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종의 업적중 대표되는 것이 훈민정음의창제이다. 1446년 9월 세종은 훈민정음, 즉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 를 반포했다.
한자나, 영어 알파벳 문자에 무엇 때문에 그 글자를 만든다는 명확한 목적이 적혀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
그러나 최만리는 1444년 2월 훈민정음 반포를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렷다. 이유는 이제껏 중국의 제도와 문물을 받아드려오다가 우리의 독자적인 말과 글을 쓰면 중국을 자극할 수 있단. 점과, 이미 이두가 있으니 한글은 필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종은 중국과는 다른 우리의 독자적인 문자, 어리석은 백성이라도 누구나 쉽게 쓸 수 잇는 글자의 창제는 우리 민족의 자주성과 민본, 실용를 위해 꼭 필요하다고 했다. -69~70-
- 신숙주가 쓴 일본기행문 [해동제국기] 는 대일외교에 있어 중요한 지침서의 역활을 톡톡히 했다.
그러나 신숙주는 1453년 계유정난이라는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세조의 대표적인 참모로 활약한 이유 때문에 그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평가가 많았다. 오죽한면 쉽게 변질되는 나물을 일컬어 '숙주나물' 이라 했을까? 그러난 세조에서 성종대에 걸쳐 완성 된 [경국대전] 이나 [동국통감] 과 같은 서적 편찬 사업의 중심에는 신숙주가 잇ㅆ었다, 이처럼 신숙주의 예에서 보듯, 한 인물의 역사적인 평가를 함에 잇어서는 부정적인 면과 긍전적인 면을 균형 있게 다뤄야 할 것이다. -88-
-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축출한 인조와 서인 세력은 '중립 외교' 대신 '친명배금' 정책으로 광해군 시대와는 180도 다른 강경 외교 노선을 고수했다 '비현실적인 ' 강경 외교는 1627년의 정묘호란, 1636년 병자호란이라는혹독한 전쟁의 상처를 안겨다 주엇다. -98-
- 숙종 시대에 단종과 사육신의명예를 회복시키면서 수양대군의 쿠데타에 대한 면죄부는 사라졋다.
집권에 성공했다고 해도 불법적인 쿠데타가 면죄부가 딜 수 없음은 현대의 정치사에서도 재현되고 잇다. 한때 '성공한 쿠데타' 로 선전되었던 1979년 12월12일 쿠데타의 주역 전두환과 노태우는 대통령 자리에 까지 올랐지만 결국은 역사의 심판대에 서서 각각 사형과 무기징역을 구형받았었다.
'성공한 쿠데타' 의 원조 세조가 지하에서 전두환과 노태우의 말년 상황을 알게 된다면 어떤 입장을 취할까? -201-
- 조선시대의 붕당정치를 당쟁으로 크게 비판한 쪽은 식민사관의 관점에서 본 일제 관학자들이엇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붕당정치에서는 현대의 정당정치처럼 특정 세력의 독주에 대한 견제와 균형이라는 긍정적 요소도 발견된다. 각 붕당은 백성의 지지를 얻는 데 주력 했기 때문에 이 시기에는 민란이 별로 발생하자 않았다. 오늘날의 정당정치에서도 한 당의 일방적이 독주보다는
비판세력의 견제가 정치를 건전하게 만든다. -217-
- 많은 사람들이 [춘향전] 이 역사적 실제인 것처럼 해석하곤 한다. 그러나 [춘향전] 은 허구적 상황을 담은 소설이라는 점이다. 로맨스 즐기다 1년 만에 장원급제, 이도령은 천재인가? 아니다. -286-
- 1592년 4월 13일 일본군은 20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했다. 선봉대는 4월 14일 부산진을 침공한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였다. 부산진 첨사 정발(1553~1592) 이 항전하다가 전사하고, 15일에는 동래부사 송상현이 동래성을 사수하다가 전사했다 당시 일본군 선발대느 "싸우려면 싸우되 싸우고 싶지 않으면 길을 비켜라" 라느 나무 팻말을 세웠자만, 동래부사 송상현은 "싸워 죽기느 쉬워도 길을 비키기는 어렵다" 는 글귀를 팻말에 적어 일본군 진영에 보내어 결사 항전의 의지르 보였다. 그러나 신식 무기 조총으로 무장한 2만 명의 일본군을 2,000명의 군사와 도성민으로 대적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결국 송상현은 전사하고 말았다. -358-
- 임진왜란의 생생한 증언, [쇄미록]
[쇄미록] 은 조선중기의 학자 오희문(1539~1613) 이 쓴 일기이다. 1591년 11월부터 시작하여 1601년 2월까지 9년 3개월간의 내용을 담고 잇다. [쇄미록] 이라 한 것은 피난의기록이라는 뜻을 담고 잇다.
