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서 中 가장 널리 읽힌 병서는 말할 것도 없이 [손자병법]이다.
첫 편인 [시계]에서 병법위에 '병도' 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업급한 유일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다른 병서에서는 찾을 수 없는 [손자병법] 만의 자랑이다.-13-
-병도와 전도 및 쟁도를 정리한다.
1.병도(전쟁을 최대한 피하는 대원칙)
* 부득이용병- 부득이할 경우 최후의 수단으로 무력을 동원.
* 집이시동- 무기를 거두어들였다가 불가피할 때 움직이는 원칙
2.전도(전투를 최대한 피하는 대원칙)
* 지피지기- 상대방과 나를 안 연후에 용병하는 원칙
* 五事七計- 도천지장법의 오사를 검토하고 상대방과 내가 처해 있는 7가지 상황을 비교한 후 비로소 용병하는 원칙
* 모공용병- 최선책인 벌모와 차선책인 벌교,차차선책인 벌병을 포함해 전투하는 원칙
3.쟁도(전쟁의 화를 최대한 줄이는 대원칙,전술)
* 궤도- 속임수로 적을 함정에 빠뜨리는 전술
* 도광양회-달빛 아래 은밀히 칼을 갈며 때를 기다리는 전술 -15-
-현존하는 병서 는 총 12종이다.(시간대 별로 분류 함)
1 육도- 태공망 여상 著- 주나라 건국 원훈임.
2 사마법- 사마양저 著- 제경공의 패업을 도움.
3 손자병법- 손무 著- 오월시대 오자서와 함께'합려'의 패업을 도움.
4 오자병법- 오기著- 위무후를 도와 패업을 이룸.
5 손빈병법- 손빈著- 제위왕의 패업에 공헌함.
6 울료자-울료자著- 진시황의 책사로 활약함.
이상은 진시황의 천하통일 이전에 등장한 것임.
7 삼략- 황석공著- 장량이 전수받아 전한제국 건립에 공헌함.
8 장원- 제갈 량著- 촉한의 승상인 제갈 량이 씀.
9 당리문대- 당태종 '이세민' 과 '이정' 이 편집함.
10 백전기법- 유기著- 명태조 주원장의 책사인 유기씀.
11 투필부담- 하수법著- 명대 중기 '서호일사'의 필명을 가졌음.
12삼십육계- 작자 미상- 청대 초기에 무명인이 씀.
** 이 가운데 가장 으뜸이 되는 병서는 [손자병법]으로 이는 군사 분야뿐만 아니라 국가경영 및 인사의 성패 등에 탁월한 견해르 제시하고 있다. 또한 인생 전반에 관한 처세서로 활용할지라도 전혀 나무랄 게 없는 고전에 해당한다. -23-
-전한 초기에는 사마법이 손자병법및 오자병법과 더불어 '3대 병서' 로통용되었다. 또한 [울료자]는 손자병법과 오자병법 및 사마법과 더불어 옛날부터 높은 평가르 받은 병서다.-24-
-[삼십육계]- 전술에 관한 한 역대 병서 中 압권에 속한다.
중국에서 [삼십육계]의 전술을 응용한 다양한 유형의 경영전략서가 대거 쏟아져 나와 산업현장과 일상생활에서 널리 활용되고 있다. -28-
- [ 사마법( 무경3서) ]
춘추시대 말기 제나라는 제경공의 치세 때 제환공 때만큼 성대하지는 못하나 동방의 패자를 자처했다. 여기에느 안영의 보필 못지않게 당대 최고의 병법가인 '사마양저' 의 보필이 큰 기여를 했다. 사마양저는 제경공 때 발탁되어 군사권을 통괄하는 '대사마' 의 직책을 맡았다. 후대에 '사마양저' 로 불리게 된 이유다. 안영이 그를 천거하였다. -31-
-秦穆公과 재상 백리해의 아들 '맹명시孟明視' 가 황하를 건널 때 맹명시가 전군에 하령했다.
"모든 군사는 타고 온 배를 모조리 불태우도록 하라!"
