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212.손자,오자병법(무경십서1 )-신동준 역주

최해식 2014. 12. 24. 23:25

-  참조 .........................................................................

오기는 전국시대 초기에 손자와 쌍벽을 이룬 뛰어난 장수였다. 그가 쓴 [오자병법] 은 [손자병법] 과 함께 '손오병법' 이라 불렸다. 오기의 이론은 손자에 비해 약간 부족한 부분이 ㅇ있지만 전쟁 수행능력은 전혀 뒤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전군을 호령하는 장수면서도 사졸들과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옷을 입엇다. 편한 잠자리를 마다하고 땅바닥에서 잠을 잤고 행군할 때도 말으 타지 않으며 자신의 식량은 직접 어깨에 지고 다니는 등 일반 병사와 고통을 분담했다,  병사의 종기를 입으로 고름을  빨아주었다는 소식을 들은 병사의 어머니는 오열을 하여 " 남편이 군대에 있을 때  오기 장군이 고름을 빨아서 병을 고쳐준 적이 있었는데 이제는 아들이 똑같은 일을 당했으니 장군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열심히 싸우다 제 아비처럼 싸움터에서 목숨을 잃을 것 같아 눈물이 앞을 가린다"  고 대답했다. 

[오자병법]의 도국 편에서 밝히듯 오기가 "76번 출전하여 64번의 승리를 거두고 나머지는 화해를 하고 영토를 1,000리나 넓히는" 위업을 달성할 수 잇었던  요인은  병사들의 마음을 얻은 용병술이었다. [손자병법에서 인생을 배우다 - 저우이펑 지음, 황보경 옮김]-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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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관이 되고자 하는 자는 사서삼경을 읽었다. 논어,맹자,대학,중용   시경,서경,역경이다.

武擧시험을 보려는 사람은 '무경칠서武經七書'를 읽었다. 손자병법,오자병법,사마법,울료자,당리문대,육도,삼략 을 말한다.

손빈병법,장원, 삼십육계 를 합쳐서 '무경십서' 라고 한다.-15-

 

-G2시대는 '떠오르는 중국'과  '지는 미국' 으로 요약된다. 키신저를 포함해 세계의 내노라하는 많은 석학이  '팍스 아메리카나' 를 대신하는 '팍스 시니카' 의 도래를 점치는 것이 그렇다. 서양 우위의 시대가 저물고 동양의 시대가 개막하는 징조다.

G2 시대의 경제전쟁은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자칫 방심하면 삼성과 LG도 열악한 소프트웨어로 인해 구글과 애플의 협공에 밀려 소니의 전철을 밟을지도 모를 일이다. 오랫동안 모바일의 최강자로 군림했던 노키아가 애플의 스마트폰 공세에 밀려  퇴출위기를 맞고 있느 것이 그 증거다. 전쟁으로 치면 장수에 해당한느  기업 CEO를 제대로 선발하지 못한  후과로 볼 수 있다.

'무경십서'는 하나같이 "장수가 용병을 잘못해 전쟁에서 패하면 나라의 존망이 갈릴 수밖에 없다" 고 경고하고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글로벌 기업이 경영에 실패해 세계시장에서 퇴출되면 해당 기업은 물론 수많은 관련업체 종사자가 일거에 거리로 내몰리게 된다. 나라도 휘청거릴 수밖에 없다. (........)   G2 시대를 난세의 상징인 춘추전국시대에 비유하고 있다. 역으로생각하면 난세는 춘추전ㄱ구시대의 상황이 그렇듯 무한한 기회가 열려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젊은이들은 뼈를 깎는 자기계발 행보를 하여야 한다.  어느 시대나 어려움은 있었다. 현재의 위기는 지축이 이동한 데  따른 후유증으로 볼 수  잇다. 시야를  더 넓고  크게 확장할 필요가 있다. 우물 안의 개구리 식으로 자탄만 하면 나라의 앞날은 없다. 좁은 한반도를 벗어나 더 넓은 세계무대로 뛰쳐나가야만 한다. 그애야  통일시대 이후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무경십서가 역설하고 있는 것처럼 철저한 준비와 치밀한 계산하에  이기는 싸움을 해야 한다. 최소한 지지 않는 싸움을 해야 한다. 

