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독자들은 역사에 대해 다소나마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역사에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현재의 나는 어디서 왔으며 현재의 생활은 어디서 유래했는가 하는 지극히 일상적인 내용입니디다. 바로 이책은 이런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서술했습니다. 현대 독자들이 알고 싶은 내용을 중심으로 과거의 일상생활과 함께 평민들의 이런저런 개념 및 관념의 기원과 발전을 밝혀보려고 합니다. 이런 것들은 장기적인 변화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으므로 역사를 연구하는 분들은 관심을 가지고 탐구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24-
-버려야 할 중국 중심주의, 스스로에게 전혀 도움이 난 된다 :
중국 문화에는 '존왕양이' 의 경향,즉 중국 중심주의 라든다 중화주의라 하여 주변 이민족을 깔보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그결과 ,중국인의 역사관도 중국 문화를 중심에 놓고생각하는 자아 중심주의의 맹점을 드러내어 무릇 중국 문하는 세계 최고라든가 가장 오래되고 가장 우수하다는 식으로 자화자찬합니다. 이에 따라 중국 이외 지역의 사물에대해서는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으며 중국 문화가 기타 문화와 교류했던 역사적 사실마저 뻔히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언급을 회피하곤 했습니다. 이책이 서술하는 중국 역사는 다양한 외국문하 를 수용하여 복잡 다단한 중국 문화를 이룩하였다라고 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어 저술하였다. 따라소 기존의 논술과는 상당히 다릅니다. 중국 문화의 특색은 그 우수한 문명으로 주변국의 문화를 동화하거나 계발해준 데 있지 않습니다. 중국 문화의 진정한 자랑은 다른 문화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포용력에 있으며
또한 그것을 자기 것으로 소화한 능력에 있습니다. -25-
-東周( 춘추전국 ) 시대에 이르면 '하상주' 삼대는 오랜 옛날 옛적의 유토피아를 상징하는 코드로 승격합니다. '삼대' 가 고유명사로서 출현하기 시작한 시기는 동주시대부터인 듯합니다. (......) 공자는 [논어]<위령공>편에서 '삼대' 를 찬양했는 데, 옛날을 회상하며 서주가 건립되던 시절의 문왕,무왕,주공 등이 보여준 보편적인 가치관과 도덕관념을 미화하여 마침내 하상주 삼대를 일관된 정통 왕조로 여기고 아울러 아름다운 과거를 대표하는 상징적 코드로 규정한 바 있습니다. -132-
-공자는 몰락한 귀족이다. :
공자의 7대조 할아버지는 송나라의 재상이었고, 6대조는 송나라 정치투쟁의 실패자였는제,노나라로 망명한 아버지는 그저 무예가 뛰어난 무사였을 따름입니다. 공자 본인도 정실 소생이 아니라 서자였으며,노나라에서 '사士' 라는 계급에 속했느데,그 지위는 대략 공무원도 아니고 평민도 아닌 어정쩡한 그 중간 계층이었습니다. 공자는 그런 몰락 귀족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인데,그는 봉건 문화를 재해석함으로써 상류 문화의 이상적인 윤리와 도덕이 보편적인 가치와 의미를 갖게끔 만들었던 것입니다. -137-
-齊나라 청동기의 변천사 :