"전쟁의 승패는 병사의 사기에 달려 있습니다. 배를 태우는 것은 군사에게 진격이 있을 뿐 후퇴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죽기르 각오해야 사기가 충천합니다. 초한전 당시 항우는 배를 태우고 취사용 가마솥을 깨뜨리는 '파부침주破釜沈舟' 를 단행했던 바 있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맹명시는 비록 파부를 행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파부침주'의 효시에 해당한다. -77-
-
- [ 울료자( 무경4서) ]
[울료자] 의 저자 울료자는 위나라 대량 출신으로 진나라로 들어가 유세했다. 진나라 최고의 군정장관인 국위國尉에 임명된 까닭에 당초 벼슬이름을 좇아 '위료'로 부르다가 이후 '울료'로 불리게 되었다.-147-
-광서 3년(1877)에 간행된[무경칠서회해] 는 "울료자는 위나라 출신으로 귀곡자의 수제자였다. 음양의 이치에 밝고 병법에 조예가 깊었다. 전한 말기 유향劉向은 [별록] 에서 울료자가 상앙을 숭상했다고 말했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울료자] 는 법가뿐만 아니라 유가와 도가,묵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상을 포괄하고 있기 때문에 반고는 [울료자] 를 잡가류에 넣었다. 더구나 방연과 손빈은 물론 유세가인 장의와 소진으 스승으로 알려진 귀곡자는 전설적인 인물이다. 울료자가 그의 제자였다는 이야기는 더욱 믿기 어렵다. 다만 전국시대 말기에 [울료자] 가 출현한 것만은 확실하고,실존인물일 경우 진시황 때의 사람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지만 사마광은 [자치통감] 을 편제하면서 울료자를 언급하지 않아서,실존 여부에 회의적인 입장을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울료자의 실존 여부가 아니라 [울료자]의 내용이다. -149~150-
-굳이 군사를 움직이지 않고도 승부를 결정짓는 것은 군주의 승리인 主勝 이고, 부득불 군사를 움직여 결정짓는 것은 장수의 승리인 將勝 이다.주승은 조조가 [손자약해]를 펴내면서 서문에서 不得已用兵부득이용병을 언급한 것과 취지를 같이하는 것이다. 장승은 [손자병법]<모공>에서 말하는 "상대방을 온전히 하여 굴복시키는" 全勝에 해당한다.
<兵令>상에서는 주승과 장승의 이치를 문무겸전文武兼全의 이치로 풀이해놓았다. -153-
-전쟁의 승리를 크게 도승과 위승,역승으로 구분한 것은 여타 병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울료자] 만의 특이한 면모이기도 하다. 治道論의 관점에서 볼 때 도승은 왕도 리더십,위승은 패도 리더십, 역승은 강도 리더십에 해당한다. 최고통치권자가 상황에 따라 다양한 치도를 구사하듯이 장수도 상황에 따라 도승이나 위승 또는 역승을 취해야 한다는 주문이나 다름없다. 상황이 험악해질수록 도승대신 위승이나 역승의 길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난세의 심도가 깊어질수록 왕도가 아닌 패도나 강도를 구사할 수밖에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156-
-사람이 아무리 많이 먹어도 하루 세 끼 식량에 지나지 않고, 말이 아무리 많이 먹어도 하루 콩 서 말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사람마다 누렇게 굶주린 기색이 역력하고, 말도 굶주려 수척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시장의 이윤을 관부가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탓이다. (.......) 참새가 사나운 매에게 쫓기면 사람의 품 안으로 달려들거나 집 안으로 뛰어든다. 이는 본성이 아니라 뒤에 무서운 적이 있기 때문이다. 태공망 여상은 나이 70세에 은나라 수도
'조가'에서 백정 노릇을 하고, '맹진'에서 음식을 팔았다. 7년이 지나돌록 알아주는 군주가 없었고, 사람들은 오히려 그를 미치광이라며 놀렸다. 그러나 주문왕을 만나자 그는 3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가 단 한 번의 싸움으로 천하를 평정했다. 군주의 단호한 결단이 없었다면 그가 어떻게 이런 대공을 세울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말하길르 , "좋은 말이 임자를 만나면 능히 먼 길도 갈 수 있고, 현명한 선비가 때를 만나면 능히 대업도 이룰 수 있다" 고 한 것이다. -189~190-
-승리하는 군사는 물과 같다. 물은 본래 유약하지만 계속 충격을 가하면 반드시 구릉조차 무너뜨리고 만다. 이는 물의 성질이 시종 하나같고, 한곳에 끊임없이 충격을 가했기 때문이다. 만일 천하의 명검인 '막야' 처럼 예리한 병기와 무소가죽처럼 튼튼한 갑옷으로 무장한 병사를 이끌고 임기응변의 전술을 구사하면 천하에 이를 당할 자가 없다. 그래서 말하기를 ,"현명하고 능력 있는 인재를 임용하면 굳이 날을 가려 길일을 택하지 낳을지라도 매사가 순조롭고,법령을 잘 정비하면 굳이 점복을 치지 않을지라도 매사가 좋은 조짐을 보인다" 고 하는 것이다. 흔히 "천시는 지리만 못하고, 지리는 인화만 못하다" 고 말하는 것도 이런 취지에서 나온 것이다. 옛 성인이 삼가고 조심하며 오직 인사에만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 이유다. -191-
-막야莫耶는 원래 오왕 합려의 명에 의해 명검을 만든 검장劍匠의 이름이다. 후대에 명검을 상징하는 말이 되었다.