무경십서 안에는 무수한 지략이 담겨있다. 무경십서를 포함한 동양의 고전은 '지략의 보고' 이다. 시간을 격해 많은 사람이 고전을 읽는 이유다. 동양의 역대 고전에서 지략을 찿아내는 것은 금맥을 찿는  것에 비유할 만하다.곁에 두고 거듭 읽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무경십서에는 위기국면 타개책이 실려있다.

예나 지금이나 난세에는 기존의 가치관 및 관행에 얽매이지 않는 과감한 결단이 필요하다.  무경십서가  임기응변을 역설하는 이유다.(........)  한반도 통일은 G2의 각축 속에서 실현될 수밖에 없다. 육도삼략을 뛰어넘는 수준의 절묘한 대응이 절실하다.  왜냐하면 G2의 중간에 끼어 있기 때문이다.  그 해답을 무경십서에서 찿을 수 있다.-18~20-

 

 

-등소평이  롤모댈로 삼은 사람이 한국의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중국이 G2의 일원이 될 수 잇었던 것은 '불균형발전론'에 입각한 박정희의 압축성장 방식을 철저히 흉내낸 덕분이었다. -37-

 

 

 

- 손무는  제나라 사람으로 제나라를 떠나 오나라로 와 숨어 살았다.

오자서는 손무를 합려에게 천거했다.

"손무는 '육도삼략' 에 정통한 탁월한 전략가입니다. 세상이 그의 재주를 알아주지 않아 은거하고 잇을 뿐입니다. 이 사람을  군사로 삼으면 비록 천하를 대적할지라도 두려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라고 했다. -47-

 

 

 

- 손자병법 목차 ;

1편 시계-싸우기 전에 헤아려라 .

<전략 편>

2편 작전-속전속결로 매듭지어라.

3편 모공-지피지기를 실천하라.

<전술 편>

4편 군형-공격과 수비를 겸하라.

5편 병세-형세를 유리하게 만들라.

6편 허실-적을 혼란스럽게 만들라.

7편 군쟁-유리한 조건을 선점하라.

8편 구변-임기응변으로 임하라.

9편 행군-위험한 길은 가지 말라.

10편 지형-절도 있게 행동하라.

11편 구지-전투방식을 다리하라.

12편 화공-때에 맞춰 공격하라.

13편 용간-첩보전에서 이겨라.  -77-

 

 

-필승을 기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일까? <모공>에 해답이 나온다.

"전쟁을 아는 장수는 일단 출격하면 과단성 있게 행동하고,작전 또한 적의 내부사정 변화에 따랄 무궁히 변화시킨다.   그래서,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승리를 거두는 데 어려움이 없고,천시와 지리까지 알면 적을 온전히 한 채 굴복시키는 전승全勝이 가능하다' 고 하는 것이다." -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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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자병법 :

 

- 위문후'가  '측황' 에게 물었다.

"오기는 지난날 노나라의 장수가 되기 위해 아내를 죽인 자가 아니오? "

'측황' 이 답했다. "신은 다만 오기의 뛰어난 능력만을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그의 성품과 행동에 대해서는 따질 바가 아닙니다."

 

오기는 위나라,정도현 좌씨 마을 출신으로 기원전 440년에 태어나 기원전 381낸에 죽었다.  그가 공자의 직계제자인 증자 밑에서 학문을 닦던 중 제나라 대부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했다.  하루는 증자가 오기에게 물었다.

"그대가 학문을 배운지도 6년이 지났다. 그런데 한 번도 어머니를 만나러 고국에 가지 않으니 자식된 도리로 마음이 편안한가?"

