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 ;
1939.2.10일 일본군이 대만으로부터 출격,하이난섬(해난도) 침략을 개시한 날이다.
히틀러 군대의 폴란드 침공(1939.9.1.오전4:45) 으로 제2차세계대전이 유럽에서도 시작되엇다. -10-
- 1940년대 들어 물자난은 극심해졌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고무 품귀현상이 나타나, 고무신 원료가 고갈돼 고무신을 사는 게 어려워졌다.
1937.7.15일 경상북도 학무과는 학생들에게 고무신 대신 나막신이나 짚신을 신고 등교하라고 지시했다.
1938.11월부터 총독부는 고무신을 포함해 고무로 만든 물품의 제조를 금지한다는 지시를 내렸다.
이제 고무신은 특권층의 전유물이 되었다. -21-
-일제의 일어보급운동르로 1938년엔 전 인구의 12.38%이던 일어 해독자가 1943년에는 22.15%로 급증했다.(1910년 이후부터 즉시 일어보급을 시킨 것은 아닌가보다?) -42-
- 태평양전재의 발발 ;
1941.12.7 일요일 아침7:55 진주만 기습했다. -73-
-일본에겐 자신의 극단주의를 통제할 제어력이 없다. 한국이 잘 되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일본을 잘 타일러 옳은 길로 가게 하려면 어느 정도의 힘이 있어야 할 게 아닌가. 한국이 내부 갈등과 분열에 에너지을 쏟고 있는 것은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를 위해서도 불행한 일이다. -98-
- 1942년부터 3년 동안 지독한 흉년이 지속되었다, 그러나 일제는
1942년에 쌀생산량의 55.8%,
1943년에 쌀 생산량의 68%를 (1264만 섬) 을 공출해갔다. -101-
- 경성의 부민관(지금의 서울시의회 청사)에는 연극이나 행사가 많이 행해졌다.-118-
- 애국가의 작곡가 안익태 ;
1943년 베를린 필을 지휘하였다. 한국일보 주필 '임철순'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애국가 작곡 하나만으로도 안익태는 역사에 우뚝하다. 우리는 모두 그에게 빚을 지고 산 다. 그런데 우리는 안익태를 너무도 모른다. 남등릉 없는 신화도 만들어내는데 우리는 있는 신화도 부수고 깎아서 없앤다. 1955년 귀국하자 국내 음악인들은 질시하였다. 타계 4개월 전 한국을 떠나면서 근ㅡㄴ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눈을 크게 뜨고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여러 기자 선생들이 조국에 기여하는 길은 저 재잘대는 개구리들을 우물밖으로 끌어내는 일보다 우물이 대해로 통할 수 있도록 운하를 파는 일입니다.' 그가 작곡한 '애국가' 가 정부 수립과 함께 정식 국갈 채택된 지 60년 만에 그는 거꾸로 친일해위자가 되고 말았다. 지금 우리에게 ㅁ 필요한 것은 그를 잘 아는 것이다. 이번으 친일논란이 거꾸로 안익태를 잘 아느 계기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
과도한 순결주의 정서만큼은 자제하는 게 좋겠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의 수렁으로 빠지는 것만큼은 경계해야 하리라. -124-
-만주 건국대 경제학과 재학 당시 교수였던 육당 최남선과 사제관계를 맺은 전 국무총리 '강영훈' 은
"육당 선생는 우리나라가 망한 것은 힘이 없어서인데, (나라의 )힘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군사력이며, 우리민족이 군사훈련을 받을 수 잇는 기회를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말했다" 면서 "전쟁터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죽은 동포와 학우의 시체를 넘어서 이 나라에 큰일을 하게 될 것이라는 육당 선생의 설명에 당시 만주 건국대 재학생들은 모두 학병에 나갔다" 고 설명했다. 또 "육당 선생은 만주 건국대에서도 조선 민족이 동북아 문화의 중심이라고 주장해, 일본 교수들에게 미움을 사, 1학기 만에 강의를 그만뒀다" 면서 "이런 분이 어떻게 친일파일 수 있겠느냐" 고 반문했다. -145-
- 1943.11.22일 '카이로' 회담에서 루스벨트(미) ,처칠(영),장제스(중) 등 3국 수뇌회담에서 한국문제가 공식 논의 되엇다 -148-
- 미국은 1973년부터 2차 대전 당시 실종된 미군 유해를 발국하는 사업을 게속하고 잇다. 다인종 다민족 국가인 미국은 국가에 대한 충성을 이끌어내기 위해 국가를 위한 희ㅣ생자에 대한 예우에 전력을 기울이지만, 단일인종 단일김족 국가인 한국은 정반대다 그저 "억울하면 출세하라" 는 식이다. 이름이 높거나 세상의 관심을 끌 ㅏㄴ한 계기가 있으면 모든 덩성르 다 바치는 것처럼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엔 "누가 너더러 그렇거ㅔ 하랬어?" 라는 식이다. '한국인 징용자들의 비극' 이 과거 완료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닌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흔히 이야기되고 잇는 '유전무죄,무전유죄' 가 생각나고, 메르스 발생당시 국민들은 너가 스스로 알아서 살아남아야 되겠다는 마음이 들었다는 일반 시민들의 하소연 섞인 티뷰이 인터뷰가 또 생각난다. 대한민국 백성은 처량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의 자격지심 일까?)-163-
- 일제시대에 활약했던 많은 조선인 기업가들은 해방 후 친일파라는 멍에를 숙명처럼 짊어지고 다녀야 했고, 그런 것들이 오늘날 한국의기업이나 기업가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형성하느 데에 일조했다.