'서시지견犀시之堅'은 무소 가죽처럼 질기다는 뜻이다. 여기의 '서시'는 무소 가죽으로 만든 갑옷과 방패를 말한다. 서는 수컷, 시는 암컷을 의미한다. '박속개지樸속蓋之'의 박속은 나뭇가지를 듯한다. 원래 '속'은 잡목을 말한다. '원부이고援부而鼓'는 장수가 북채를 잡고 전고를 치며 지휘하는 것이다. -193-
-진시황 정이 축객령을 내리자, 기려지신 中 초나라에서 온 이사는 축출되는 와중에 [간축객서] 라는 상소문을 올렸다.
"듣건대, 태산은 토양을 가리지 않고 받아을여 그같이 크게 되고,강과 바다는 작은 시냇물도 가리지 않고 받아들여 그렇게 깊게 되었다' 고 합니다. 王者는 백성의 귀의를 두루 받아들임으로써 덕정을 널리 펼 수 있는 것입니다."
[간축객서] 는 제갈량의 [출사표] 에 버금하는 명문으로 평가받고 있다.당시 진왕 정은 이를 읽고 크게 놀라 곧바로 축객령을 거두고 사방으로 사람을 보내 '그를 데려오도록 했다'고 합니다. -240-
- [울료자]<병담>에서 벌모와 벌교의 중요성 을 역설하고 있다.
군사를 움직이지 않고도 승부를 결정짓는 것은 군주의 승리인 主勝이고,부득불 군사를 움직여 결정짓는 것은 장수의 승리인 將勝이다."
[손자병법]의 벌모와 벌교를 主勝, 무력을 동원한 벌병과 유혈로 적의 성을 공략하는 攻城을 將勝 으로 요약해놓은 것이다. (.........)
진시황의 천하통일 과정을 보면 울료자의 건의를 그대로 좇았다.
진시황17년(기원전230), 함양을 관장하는 내사內史 '승'이 군사를 이끌고가 한나라를 무혈로 접수한 것은 벌모의 대표적인 사례에 속한다.
진시황19년(기원전228), 이간계로 내분을 격화시킨 뒤 조나라 도성
'한단' 을 접수한 것은 벌교에 해당한다.
이에 반해 60만 대군을 동원해 2년간에 걸친 접전 끝에 진시황24년(기원전223)에 초나라를 패망시킨 것은 벌병 내지 공성의 전형이다. 벌병과 공성은 무경십서가 가장 꺼리는 것이다. 진나라가 초나라 평정에 진을 뺀 것은 벌모와 벌교가 통하지 않았던 탓이다.(.....) 피를 흘리지 않고 적을 제압하는 벌모와 벌교의 계책이 얼마나 중요한지 반증하는 대목이다.
기원전221년 초나라에 이어 제나라까지 평정하고 천하를 사상 최초로 통일하자 진왕 정은 스스로 칭호를 바꿔 황제 라고 했다. -246~247-
-
-21세기 비즈니스 정글에서통용디는 임기응변의 요령 은 크게 2가지다.
