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277 / 병자호란1 - 함명기 지음

최해식 2015. 5. 22. 13:52

- 위기에처한 明은 조선을 이용하여 만주를 견제하려는 以夷制夷策을 구사한다. '임진왜란 때문에 망해가던 조선을 다시 살렸다' 는 '은혜'  를 내세워 만주와의 싸움에 조선을 계속 끌어들이려 했다. -6-

 

 

- 병자호란(1636) 이 일어나기 직전 조선은 다시 분열되었다.

'중화국 明을 섬기고 오랑캐 청에게 맞서는 것'  을 국시로 내세웠던  척화파 와 '明을 위해 조선의 존망까지 걸 수는 없다'  고 했ㅅ던 주화파 간의 논쟁이 격렬했다, -7-

 

 

- 가까운 장래에 중국이 미국에 버금가는 초강대국이 된다면?

또 그 중국과 미국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고 사사건건 부딪힌다면?

그 와중에 일본이 '보통국가' 를 넘어 '자유롭게 전쟁할 수 있는 국가'  가 된다면? 여전히 '끼여 있는 '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떠오르는 거대 중국에 제대로 대응하지못하면 우리의 미래는 피곤하다. '기존의 제국'  이 쇠퇴하고 '새로운 제국'  이 떠오르는 전환기 마다 한반도는  늘 위기를 맞았다.  지혜롭게 대응하지 않는다면 'G2시대' 또한 예외일 수 없다.

어떻게 애야 할까? 병자호란 무렵처럼 국제질서의 판이 바뀌던 시기, 우리 선조들이 보였던 대응의 실상을 찬찬히 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병자호란은 '과거' 가 아니다. 어쩌면 지금도 서서히 진행되고 잇는 '현재' 일 수 있으며, 결코 '오래된 미래' 가 되지 않도록 우리가 반추해야 할 'G2시대의 비망록' 이다. -9-

 

- 광해군에게 올라온 상소들 ;

대북파 대간들이 이귀와 김자점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면서 들고 일어났다.  두 사람이 당시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를 원상회복시키기 위해  역적질을 벌이고 있다고 광해군에게 상소한 것이다.  그때 광해군의 총애를 받던  후궁 '김개시' 가 두 사람을 구했다. 김자점이 일찍부터 뇌물을 쓰면서 김개시에게 연줄을 대고 있던 덕분이었다. -20-

 

 

- 하늘이 광해군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었던 것일까?   장유 등이 이흥립(훈련도감의 수장인 훈련대장) 을 만났던 직후 밀고가 들어갔다. 

1623년3월, 이이반 이라는 자가 이흥립과 쿠데타 주모자들이 만났다는 사실을 김신국에게 알렸고,  영의정 박승종에게까지 보고 되었다.

 3월12일 저녁, 박승종은 추국청을 설치했다. 수사본부를 차린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광해군이다. 역적을 잡아들이자고 요청했지만 미적대며 재가를 미루었다.

1623.3.13일 아침이 밝았다,  광해군은 능양군 앞으로 잡혀왔다. 능양군이 주도한 '쿠대타' 가  '인조반정'  이 되는 순간이다. -22-

 

 

- 반정을 주도하여 성공시키는 데 공을 세운 공신들 ;

반정군의 대장이자 元勳인 김류를 병조참판, 또 다른 원훈 이귀를 이조참판으로, 거사 당일 주력군을 이끌었던 이서를 호조판서로 삼았다. 역시 반정에 참여한 공신 홍서봉은 병조참의에,  최명길은 이조좌랑에 임명되었다. -28-

 

 

- 명은 1623.3월부터 1625.5월까지  '인조책봉'  이라는 카드를 움켜쥐고 조선을 길들이려고 부심했다. 요컨대 명은 인조반정을 계기로 조선을 이용하여 후금을 견제하려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을 노골적으로 펼쳤다, 그리고 조선은 그 과정에서 '기우는 제국' 明의 궤도속으로 더 깊숙이 빨려들어가는 상황을 맞게 된다. -51-

 

 

 

- 1624.1월 이괄의  반란으로 서울은  점령 당했고,  인조는 반란군을 피해 공주의  공산성으로  파천하는 수모를 겪었다.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결정적인 공을  세운 이괄이 반란을 일으켰던  까닭은 무엇일까?-57-

 

- 1624.1월 이괄은 병력을 이끌고 남하하기 시작했다,

2.8일 밤에,  인조는 궁궐을 나섰다,

2.9일 한밤중에야 인조 일행은 수원에 도착했다,

2,11일 피난행렬은 천안에 도착했다,

2.10일 이괄이 서울에 입성했다,

반란군이 서울을 점령 한 것은 조선시대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이괄은 경복궁의 옛 터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인조의  숙부 '흥안군'을  국왕으로 추대했다. -65-

 

 

- 이괄이 승승장구하여 도성르로 들어오자 많은 사람들이 그의 휘하로 몰려들었다. 수원부사 '이흥립' 도 그안에 끼어 이었다. 한번 배신하면 계속 배신한다고 했던가?  인조반정이 일어나던 당일, 훈련대장이던 그는  반정군이 '창덕궁'으로 진입하는 것을  방관하여 광해군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다시 이괄에게 붙은 것이다.-66-

(참고글)

- 하늘이 광해군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었던 것일까?   장유 등이 이흥립(훈련도감의 수장인 훈련대장) 을 만났던 직후 밀고가 들어갔다. 

1623년3월, 이이반 이라는 자가 이흥립과 쿠데타 주모자들이 만났다는 사실을 김신국에게 알렸고,  영의정 박승종에게까지 보고 되었다.

 3월12일 저녁, 박승종은 추국청을 설치했다. 수사본부를 차린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광해군이다. 역적을 잡아들이자고 요청했지만 미적대며 재가를 미루었다.

1623.3.13일 아침이 밝았다,  광해군은 능양군 앞으로 잡혀왔다. 능양군이 주도한 '쿠데타' 가  '인조반정'  이 되는 순간이다.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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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르하치(1559~1626)

후금을 건국하여 청나라의 기초를 다졌다.  누르하치가 죽고 8남 홍타이지(1592~1643) 가 제위에 올라 태종이 되고, 병자호란을 일으켜 인조에게서 치욕적인 항복을 이끌어 냈던 바로 그 인물이다. 그는 1626.9.1일 심양 고궁에서 칸으로 등극했다. -146-

 

 

-.................-377-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