부터 27일까지 평양에서 열리기로 되었으나 , 회담을 불과 17일 앞둔 시점에서 북쪽 정상이 사망했다. (1994.7.8)  그후 김영삼정권의 전국 비상령 발표와 남쪽 사회에서 조문 찬반 문제로 빚어진 갈등 때문에, 남북관계는 급격히 냉각되었다. -393-

 

-1997.12월에 닥친 IMF는 서민층에혹심한 고통을 주엇다.  1999.2월중 실업률은  8.7%,실업자느 178만5000명으로 4인 가족을 평균으로 했을 때 전국민의 5분의 1, 즉 800만 명이 실업의 고통을  격은 셈이다. 서울시내 노숙자의 60%가 IMF사태' 이후 실직하여 거리로 내몰린 사람들이다.이중 43%에 이르는 기혼자의  대부분이 이혼 또는 별거한 경우로 IMF사태로 인한 가정파괴 및 가족해체가 심각했음을 알 수 잇다.-409-

 

-IMF관리체제가 가져온  후유증으로는 서민층의 빈궁화, 중산층의 몰락, 부익부 빈익빈 현상인 양극화 가 심화된 점을  들 수 잇다.

고도성장 과정에서 급속한 소득증가에 따라 중산층으로 발돋움해온 계층니 대규모 기업부도와 금융계 및 기업으 구조조정에  따른 대량실직과 감봉 등으로 급 격히 몰락했다.이후 부익부 빈익빈으 양극화문제 역시 심각한 사회문제로 나타나, IMF관리체제의 후속 영향때문이다.-410-

 

-6.15 공동선언이 6.25전쟁 후 반세기 동안 얼어붙었던 남북관계를 얼마난 녹여놓았는지 알 만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평화통일의  시발점이었다. 6.15남북공동선언을 성공시킨 대통령 김대중은  그 공로로 민족사상 처음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2000.10) -418-

 

-예를 들어,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조선을 강번해서 철도 100KM를 놓았과, 그 기간에 조선사람들 스스로가 50KM밖에 못 놓았다고 했을 때,   일본인들이 놓은 철도는 식민지 경영상의 이익을 위해  놓은 것이고, 조선사람이 놓은 철도는 조선사람의 이익을 ㅟ해 놓아진 것이다. 철도의 길이만 가지고 그 역사적 의미를 말할  수 잇을까요?  이것을 따져보아야 한다.  조선사람에게 얼마만큼의 세금을 거두엇는가, 조선과의 독점교역에서 얼마나 이익을 보았는가, 철저한  손익계산을 해봐야 할 것입나다. 역사상 손해를 보면서 식민지른 지배한 제국주의가 잇었는가를 따져봐야 할 것입니다. -425-

 

-21세기에는 한반도지역과 중국.일본과 아세안을 포함한 동아시아공동체가 성립될 가능성이 커지고 잇습니다. 그러나 동아시아공동체도 한반도지역이 통일되지 않고 분단상태로 잇어서는 성립 전망이 어둡습니다. -432- 끝.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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