"저는 어머니 슬하를 떠날 때 일국의 정승이 되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라고 했다 (.......)

노목공은  오기를 노나라의 대장으로 삼았다. 오기는 먹고 자는 것은 물론 행군할 때도 말을 타지 않고,사졸이 무거운 무기나 군량을 지고 가는 것을 보면 친히 분담했다

당시 제나라 재상 '전화'는 제나라 장수 '장추' 에게 명하여 오기의 의향을 파악했다.오기는 거짓으로 장추에게 말하고 제나라를 엄습하여 군사를 순식간에 국경 밖으로 몰아냈다. 노목공이 크게  기뻐하며 오기에게 상경 벼슬을 내렸다. 그후 제나라 전화의 이간책으로 노나라 대부들위 탄핵으로 화가 미칠까 우려해 '위나라' 로 달아났다. 

'위문후'가 인재를 아낀다는 이야기를 들은 결과다. 오기는 마침내 위나라 재상'척황'의 천거를 받게 되어  서하 땅의 태수로 임명되자 또 사졸과 숙식을 같이 했고 병사들과 고락을 같이 했다.  -366~370-

 

 

 

-전국시대 초기 위나라는 '위문후' 때 천하를 호령하던 위나라가 '위무후' 와 그의 아들  '위혜왕' 때  약소국이 된 배경 에는 당대 최고의 병가인 '오기' 와 법가인 '상앙' 을 모두 내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위나라 재상 '공숙좌' 때문이다 -375-

 

 

 

-일본은 상앙의 [상군서]를 위시해 [한비자]와 [손자병법] 등을 열심히 연구한 덕분에 막강한 무력을 배경으로 천하를 호령하게 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한반도를 교두보로 삼아 대륙으로 진출하고자 했고,

이후 300년 뒤 메이지유신의 당사자들은 조선을 병탄했다.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국방을 소흘히  하면 이웃나라의 침탈대상이 될 뿐이다. 조선조 사대부들이 왜란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고 유혈당쟁을 벌이다가 나라를 잃고 백성을  일제의 노예로 만든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21세기도 별반 다를 것이 없다. 경제전쟁은 총성 없는 전쟁이다.  이 책이 [손자병법] 뒤에 바로 [오자병법] 을 실어놓은 이유다.

[손자병법] 과 [오자병법]  두 책을 함께 읽어야 보다 큰 틀의 상략과 상술을 찾아낼 수 있다.-378~379-

 

 

 

-역사적인 사실을 감안할 때 손무에 관한 기록이 [춘추좌전]에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오기의 사적은 모든 사서에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어 [오자병법]은  일정 부분 그가 직접 썼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전국시대 이래 현재까지 실전되지 않고 계속 전해져온 것도 이와 무관할 수 없다. 한비자,사마천,반고 등도 지속적으로 [오자병법]을 언급해 왔고, 당태종 이제민과 위국공 '이정' 이 병법 전반에 관해 논의한 내용을 담은 [당리문대]에도  [오자병법]에 괸한 이야기가 대거 실려 있다.

송대에 들어와 사상 초로 편찬된 백과사전인 [태평어람] 에도 [오자병법] 이 대거 인용되어 있다.  이후 북송 원풍 3년에 군사적 필요에 의해  '무경칠서' 가 편찬되는 것을 계기로 [오자병법]은 [손자병법]과 더불어 최고의 병서로 자리 잡게 되었다. -380-

 

 

 

-[오자병법] 에는 어떻게 이길 것인가' 하는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한  것이 특징이다.  [손자병법] 은 첫머리에 병도를 역설한 뒤 전략과 전술 등의 용병술을 차례로 언급하고 잇는데 반해 [오자병법]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사전준비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잇다.  이는 [손자병법] 에서 찾기 어려운 대목이다.

