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615 읽기 시작함.
- 이 책은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부터 1910년 한일합방'까지 서울에 거주했던 서양인들의 이야기 이다. -4-'
- 1897년 정동의 공사관거리 15번지에 위치한 서울그로서리 는 외국인 고객에게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 들여온 식료품과 저장품을 판매했다. 당시 서울에서는 일반적인 양서 한 권이 2불에 판매디엇고, 중국에서 수입되는 사과잼이 1파운드짜리 12개에 2불40센트 그리고 캘리포니아산 버터는 3파운드 당 1불50센트의 고가로 팔리고 잇엇다. 비싼 생활비 때문에 돈을 저축할 수 잇는 기회는 극히 드물엇다. 일부 서양인들은 정부로 부터 주택이나 하인을 별도로 제공받앗지만 비싼 생활비 때문에 돈을 저축할 수 잇는 기회는 극히 드물엇다. -32~33-
- 1885~1886년 한반도에는 엄청난 규모의 천연두와 콜레라가 창궐했다. -54-
- 1886.7월 콜레라가 전국적으로 창궐해 한국은 근대 역사상 가장 참혹한 시련에 직면하게 되엇다. -58-
- 1905.3월 루즈벨트 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은 주한 미국공사를 알렌에서 모간으로 교체했다. 두 사람 간의 친근햇던 우정은 루즈벨트의 결정과 함께 종식되었다. -83-
- 1890년대 들어서야 비로소 서울에거주하는 왹국인들은 일본산 석탄은 물론 한국산 석탄을 안정적으로 공급받아 추운 겨울 집안에 온기를 불어 넣을 수 잇었다. 그러나 곧이어 청일전쟁으로 일본 석탄의 공급이 일시 중단되고 한반도 북부 지역에서 발생한 전투로 사람들이 피신하면서 평양지역에서 일하는 한국인 광부들이 부족해져서 석탄 가격이 급등하였다. 1896.10월경 일본제 석탄은 집으로 배달한다는 조건으로 톤당 11불에 판매되었다. -94-
- 1882년 한국 정부느 서울을 비롯, 부산,제물포,원산등 항구를 서양에게 개방했다. 1884년까지 부산과 원산에는 일본인 거주지가 형성되고 제물포에는 다양한 국적의 사람이 모여들어 '국제화' 되었다. 1884년이 되어서야 외국인 숙박용 서양식 호텔이 서울에 등장했다. -110-
- 1884.12.4일 밤 한국의 젊은 개화파 청년 몇몇이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한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한국의 고위 관료들은 물론 일본인도 성난 폭도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상당수 일본인이 제물포로 탈출했고, 대부분의 외국인이 위협을 느껴 서울을 빠져나갔다. -138-
- 1902.9월 , 서울은 도시 전체에 콜레가가 창궐해 많은 한국 사람의 목숨으 앗아가더니 곧 외국인 구거지에도 퍼지기 시작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또 다른 전염병인 장티푸스가 발병하였다. -172-
- 경인철도 건설구간으로 한강철교가 1900.7.5일 완성되엇다.
미국인 교량건축 전문가인 '홈즈' 의 감독하에 한강을 횡단하는 다리는 길이가 약 631미터의 다리가 건설되었다.
1896.3.29일 모오스가 경인철도부설권을 취득한 후 한강철교 공사를 준공하기까지 총 4년여의 시간이 거렸다. 그러나 경인철도는 미국인들이 아니라 일본인들이 완성했다. 1898.12.31일 경인철도의 소유권은 일본 경영진에게 이전되엇다. 미국은 한국에서 손댄 최초의 사업에서 쓰라린 실패를 경험한 것이다. -180-
-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을 체결되자 '빅토를 콜랭 드 플랑시' 가 초대 주한대리공사로 서울에 와서 동양문화에 관심이 많았던 플랑시는 서울 거리를 다니며 한적韓籍과 회화를 수집하였다. 그가 수집한 한적가운데 가장 유명한 자료는 세계 최초으 활자본으로 알려진 [직지심체요절]이다. 프랑스로 돌아온 그는 1911년 물품을 경매할 때, 러시아 주재 프랑스 공사인 앙리 베베르가 180프랑에 구입해 소장하고 잇다가 1950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했다. 원래 [직지]는 상.하 2권으로 구성돼 잇는데 금속활자본 상권은 현재 전해지지 않고, 하권 1책만이 엄격한 통제 가운데 일반인에게 열람이 허용되고 잇다.