첫 번째 요령 은 사안의 이면을 읽을 줄 아는 안목이다. 우주 만물은 음양이 대립하는 모습으로 존재한다. 정면과 反面이 동시에 존재한다.
경제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안의 반면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종횡가 이론을 모아놓은 [귀곡자] 보다 더 좋은 이론서도 없다.
여기에 소개된 반면을 읽는 비결은 크게
첫째, 마음을 여닫으며 대화를 이끄는 벽합술,
둘째, 이야기를 뒤집으며 상대의 반응을 유인하는 반복술,
셋째, 상대와 굳게 결속하는 내건술,
네쌔, 벌어진 틈을 미리 막는 저희술,
다섯째,상대를 크게 칭송하며 옭아매는 비겸술,
여서째, 상대의 형세에 올라타는 오합술,
일곱째, 상대가 속마음을 털어놓게 만드는 췌마술,
여덟째, 시의에 맞게 계책을 내는 권모술 등 모두 8가지다. -252-
-임기응변의 두 번째 요령 은 사안의 핵심을 한마디로 요약할 줄 아는 안목이다. 온갖 종류의 정보가 난무하는 인터냇 정보통신시대에 이는 필수불가결하다, 어떤 것이 유익한 정보인지 알아내기 위해 꾸준히 식견을 넓히지 않으면 안 된다. 절대적인 시간과 노력이 요구된다. -
동서양 고전 목록을 만든 뒤 시간을 두고 일독할 것을 권하고 있다. 바람직한 일이다. 문제는 바쁜 현대인에게 그럴 시간이 충분치 않다는 데 있다. 자칫 난독으로 흘러 시간만 버리고 별 소득이 없을 수 도 있다. 그보다는 차라리 대표적인 고전 몇 권을 추려 여러 번 읽으면서 내용을 깊이 음미하는 것이 낫다. (.........) 일본 메이지유신의 사상적 지도자인 '후쿠자와 유기치福澤諭吉는 자서전에서 평생에 걸쳐 [춘추좌전]을 모두 13번 읽었다 고 토로한 바 있다. 모택동도 죽을 때까지 방대한 분량의 [자치통감] 을 17번이나 읽었다고 한다. (.......) 지적호기심은 체계적인 지식 위에서만 가능하다. 고전에 대한 심도 있느 탐구가 답이다. 공자가 '온고지신'을 역설한 이유다. 고금을 말론하고 온고가 생략된 지신은 없다. 온고의 토대 위에 지신을 행하는 것이 핵심이다.
고전만 열심히 읽으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틈나는 대로 색다른 생각과 경험을 지닌 자들이 전하는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뇌에 지속적인 자극을 주기 위해서다. 다르게 보고,다르게 생각하기 위한 방법이다. 사물의 반면을 읽는 데 도움이 된다. 인간의 뇌도 몸과 마찬가지로 지속적으로 자극을 주지 않으면 편히 지내려고 든다. 이를 방치하면 머리가 굳어진다. 유연성을 상실한느 이유다. 쉬지 않고 스스로를 채찍질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것이 [주역] 에서 역설하는 '자강불식自强不息'이다. '온고지신'과 자강불식'은 같은 내용을 달리 표현한 것이다.
일상내지 통상과 비상은 종이 한 장 차이다. 남들이 일상 내지 통상으로 여길 때 비상으로 여기는 자만이 궁극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잇다. '자강불식' 이 뒷받침되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기업의 성채가 여기서 갈린다.
퍼스트 무버가 되기 위해서는 '잡스' 가 역설했듯이 '다르게 생각하기' 의 달인이 되어야만 한다. 통념의 틀을 깨는 것이 요체다. 고통과 우여곡절이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퍼스트 무버의 스토리가 만들어진다. 위대한 발명과 발견이 하나같이 스토리를 지닌 이유다. 스토리가 사람을 감동시킨다. -253~254-
- [ 손빈병법 ( 무경5서) ]
손빈은 제니리 출신으로 전국시대 중기에 제니리 ㅊㅇ참모장인 軍師호 활약했던 인물이다. 위나라 방연과 함께 귀곡자' 밑에서 병법을 ㄹ배운 적이 있엇다. 제위왕과 손빈의 만남은 명군과 현신의 만남에 비유할 수 있다. 장군 '전기'는 손빈을 제위왕에게 천거했다. 당시 방연은 '위혜왕' 밑에서 장군이되었다.