최남선,서정주 등의 뛰어난 역사학자와 시인도 이런 굴레에 끼여 자신의 업적을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하고 잇다. 조선인들이 자신의 역사를 부정당하고, 말과 글을 빼앗기고, 자신의 성과 이름마저 박탈당했을 뿐만 아니라 항상 피지배민족으로서의 차별과 멸시를 받으며 살아가야 했으며, 때로는 자신의 생각이나 사상마저 전향을 강요당함으로써 역사의 죄인이 되게 만든 시대가 바로 일제시대였던 것이다. 철로가 깔리고 도로가 뚫리고, 전화와 전기가 들어오고, 많은 공장과 저수지가 생겼으며 또 학교가 들어서고 도시가 발전한 것만 보고 일제시대르 문명화의 시대라고 보아서는 안 된다. 조선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일제시대는 더 없는 야만의 시대였던 것이다. -261-
- 의학이 발달하지 못했던 19세기까지만 해도 무슨 큰 전염병만 돌았다 하면 수십만에서 수백만 명의 인구가 순식간에 죽어나가는 건 흔한 일이엇다. 전쟁과 더불어 전염병이 가장 강력한 인구 조절 장치엿다고나 할까.
그래서 식민지 근대화론을 지지하는 '복거일' 은 식민지 조선의 인구가 1910년부터 1942년까지 94.4% 늘어난 사실을 거론하며 "식민통치의 본질적 제약과 폐해에도 불구하고 식민통치 아래서 조선 사람들은 상당히 잘 살았다" 고 주장한 바 있다.
한편 '신용하' 는 인구가 늘어난 것은 갑오개혁을 통해 서양의학이 도입되어 인구가 비약적으로 늘었다고 했다. 일제가 수탈을 안 해 인구가 증가한 것이 아닙니다. 일제강점 36년 동안 한국은 수탈당했고 국가 발전이 근본적으로 저지당했어요. 한국이 1910년 일제 식민지가 되지 않고 독립국가로 1945년까지 갔다면 5배,10배는 더 잘 살았을 것입니다." 라고 반박했다. -262-
- 일제강점기에 우리에게 남긴 문화적 유산은 부정과 긍정의 양면성이 있다. 이걸 제대로 아는 것이 우리가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공부하는 것에서 얻을 수 잇는 실사구시적 지혜가 아닐까?-269-
- 인간을 힘으로 굴종케 하는 행위 자체가 약육강식의 원리일까?
그렇다. 일본의 가장 큰 죄가 바로 그것이다.
지금도 힘이 없으면 책임조차 물을 수 없는 약육강식의 세계라고 하는 기본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일본은 여전히 뉘우치지 않고 잇다. 인류의 비극이다. (** 약육강식이란, 힘을 가진자들만이 살아 남을 수 있다라는 것일까?)-175-
- 1945.8.6.아침8:15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 되고,
8.8일 나가사키 원폭 투하 되었다. 그로부터 12시간이 지난
1945.8.8 자정 소련은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하여
한반도에 참전했다. -233-
-...............-279-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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