자랑스런 우리의 기록유산인 [직지]는 현재는 프랑스 국립도서관 동양문헌실에 보관되어있다. 우리 정부 및 민간단체는 우리의 세계적인 기록문화유산인 [직지]의 반환을 위해 노력해 오고 잇다. -187~191-
- 구한말 최초의 영어학교는 1883.8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구내에 설치된 '동문학'이다. 영국 출신 핼리팩스가 교장으로 배정되어 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당시 학생은 40여 명으로 양반 출신의 자제들이엇다. 이들의 학비는 모두 정부가 부담하엿다 정부가 모든 비용을 제공한 이유는 외국어 통역관이 필요하여 정부가 나서서 통역관을 양성할 필요가 잇엇기 때문이다.
동문학은 1886.9.23일 육영공원이 문을 열면서 폐교되엇다. -201-
- 김홍륙의 계획대로 1896.2.11일 고종은 세자와 함께 여성으로 변장하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잇엇다. 소위 아관파천이엇다. 이후 김홍륙은 '비서원승'으로 봉직하면서 고종과 러시아 공사인 베베르 사이의 통역을 맡앗다. -236-
- 알렌이 목격한 갑신정변 ;
밤잠을 이루지 못하며 뒤척이는 갓난아기의 울음소리, 어둠이 짙게 깔린 고요한 거리를 따라 눈을 저벅저벅 밟으며 급히 가는 커다란 키의 서양인을 보고 짖어대는 경계심 많은 개, 그리고 홍두깨로 식구들의 옷을 두드리는 여인네의 다듬이질 소리만이 간혹 정적을 깰 뿐 서울 시내는 고요 속에 잠겨 있엇다.
1884.12.4일 밤은 아주 날싸가 추웠다. 서울 시내의 통행금지를 알리는 종소리가 이미 울렸고 당국의 통행금지 대상에서 제외된일부 여성이나 급한 용무가 있는 관료,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발걸음을 급히 옮기는 의사, 그리고 외국인만을 남긴 채 대부분의 사람은 이미 깊은 잠에 빠져 잇었다. 이날 저녁 알렌 박사느 일본 공사관 부근에 있는 '타운젠트' 의 집에서 친구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한 후 정동 집으로 가는 길이다. -241-
- 1879년 지석영은 당시 서울에서만 6만 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간 병마로부터 가족과 친구들을 지키기 위해 서구식 종두법을 도입했다. 지석영은 부산에 있는 일본의 해군병원인 제생의원에서 종두법을 배우고, 충주에서 한국 최초로 종두를 실시했다. -254-
- 알렌 박사의 예상이 적중이라도 한 듯 얼마 지나지 않아 곧 한국 근대 역사상 최악의 콜레라가 발생했다.
1886.7.2일 콜레라는 부산 남부 지역에서 시작하여 급속히 전국으로 확산되더니 드디어 서울까지 올라왔다. 서울에 출현한 콜레라는 처음에는 늦은 속도로 퍼졌다 그러나 서울은 당시 "아주 불결한 상태에 있엇고 콜레라가 사람들을 수확하기에는 충분했다." 마침내 7.15일 콜레라는 대대적인 규모로 퍼지기 시작했고 7월 하순경 전염병이 최고조에 달했다. 배재학당을 세운 아펜젤러 목사는 7.24일 그의 일기에 "메일 오백명의 사람들이 콜레라로 죽어가고 잇다." 고 기록하고 잇다. 7.28일자 그의 일기를 보면 "사망자는 전혀 감소하지 않고 있다. 지난 10일간 3,140명이 성문 밖으로 운구 되엇다". 당시 정부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콜레라로 죽어 갓다. -259~260-
- 1897.3.22일 제물포 외곽에서 한국의 고위 관료들과 서양 외교관 그리고 사업가들이 참석해 철도의 건설을 축하하는 기념식이 열렸다. 이른바 경인철도의 건설을 위한 기념식이다. 1900년에 한강철교가 건설되면서 한강변의 도선 사업은 커다란 영향을 받앗다. 1910년에는 일본인 사업가인 우에다가 마포 선착장에 '도선교'를 건설하였다. 부근 뱃사공들의 일터가 사라지고 이들의 생계가 위태롭게 되어 폭동이 일어낫고 많은 사람들이 시위에 참여했다. -331~332- 끝.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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