-춘추전국시대는 크게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로 나눌 수 있다. 춘추시대는 다시 초장왕이 사망한 기원전 591년을 기점으로 전기와 후기로 나눌 수 있다. 전국시대 는 중원의 晉나라가 삼분되는 기원전 403년을 기점으로 시작되었다. 秦나라를 당대 최고의 부강한 나라로 만든 상앙이 죽음을 맞이하는 기원전338년을 기점을 전기와 후기로 나눌 수 있다.
전기가 농업을 위주로 한 병가의 전성시대라면, 후기 는 상업을 위주로 한 종횡가의 전성시대에 해당한다. -363-
-맹상군 '전문'은 제위왕의 후손으로 3,000명의 식객을 거느리며 '계명구도'와 같은 숱한 일화를 남겼다.
평원군 '조승'은 조혜문왕의 동생으로 상국이 된 '모수자천' 고사의 주인공이다.
신응군 '무기'는 위소왕의 아들로 조나라의 수도 '한단' 이 진나라에 포위되었을 때 이를 구해줌으로써 '절부구조' 의 고사를 남겼다.
초나라의 춘신군 '황헐'은 초경양왕을 섬기며 능란한 외교술로 초나라를 합종의 맹주로 끌어올리면서 25년 동안이나 초나라의 재상직을 역임했다. 그러나 그는 초고열왕이 죽자 자신의 휘하에 있던 '이원'의 암수에 걸려 멸족의 화를 입었다. (........)
중원의 제후국들로부터 오랑캐 취급을 받았던 서쪽 진나라가 천하통일을 이루게 된 1차적인 계기는 진효공이 상앙의 변법을 과감히 도입했던 데 있다. 진나라는 2차례에 거려 상앙의 변법을 전면적으로 실시했다. 덕분에 상벌제도를 세우고 ,토지를 대량 개간하고,병력을 강화하고, 군현제를 도입하는 등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다. 진시황의 천하통일은 이를 토대로 했던 것이다. 씨는 진효공이 뿌리고 열매는 진시황이 거두었던 셈이다. 전국시대 전후기의 분기점을 상앙의 사망 시점으로 잡는 이유다. -365-
-'공숙좌' 는 위혜왕 때 상국 으로 있었다.
秦헌공 때 '소량' 싸움에서 위나라 공숙좌는 진나라 군사에게 포로로 잡혔다. 공교롭게도 이때 마침 진헌공이 병사했다. 그의 아들 '거량' 이 뒤를 이어 즉위했다. 그가 진나라를 강대국으로 만들었던 '秦효공'이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인재를 구하는 구현령을 내렸다. 공교롭게도 상국 공숙좌의 휘하에 있던 '상앙'은 위혜왕의 부름을 받지 못하자 秦효공에게로 가 참모가 되었다.이때 상앙은 秦효공에게 帝道와王道,패도를 차례로 언급했고 부강한 나라가 돌 수 있는 疆道강도를 이야기하자 군주가 기뻐했다. 강도는 무력으로 상대방을 제압하는 병가의 치도다. 병가와 법가사상이 만나는 지점이다. 그것이 바로 '부국강병'이다. -367~372-
- '상앙'이 '진효공' 에게 말했다.
"확신 없는 행동은 성공할 수 없고, 확신 없는 사업은 성과가 없다 고 했습니다. 속담에 이르기를 , '우직한 자는 이미 이루어진 일에 대해서도 어둡고, 지혜로운 자는 일의 발단이 싹트기도 전에 미리 알아차린다. 백성은 시작을 함께할 수는 없지만 성취한 공은 함께 즐길 수 있다' 고 했습니다." -373-
-진나라 '상앙'은 잃어버린 '서하'땅을 되찾게 되었다. 위혜왕은 서하 땅을 빼앗긴 상황에서 더 이상 '안읍'에 머물 수 없었다. 위혜왕이 도성을 大梁'으로 옯겨면서 이후 위나라는 梁나라로 불리게 되었다. 도성을 대량으로 옯긴 이듬해 인 기원전 351년 , 위나라느 조나라의 도성 '한단' 을 반환하고 조나라와 강화했다. 이를 계기로 위나라는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위혜왕이 상앙을 잃은 후과가 이처럼 컸다.