[오자병법] 의가장 큰 특징은 인화를 역설한 데 잇다. <치병>에서느 이를 '부자지병父子之兵'으로 표현해 놓았다.  장수가 병사를 자식처럼 아끼는 군대라는 뜻이다. (.......)    오기는 장수와 사병이 인화를 이루엇을 때 최고의 전투력을 발휘한다.는 취지를 부자지병의 비유에서 찾은 것이다. [손자병법]의 백미가 지피지기와 부전승에 있다면, [오자병법]은 부자지병과 인화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오기가 공명功名을 추구하는 인간의 호명지심好名之心을 통찰한 결과로 볼 수 잇다.

제자백가 가운데 인간의 호명지심이 호리지성 못지않게 강렬하다는 사실을 통찰한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한비자다. (.......)

오기가 호명지심을 호리지성보다 앞새운 것은  집을 나설 때 어머니에게 재상이 되어 금의환향하겠다고 다짐했던 것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본인  스스로 자신의 다짐을 실현하기 위해 평생 부단히 노력한 만큼 호명지심이 얼마난 강한지를 스스로 통절히 깨달았을 것이다. <치병> 에서 '필사즉생必死卽生,행생즉사幸生卽死' 를 역설하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필사의 각오로 싸우면 살아남고,요행히 살아남기를 바라면 죽게 된다 는 뜻이다.

연전연승를 거둔 이순신 장군이 반간계에 걸려  백의종군하다가 정유재란 때 다시 기용되자 12척의 배를 이끌고 나가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 그가 장렬한 전사를 택한 최후의 결전 노량해전은 [오자병법] 이 필사즉생,행생즉사의 가르침을 그대로 좇은 결과로 볼 수 잇다. -383-

 

 

 

-[오자병법] 은 <도국>의 첫머리에 나오는 '위문후' 와 '오기' 의 대화를 제외하고는 모두 오기의 병법해설과 '위무후' 와 오기의 문답으로 구성되어 잇다.

[오자병법] 의 원형이 처음으로 등장하게 된 시기 를 위무후가 즉위하는 기원전 395년에서 오기가 위나라를 떠나기 직전인 기원전 384년까지의 10년 사이로 보는 이유다. -392-

 

 

- 오자병법 제 3편 <치병>

필사즉생의 각로로 임하라 ;

오기가 말했다. 무릇 전장는 늘 산 사람을 시체로 만드는 곳이다. 죽기를 각오한 자는  살고 요행히 살아남기를 바라는 자는 죽는 이른바 '필사즉생,행생즉사' 의 무대인 것이다.  -424-

 

(**참고글 ; 必死卽生 必生卽死 필사즉생 필생즉사 는 이순신이 한 말이 아니라,오자병법 제3편 <치병>에 나오는 말이다.)

 

 

 

 

 

- 즉벽대전의 영웅힌 오나라의 '주유' 는 도량이 넓고,겸양으로 나므을 대할 줄 아는 당대의 영웅이었다. 그의 종조부 주경과 주겨으니 아들 주충 모두 후한 말기에 태위를 지낸바 있ㄷ.  주유의 부친 주잉도 낙양령을 지냈다. 주유 ㄸ한 우너소나 사마의,순울 등에 견주어 결코 뒤지지 않는 명문가 출신이다.-430-

 

 

 

 

- [오자병법] 과 사원자본주의

부자지병과 한마음 경영;

'교세라' 의 한마음 경영은 사원 모두 하나의 공동목표를 향해 함께 돌진하자는 점에서 일종의 '사원자본주의' 에 해당한다. <오자병법> 이 역설한 '부자지병' 정신과 같다.  일본인들은, 중국인이 큰 틀의 전략전술만 언급한 [손자병법]을 좋아한느 것과 달리 전통적으로 [오자병법] 의 꼼꼼한 가르침을 더 좋아했다. -484-

 

 

 

- 오사카 상인과 고객주의 ;