제나라는 강성 대국으로 산동반도에 위치했습니다. 제환공은 춘추 시대 첫째 패권자였으므로 제나라는 경제적으로도 한때 최강이었습니다. 제나라 수도 임치는 춘추전국시대를 통틀어 가장 부유한 대도시였습니다. 훗날 전田씨 가문이 강姜씨를 대체하여 제나라의 왕이 되었느데,이것도 전씨 가문이 재테크에 능하여 재물을 기반으로 정치적인 실력을 키운 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춘추전국시대 제나라의 청동기는 산동성 각지에서 적잖게 출토되었습니다. 그런데 대체적으로 禮器가 차지하는 비율은 말기로 갈수록 적어지고 일용품이 상대적으로 증가하는 추세기 확연합니다. 청동기의 종류와 문양도 갈수록 다채로워졌으며 시간이 갈수록 장식용이나 취미용이 많아집니다. 이러한 추세는 문화의 세속화 경향이 의례적인 엄숙함을 대체했다고 볼 수 잇고,또한 신성함이 점차 범속함으로 변해가는 시대 풍조를 반영한다고 하겠습니다. 제나라에서 보이는 이러한 추세는 사실상 다른 지역에서도 보편적이었습니다. 이는 봉건제도가 해체되고 잇는 추세라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138-
-모든 문명에는 주도적인 사상체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권력이 상 왕조로 부터 주 왕조로 넘어갓는데,낮은 문명의 주 민족이 높은 문명의 상 민족을 이겼다는 사실 하나로도 상 왕조의 지식인들은 깊은 고뇌에 빠졌을 것입니다.(.........) 중국의 북방을 주름잡았던 그토록 강성하던 상 왕조가 도대체 왜 하찮은 주민족에게 패하여 멸망했단 말입니까?그들은 마침내 결론을 내렸습니다. 즉 주 민족이 천명을 얻었으며,그 천명은 오로지 도덕을 기준으로 한다는 이른바 "천명미상,유덕시친天命靡常, 惟德是親" 이었습니다. 이것은 중국 역사상 최초로 등장한 운명론적 명제인데,도덕적 의미가 인간의 의지를 초월한다는 이론입니다. ( ......... )
'천명'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내린 최초의 인물은 공자인 듯합니다. 그 당시 누군가 공자를 박해하자,공자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잇습니다. "하늘이 나에게 천명을 주었다. 하늘이 나를 낳고 임무를 주었다. 나에게 이런 임무가 있는데 나를 박해하는 자들이 나를 어떻게 하겠느냐" 이렇게 본다면 '천명'은 이미 정치적인 사명이 아니라 사람들 각 개개인이초자연적이고 초현실적인 질서 내에서 자신이 반드시 수행해야만 하는 사명입니다. -142-
- 서기 1세기 말에 전염병이 유행하여 '서역' 에서 비단길을 통하여 東漢때 남방.북방을 불문하고 전염병이 발생하였습니다.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로마에서도 안토니누스 역병이 기승을 부렸느데,이것도 동쪽에서 '파르티아' 와 전투하던 로마 군대가 감염되어 환지중해 지역으로 퍼뜨렸을 것입니다. 여하튼 동한 때 전염병이 창뤌하자 '장중경' 의 [상한론]이 출간도었습니다. [상한론]은 중국 의학사에서 획기적인 저서입니다. 중국 지역에서 전염병이 발생한 이후 북방의 인구가 직격탄을 맞아 급격히 줄어들엇습니다. 문화의 중심축이 북방에서 남방으로 기울기 시작한 계기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234-
-두부는 서한 때 회남왕 '유안' 이 발명했다고 전해진다.하지만 문헌상 증거를 찾을 수 없다. 콩류나 맥류를 발효시겨 청국장을 만들었다는 기록은 문헌에 자주 보입니다.-262-
-동한 말기 50여 년의 혼란기를 거쳐 삼국시대로 진입했으며,또한 이민족이 침입하면서 남북 정권이 장기간 대치하다가 마침내 수나라와 당나라가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게 됩니다. -280-
-중국 동북방의 선비족 중에 '탁발'氏는 '북위北魏'를 세웠고,그 뒤로 '우문'씨와 고高씨 가 북위를 분할하여 각각 북주北周와 北齊를 세웠는데 북위.북주.북제를 합쳐 북조北朝로 통칭하는 바,오호십육국으로 난립했던 정권을 통합하여 북방에 정복왕조를 건립했던 것입니다. 수나라.당나라가 중국을 다시 통일했지만 실은 북조의 연속이었습니다. -290-
-당나라 제국도 역사의 무대에서 활약한 배역의 하나였을 따름이다 :
중국 북부,서부지역은 초원 민족들이 번갈아가며 패권을 잡았다.