오희문 자신은 과거어ㅔ 급제하지 못햇으나 아들 오윤겸이 영의정에 오르고, 손자 오달제가 인조의 삼전도 굴욕시절의 삼학사의 한 사람으로 명성을 떨치면서 해주 오씨 '가문의영광' 을 안겨준 인물이 되었다. 증손자 오도일 역시 숙종 시대 소론의 중심인물로 이름을 날렧다. 오희문의 기록정신과 문장력은 조선후기에 그의 후손들이 문장가, 정치가로서 성장하는 데 많은 기여를 했던 것이다. -367-
- [쇄미록] 에는 당시의 힘든 일상 속에서도 술과 여가생활을 한 당시 사람들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도 다르지 않다. -375-
- 마흔을 넘은 나이에 의병운동을 하는 곽재우를 보고 당시 사람들이 비아냥거렸지만 남강의 나루터 정암진 전투에서 큰 승리르 거둔 후 , 의령,삼가, 합천 등을 수복햇고, 이어 현풍,창녕, 영산의 왜군까지 섬멸하여 경상우도 지역을 평정했다. -379-
-청의 선봉대장은 용골대였으며, 기마병은 마부대가 이끌었으며
1636년 12월 8일 마부대가 이끄는 기병 6000명니 별다른 저항를 받닞 않고 얼어붙은 국경 압록강을 건넜다. 병자호란의 시작이엇다.
기마병을 중심으로 질풍같이 쳐들어온 청군은 압록강을 넘은지 닷세 만에 서울을 점령했다. -386-
- 1637년 1월 22일 강화도가 함락되고 그곳에 있던 왕족과 신하들이 포로가 되면서 결국 최명길이 총대를 메고 국왕이 성을 나와 항복하는 내용의 문서를 작성했다. 그러나 옆에 있던 김상헌은 이를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찢어진 국서를 최명길이 다시 모아 붙이는 해프닝을 겪으면서 마침내 항복 문서가 작성되엇다. 최명길은 김상헌이 찢은 국서를 다시 붙이며서 "대감의나라를 위한 충성을 모르는 바 아닙니다. 그러나 나 역시 나라와 백성의 안전을 위해 이러는 것입니다. 대감께서 이 국서를 또 찢어시면 나는 다시 붙이겟습니다." 라고 했다
위기의 시기 역사의 길목에서 서로 다른 정치 노선을 걸었던 두 사람은 주화파와 척화파의 대립을 축소판처럼 보여주엇다. -388-
-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묘시(오전5~7시) 무렵 세자 및 대신들과 호위군을 동반하고 삼전도로 향했다. 삼전도에 마련된 수항단에서 인조는 태종이 있는 단상을 향해 '삼배구고두' 의 예를 행했다. 이 의식은 여진족이 그들의 천자를 배례하는 의식 절차였다. 조선 역사상 가장 굴욕적인 항복을 한 삼전도의 치욕 을 당한 조선은 모두가 참담한 패배의식에 빠졌다. 이후 청태종은 조선의 항복을 받은 이 사건ㅇㄹ 영원히 기념하려는 뜻에서 '삼전도비'를 세웠다. 이 비의정식 명칭은 '대청황제공덕비' 로 높이 395센티미터,너비 140센티미터의 대형비석이었다.372년 전 그 차가운 겨울 남한산성에서 추위에 떨며 우왕좌왕했던 인조와 신하, 백성들의 참혹했던 모습은 명분만 가지고 벌이는 전쟁이 얼마나 무모한 지 를 후대에 뜨렷하게 각인시켰다. (** 손자병법에. 전쟁의 조건, 또는 장수의 조건을 보라.?) -391-
(출전) 남한산성-김훈 지음/ [삼전도비]의 글씨는 '오준'이 썼다. ......이 비석의 운명은 병자년 겨울에서 정축년 초봄까지 고립무원의 산성 안에서 벌어졌던 말과 길의 싸움이 그 후 삼백팔십여년을 이어져왔음을 보여준다. -419-
- [열하일기] 는 조선후기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다.
하지만 박지원의 글은 문체와 그 내용의 파격성으로 인하여 비난의 대상이 되어 국왕인 정조 역시 패관잡기를 불온시하고 순정문醇正文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했다, 정조는 직접 하교를내려 박지원의 문장이 비속함을 지적했다. 양반의 신분질서에 대해 저항적 성격을 지닌 그의 글이 널리 퍼질 경우 사회기강이 무너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엇다. 이러한 연유로 [열하일기]는 연암이 세상을 떠난 약 80년 후인 19세기 후반에 가서야 주목을 받을 수 잇엇다. -494-**최근래에도 마광수 교수도 그의 소설로 재판받었던 때도 있었지.
- 세종로가 '광화문 광장' 으로 탈바굼했다. 지상 광장 양쪽으로는 수심 2센티 미터의 역사 물길이 흐른다. 동쪽 역사물길 617개의 바닥돌에는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의 역사가 기록되어 잇다. 서쪽의 바닥돌은 빈칸으로 남겨졌는데, 앞으로 우리가 만들어갈 역사를 기록할
계획이라고 한다. 역사 물길에 새겨진 주요한 사건으 중심으로 조선시대 500년 역사의 시간 여행을 해보자-543-
-광화문 광장을 거닐면서, 역사 물길을 따라가면서 조선시대 이래 우리 역사의 주요 사건들을 되짚어보았으면 한다. 현대사에서 중요한 생활의 변화를 가져오게 한 사건들을 살피면서,자신이 걸어왔던 삶의 흔적들과 대비해보면 더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551-끝.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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