장사꾼 기질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는 일본 전래의 '오사카 상인정신'을 언급한 것이다. 신용을 기반으로 질 좋고 값싼 상품을 고객에게  팔아 상인과 고객이 서로  '윈-윈'  하는 것이 바로 '오사카 상인정신' 의 요체다.-

일본에서는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점포를 '시니세老鋪'로 부른다.오사카에만 이런 시니세가 무려 500개가 넘는다. 일본 전체로는  2만여 개에 이른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일본 기업이 극심한 내수 침체에 허덕이자만 '시니세' 만큼은 끄떡없다. 몸집을 키우는 외형 성장보다 내실을 다시면서 끊임없이 자기혁신을 추구하는 상인정신 덕분이다.

일본에 이처럼 시니세가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공자가 [논어]<위정>에서 역설한 '온고지신' 을 충실히  좇는 덕분이다. 공자는 이같이 말햇다.

"옛것을 익히고 연구한 위에 새것을 알게 되는 온고지신은 가히 스승으로 삼을 만하다."

시니세는 수백 년 동안 같은 사업을 영위한 까닭에 보수적일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현대기업 못지않게 매우 혁신적이다. 시대상황에 맞춰 새로운 제품을 끊임없이 연구하면서 이를 신속히 상품화한 것이 장수 비결이다. 주목할 것은 시니세 기업은 확장보다는 장기 존속에 주력하며 고객만족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시니세 기업정신의 화신이 바로 오사카 상인이다. 

'와키모토 유이치脇本祐一' 가 쓴 [거상들의 시대 豪商tachino時代] 에 따르면 에도시대  당시 오사카에는 쌀을 매개로 한 세계 최초의 선물거래소가 운영되었고, 지금의 은행에 해당하는 금융 시스템이 갖추어 잇었다.  경영전략이란 개념조차 없던 시절에  원가삭감을 유도하는 원가혁신 경영을 추구했다.  포목 등의 상품에 가격파괴와 정찰제를 실시했다.

오사카 상인 가운데 일부는 지방 영주인 다이묘大名 등 권력가와 밀착해 정치력을 키우기도 했다. 에도시대 당시 일본이 중국 및 한국과 달리 '중상주의' 까지는 아닐지라도 농업 못지않게 상업을 중시하는 '농상병중幷重'의  입장을 취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는 오사카 상인들의 위세가 너무나 막강했던 까닭때문이다.

왜 유독 오사카에서만 상인문화가 찬연히 꽃을 피우게 된 것일까?

여러 원인인 있지만 1590년 천하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근거지가 오사카였기 때문이다.  그는 천황이 머무는 교토를 능가하는 일본 최대의 경제권을 오사카에 형성했던 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그는 사실상 일인자임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오사카에 일본의 거상들을 불러모았다. 그리하여 오사카가 그의 치세 때 갑자기 문득  쌀과 생선,야채 등 3대 시장을 중심으로 일본 내 각종 산물의 집산지로 탈바룸했던 배경이다.  쇼군이 머무는 정치 중심지이자 최대 소비도시로 있던 지금의 도쿄인 에도, 천황이 거처하느 문화의 상징이자 직물과 염색 및 장식등  최고의 전통기술을 자랑한 교토, 전국 최대의 미곡시장이자 단 하나뿐인  중앙시장으로 기능하며 천하의 상인을 불러 모은 경제 중심지 오사카를 묶어 천하삼도三都로 부르게 된 배경이다.

17세기당시 서민의 삶을 세밀히 묘사한 [일본영대장日本永代藏 ] 의 저자 '이하라 사이카쿠井原西鶴' 는 거상을 크게  갑부와 재산가,부자로 나눈 바 잇다. 갑부는 대략 7만 섬,재산가는 3만 섬, 부자는 1만 2,0000섬을 소유했다. 조선의 만석꾼은 3등의 부자 수준에  불과했던 셈이다. 당시 일본의 경제규모가 그처럼 컸다.