고거,유연,돌궐,회흘 등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초원을 제패했고,
서쪽에서는 당항,토번,토욕혼 등이 부상했다.
당나라 초기 돌궐 제국 은 세력이 흉노에 못잖앗고,당나라 말기 오대시절에는 거란 이 강국으로 등장했다. 토번 은 서장 고원은 근거지로하여 한때는 대당 제국과 필적했다.
운남성에 다리잡은 남조南詔 는 토번의 속국이었지만 운남성 지역에서는 강국이었다.
회흘 은 서쪽 초원에서 부상했지만 중국과 토번 사이의 교전에 관여할 정도로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엇다.
수나라.당나라가 건립될 즈음에 돌굴 은 중국의 분쟁에 개입히기도 했다. 안록산의 난이 발발했을 때 당나라 왕실은 회흘과 토번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표면적으로 보면 대당 제국이 전성기를 구가할 때 중국의 '기미부주' 는 북쪽과 서쪽 변경에 즐비했다. 또한 이민족장들 대분분은 중국의 책봉을 받았고 중국도 한쪽 이민족을 동원하여 다른 쪽을 공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깊게 연구한면 본질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시기의 중국은 더 이상 이웃 열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중국은 그저 역사의 무대에서 활약한 배역의 하나였을 따름입니다. 바꿔 말한자면 중국을 포함한 여러 강대국들이 각축을 벌이며 성쇠를 반복했던 것이지,중국만이 유일하게 판을 주도한 세력은 아니었습닏자. -294-
-공자시대에 [시경] 300여 수는 이미 정형화되어 상류 지식인들읜 문학 교재였습니다. -313-
-불교에서ㅓ는 불경을 강론할 때마다 우선 이야기 한 토막을 하고 나서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 ) 당나라 중반부터 전기傳奇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가 탄생했다. 이로부터 송나라 話本서설을 거쳐 명나라.청나라 장회章回소설이 나오게 되엇다. -320-
-일본의 나막신은 당나라 때 외출용 신발:
당나라 사람들인 외출하여 길을 걸을 때는 '극'을 신었느데,곧 나막신입니다. ( ..... ) 나막신을 신었던 남쪽 지방는 유행이 변하면서 점차 가죽으로 만든 슬리퍼를 신었습니다. 일본은 당나라 유행을 많이 따랐는데 일본인들이 지금도 나막신을 즐겨 신는 모습을 보면 당나라 때 모습이 그려집니다. -339-
-북위시대의 낙양이나 당나라 때 장안 시가지의 도시는 대부분 사각형 모양르로 구획 정리되어 일목요연했다 일본은 당나라 장안을 벤치마킹하여 헤이안(平安 ) 시대의 나라( 내량奈良) 시가지를 건설했으며,오늘날 일본의 거리 이름에 '정町' 이 많은데 이는 곧 당나라 때 도시 구획의 단위였다. -340-
-당나라의 지방행정단위는 '道'를 일급 행정단위로 삼게 됩니다.당태종 때 전국을 10도로 나누었다가 현종 때는 15도였느데,수도 장안이 있는 경기도景畿道,제2수도 낙양이 있는 都畿道 등 15도로 나누었다. 장안과 낙양은 양대 핵심지로서 이로부터 바퀴살처럼 전국으로 교통망이 펼쳐지며 쪼한 서로 겹쳐집니다.