이와 정반대로 서하 땅을 회복한 상앙은 승승장구했다. 진효공은 상앙의 공르 높이 사 위나라에게서 빼앗은 상어 땅을 봉지로 내리고 '商君'의 칭호를 하사했다. 세인들은 이때부터 그를 '상앙'으로 불렀다.
상앙이 가장 득의한 시기였다. -381-
- 기원전343년, 주왕실로 부터 '방백' 의 칭호를 하사받자, 진효공은
크게 기뻐했다. 이는 춘추 시대의 패자와 유사한 명예를 얻게 된 셈이다. 주왕실로서는 월왕 구천 이후 100여년 만에 새로운 중원의 패자를 선정했던 것이다. 춘추시대 중기 진목공이 '서백'의 칭호를 받고, 진효공의 선친 진헌공도 주왕실로부터 패자를 상징하는 '보불지복' 을 상으로 받았으나 패자로 공인받은 것은 진효공이 '방백' 의 칭호를 하사받았을 때부터이다.
이를 계기로 중원의 제후 모두, 진나라가 천하의 맹주가 된 사실을 절감했다. 진시황의 천하통일은 진효공이 중원의 패자로 공인받은 뒤 근 100여 년 뒤에 실현되었다. 로마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듯이
진제국 역시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천하제일의 막강한 무력을 획보한 진나라가 근 100년 뒤까지 주왕실을 그대로 보존시켰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진시황의 천하통일 때까지 '천자'의 권위를 최대한 활용했던 것이다. '진제국의 초석' 은 진효공이 놓았고 상앙이라는 뛰어난 법가사상가의 헌신적인 보필이 결정적인 공헌을 했던 것이다. -383-
-중국의 초대 사회과학원장을 지낸 '곽말약'은 진효공을 중국의 전 역사를 통틀어 가장 '대공무사' 한 정사를 펼친 군주 로 꼽았다. 이는 상앙을 전폭 신뢰했기 때문이다.
" 진효공이 역사상 가장 '대공무사'한 정사를 펼칠 수 있었던 것은 법가 사상가인 상앙을 전폭 신임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상앙에 대한 신임과 지지는 춘추시대 관중에 대한 제환공의 신임, 삼국시대 제갈량에 대한 유비의신임, 북송대 '왕안석' 에 대한 '신종' 의 신임 등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다. "
곽말약의 이런 평가는 곧 '기려지신' 인 상앙의 한계를 지적한 것이다.
중국의 역사를 개관해보면 뛰어난 지략을 지닌 '기려지신' 은 거의 예외 없이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가장 큰 이유는 후계자와의 갈등이다.
초나라는 일찍이 '초도왕' 의 죽음을 계기로 '기려지신' 인 '오기' 의 변법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던 바 있다. 초나라에 치명타로 작용했다(......)
진효공의 뒤를 이어 '진혜문왕'이 즉위하자 상앙의 변법 조치에 불만을 품었던 기득권 세력은 상앙을 헐뜯기 시작했다.
무함이 들어가지 기 전에 스스로 '상국의 印인'을 반납하고 병권을 내놓는 것이 도리였다. 상앙을 높이 평가할 수 없는 이유다. 그는 곧바로 모반의 무함을 뒤집어쓰게 되었다. -384~385-
-상앙의 삶은 전국시대 초기 최고의 병가로 명성를 떨친 오기와 사뭇 닮았다. 입신하는 과정도 그렇고, 비침한 최후를 맞이하는 과정도 그렇다.
오기는 위나라에 있을 때는 주로 병법가로 ㅇ활약 했으나 초나라로 망명한 후에는 상앙처럼 대대적인 변법을 시행 했다. 법가의 행보였다. 상앙도 위나라 땅을 취할 때 병법가를 방불케 하는 궤사를 구사했다. 오기가 '법가적 병가' 라면, 상앙은 '병가적 법가' 에 해당한다. -396-
-...... -450-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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