일본도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코노이케,미쓰이 三井,스미토모住友, 등 3대 거상이 출현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각각 금융자본과 상업자본,산업자본을 대표했다. 이들 모두 현재까지 400년 넘게 대를 이어오며 일본을 대표하는 기업으로 건재를 과시하고 있다.  그러나  에도시대 당시 이들의 신분은 어디까지나 상인과 공인을 뜻하는 이른바 '쵸닌町人' 에 지나지 않았다. 정치와 군사는 사무라이,장사와 물건제작은 상인과 공인이 전담한다는 분업의식이 철저히 적용된 결과였다. 쇼닌은 자부심이 대단하여 '미쓰이' 가문은 후손들에게 사무라이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라는 훈계를 내려 그들 나름의 상인문화와 공인문화를 세심히 가꾸어 나간 것이 일본의 상인정신과 장인정신이 여기서  싹트기 시작했다.

에도시대 말기에 이르러 오사카 상인을 중심으로 한 일본의 신흥 부르주아들은 막강한 재력을 바탕으로 일본의 정계를 주무르기 시작하여 당시 '상인이 화를 내면 천하의 제후도 놀란다'  는 말이 유행했다. 이는 다이묘의 채권자인 오사카 상인을 지칭한 것이다.  다이묘는 말할 것도 없고 쇼군 역시 오사카 상인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정사를 제대로 펴나갈 수 없었다. 오사카 상인들은 신분적으로는 사농공상의 최하위에속했음에도  실질적인 위세는 최상위 신분인 사무라이를 뛰어넘었다. 오사카에서는 사무라이 위에 상인이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 배경이다. 실제로 메이지 유신의 숨은 공로자는 오사카 상인이었다. 거사자금이 대부분 이들에게서 나왔다.-485~487-

 

 

- 장인정신과 상인정신 ;

일본 상인의 상징은 가계 입구마다 내건 '노렌暖廉난렴' 이다.

영업 할 때만 내걸고 문을 닫을 때는 반드시 떼어놓은 까닭에 그 가게의 신용과 품격을 상징한다. 사무라이들이 혈통과 지위등을 드러내는 '가몬家紋'을 목숨처럼 여긴 것처럼 상인들이 자신의  상호를 극도로 중시하는 전통이 있었다.

노렌은  전통과 자부심,신용과 장인정신의 상징이 되었다.  노렌을 귀하게 여긴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일과  가게를 목숨처럼 생각한다는  뜻이다.  노랜을 내린다는 것은 상인에겐 곧 죽음과도 같다.  집단과 신용을 중시하고 업무에 혼신을 다하는 오사카 상인문화는 여기서 나왔다.

오사카 상인문화의 중심지는 센바船場'였다. 선착장이었던 이곳은 물자공급의 중심지이다. 쌀 시장을 중심으로 성장한 센바 상인은 이런 말을 남겼다.  "돈을 남기는 것은 하급,가계를 남기는 것은 중급, 고객을 남기는 것은 상급이다. "  고객인 있는 한 사업은 영원하므로 눈앞의 작은 이익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취지다. 이는 '교세라' 의 사원자본주의를 만들어낸 '이나모리' 의 한마음 경영 정신과 통하는 것이기도 하다.

오사카 상인은 에도시대부터 뛰어난 원가계산.고객중심의 서비스 정신,근검절약, 쉼 없는 학업 등를 체화한 덕분에 천하제일의 상인으로 활약할 수 잇엇다.  오사카의 경제력은  캐나다 전체 규모와 비슷하다. 이런 막강한 경제력을 갖게된 것은 공부하며 장사하는 '석문심학' 에서 비롯된 것이다. ( *석문심학 : 상인출신 유학자 '이시다 바이간' 이의 儒商정신에 기초한 '석문심학' 은 오사카 상인의 상도를 사상 최초로 체계화한 것이다.)