-사탕수수로부터 설탕을 제조하는 기술은 당나라 초기 인도로부터 전래되었습니다.(....... ) 자기는 중국의 특산품이엇습니다. 유약을 발라 표면을 반투명하게 만드는 제조법은 중국이 발명한 특수 공예입니다. 중국의 자기는 서쪽으로는 남아시아까지,동쪽으로는 한반도를 거쳐 일본까지 수출되었습니다. 중국의 자기는 한나라 때 월요越窯에서 이미 만들었고,수당시대로 접어들자 대량으로 생산되어 유약 사용이나 온도 조절 등의 기술이 한층 발전되었다.( ......... ) 안록산의 난 이후 당나라의 경제 중심은 남쪽으로 이동했고 자기를 수출하는 항구도 모두 남방에 위치했으므로 남방의 자기 공업은 더욱 발전했고 상대적으로 북방은 쇠퇴했던 것입니다. -354~ 355-
-중국의 또다른 특산품은 종이이다. 동한 때 '채륜'이 발명했다고하나,고고학적 으로 발굴된 실물을 확인하면 서한 때 이미 종이가 잇었고,전국시대에 '종이 紙' 로 해석될 수 잇는 한자가 있었습니다. 물론 晉나라 때까지만 해도 종이가 아직 보편화되자 않아 죽간이 여전히 사용되엇으나 수당시대로 접어들자 종이는 이미 보급되엇고,남방 제품이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 ) 종이는 생지와 숙지로 구분됩니다. 중이죽을 만들어 얇게 펴서 말린 것이 생지이고,눌러 으깨고,힘껏 휘젓고,분말을 넣고,아교를 넣어서 ..... 이렇게 만든 것이 숙지입니다. 여기에 물감을 넣거나 금색을 뿌리는 등 가공을 하면 특수 용지가 됩니다. 마지麻紙 같은 경우는 동물의 힘줄을 갈아 넣어서 여간해서는 찢어지지 않으므로 주로 공문서나 조서 에 사용되고,대나무 종이는 가볍고 미끄러워 편지지로 사용되고,밀랍을 발라 담황색으로 물들인 종이는 좀이 스는 것을 방지하므로 책을 만들 때 사용되고,심지어 종이로 옷가지나 갑옷을 만들어 장례용품으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중국의 제지 기술은 한반도와 일본으로 전해졌는데,지금도 한국이난 일본은 전통적인 방법으로 종이를 만드는 곳이 잇습니다. 당나라 현종 시절 '고선지 ' 장군이 751년 탈라스 전투에서 이슬람 연합군에게 패했는데,그때 당나랄 제지 기술자가 생포되어 제지 기술이 이스람 지역으로 전파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사마르칸트 종이는 유라시아에서 명성을 날리며 양피지와 이집트의 파피루스 종이를 대체했고 제지 기술은 유럽 각국으로 퍼졌습니다. -356~357-
-원료 공급이나 상품 판매를 고려하여 동일 업종은 종종 특정 지역에 몰려 산업 단지을 이루기도 햇느데, 이런 추세는 송나라 이후 상업도시가 출현한느 계기가 되었습니다. 내수 시장을 만족시키고도 여유가 잇어서 비단,자기, 종이 등 상품은 해외로 수출되엇고,중국경제는 육로와 해로를 통해 아시아 지역으로 편입되면서 마침내 아시아 경제권이 형성되엇다. 이들 아시아 경제권 내에서는 기술이전도 발생하여 중국은 중앙아시아 지역으로부터 유리제조 기술을 비롯하여 제탕 기술 그리고 포도주 양조 기술 등을 배웠으며,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는 중국으로부터 제지를 비롯하여 도예 기술 및 비단 방직술을 배웠습니다. 특히 한국과 일본은 중국의 기술을 대량 수입한여 그들만의 독특한 전통으로 발전시켜기도 했다 당나라는 이웃 나라와 무역을 진행했을 뿐 아니라 기술 이전도 서로 하면서 마침내 아시아 경제권으로 진입하게 되었습니다. -358-
-이른바 오호五胡(흉노,선비,갈,저,강 ) 정권도 혼혈 국가이다. -360-