일본은 도쿄의 '간토' 와  오사카의 '간사이' 풍토가 확연히 다르다.  도쿄에선느 반드시 소개를 받아야 비즈니스 상담을 할 수 잇다. 시간도 서구처럼 엄격히 준수한다. 불쑥 사무실로 찾아와 면회를 청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나 오사카에서는 이런 일이 매우 흔하다.

도쿄소재 기업 은 가격을 흥정할 때 상대방을 지나치게 배려한 나머지 확답을 줄 수 없는 경우 응답을 회피하거나 거래 자체를 중지한다. 그러난 오사카 소재 기업 은 주저하지 않고 가격흥정을 직접 요청해온다. 

오사카 상인들은 개업할 때 물건을 원가 이하로 판매한다.지나가는 손님을 충성스런 고객으로 만들기 위한  방안이자만 기본적으로 인심이 후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고사를 지낸 뒤 이웃 가게에 떡을 돌리고 자난가는 손님을 접대하는 것  등과 닮았다. 술집에서  모르는 사람과도 쉽게  이야기를 나눈다. 심심찮게 술잔을 교환하기도 한다. 

 

[오사카 상인정신 강령]

하늘에 해가 없는 날이랄도 나의 점포는 문이 열려 있어야 한다.

하늘에 별이 없는 날이라도 나의 장부엔 매상이 있어야 한다.

메뚜기 이마에 앉아서라도 가게는 펼쳐야한 다.

강물이라도 저당잡히고 달빛이라도 베어 팔아야 한다.

일이 없으면 하늘의 별이라도 세고 바닷가의 모래라도 세야 한다.

손가락 끝에 자라나는 황금 같은 손톱을 무료히 잘라내고 앉았다면

옷을 벗어 힘이라도 팔고,힘이 없으면 혼이라도 팔아야 한다. 

상인은 오직 팔아야만 하는 사람,팔아서 세상을 유익하게 해야 하는 사람.

그렇지 못하면 가게 문에다가 '묘지'라고 써 붙여야 한다.

 

이는 오사카 장인정신 강령으로 그대로 활용할 수 있다.  '수정 테이프' 는 오사카의 조그만 중소기업이 세계 최초로 발명한 것이다.  컵라면과 즉석 카레도 그렇다. 회전초밥도 고객이 원하는 제품을 알맞은 가격에 적기 납품할려는 치열한 상인 정신이 만들어낸 것이다.-488~491-

 

 

- [사원자본주의의 활용]

'소니'를 비롯한 일본의 글로벌 기업들이 피폐를 면치 못하는 이유는 과거의 화려한 성과에 안주하며 급변하는 시대변화에 재빨리 올라타지 못나 한 데 있다.만연한 관료주의가 화근이다.

사원자본주의, 장수와 병사들이 한마음이 되어 단일한 목표를 향해 돌진한다는 점에서 기업목표가 원대하면서도 뚜렷하고,오너를 위시해 말단 사원에 이르기까지 모든 임직원이 기업목표와 경영철학을 공유한 데 잇ㅆ다.

국가총력전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는 21세기의 경제전쟁은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하고 있다. 해당국을 대표하는 글로벌 기업이 무너질 경우나라 전체가 휘청거릴 수밖에 없다.  노키아의 몰락으로 핀란드 경제가 흔들리고 ,소니와 히타치 등이 삼성과 LG에 패퇴하면서 일본의 무역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러난 마냥 좋아할 것만도 아니다. 삼성과 현대기아차 등이 쾌재를 부르며 보너스 잔치를 벌이는 사이, 뒤에서 이들을 성원한 많은 중소기업과 서민이 벼랑으로 몰리고 있다.  납품업체의 부품가격을 후려치는 후진적인 관행이 지속되고, '재벌빵집' 으로 상징되는 시장질서 교란행위를 정부가 제대롤 단속하지 못한 후과다. 지혜를 모아 오너자본주의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면서 그 페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할 때댜. '교세라' 의 사원자본주의에 대한 집중 탐사와 활용이 절실히 필요한 이유다. -492~494-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