-북방 초원의 선비족인 탁발부는 중국을 침략하여 북위北魏정권을 세웠다. 북위 정권은 사실상 중국 북방을 통일한 왕조였습니다. 탁발부나 선비족은 단일 민족이 아니라 이미 여러 민족이 융합된 혼혈이었습니다. 초원의 관례상 강력한 집단이 출현하면 동일한 민족공동체 의식을 구축합니다. 고대의 흉노나 돌궐 그리고 몽골 제국이 모두 그러했는 바, 탁발부 및 선비족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북위가 국가를 세울 때 북방 한족의 협조를 얻었습니다. 선비족 정권도 북방의 한족과 공생 관게를 유지하면서 안정적인 왕조를 이루었고,선비족 문화도 한족 문화와 빠르게 융합되엇다. 북위 '효문제' 가 낙양으로 천도하면서 모든 것을 한족 문화로 바꾸겠다고 선포한 사건은 문화 융합의 절정이어씁니다. 초원 문화가 한족 문화에 끼친 영향도 상당히 깊고 넓었습니다. 바닥에 앉는 생활에서 탁자와 의자 생활로 바낀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문화가 융합되는 과정에서 결혼이 보편적이고그에 따랄 혈연적으로도 더욱 친밀한 관계가 되엇다. 수나라.당나라가 중국을 통일했지만 황실의 혈통은 이민족과 한족의 혼혈이었습니다. -362-
-당나라 왕실이 안록산의 난을 진압하기 위하여 회흘, 토번에게 병력 지원을 요청하면서 이들 이민족 군대가 중국 백성들의 재물과 부녀자를 약탈해도 방관했습니다. 그러므로 안록산의 난이란 서로 다른 이민족들이 중국 내부에서 쟁탈전을 벌인 셈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367-
-그 당시 한반도와 일본은 책봉 관계:
한반도의 세 개 국가는 자고로 중국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고 중국도 수차례 한반도 사무에 관여한 적이 있으며,수당시대에는 두 차례 원정까지 했으나 실패하기도 했습니다. 당태종 이후 한반도는 중국과 왕래가 잦았고 한족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씁니다. 이때부터 한반도는 책봉제도하에서 중국과 가장 친밀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중국의 보호산 아래 있었으므로 일본이 조선을 침략했을 때 중국은 출병하여 돕기도 했습니다. 일본은 독립국이었으나 당나라 책봉제도하에 있었습니다. 일본은 남조의 유송劉宋 정권과 왕래했고,수나라 때부터는 견수사를 파견했습니다. 일본은 645년 다이카 개신大化改新 이후 당나라 제도를 모델로 삼아 법률제도를 정비했다.그리고 중국 문자에 기초하여 그들의 표음문자
'가나'를 만들엇다.이렇게 본다면 한반도를 제외하고 중국 문화의 세례를 가장 많이 받은 나라가 일본이엇다. 동북방 밖의 말갈족은 발해국을 세웠는데,발해국의 정부제도도 당나라를 본떴습니다. 377~ 380-
-일본은 한나라 때 '한위노국왕' 의 금인을 받았습니다. 남조 송나라 때는 일본 조공 사절단이 국서를 가져와 올렸는데,유송은 허락하지 않고 그저 '안동장군.왜국왕' 으로만 허용했습니다.일본은 진작부터 확장의 야심이 있었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일본은 중국을 종주국으로 모시되 중국의 위세를 빌려 인근 지역의 패권을 쥐려고 했던 것입니다. 당시의 책봉제도는 그저 허울뿐인 의식이 아니라 실권을 차등적으로 분배했던 등급 시스템입니다. 당나라의 권력은 유송시대보다 강했으므로 일본에 대해서는 '기미부주'의 직함마저도 허용되지 않았다. 말하자면 일본을 당나라 제국의 제 2권역에놓지 않고 제3권역으로 밀어내 조공을 바치는 속국 정도로 간주했던 것이다. -381~ 382-
-당 제국의 사회는 개방적이어서 외국의 인재들이 능력을 발휘할 공간이 많았습니다. 장군 고선지는 고구려 유민이었고,재상 강공보는 월남인이었으며,조정에서 근무한 조형은 일본인이었습니다. -396-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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