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7년 대통령선거에서 노태우 후보는 '보통사람'이란 캐치워드로 큰 성공를 거뒀다. 국민이 반긴 '보통사람'의 의미는 단순한 '평균적이 인간'이 아니었다. 이승만처럼 너무 악하지 않고, 윤보선이나 장면처럼 너무 어리석지 않고, 박정희처럼 너무 야심이 크지 않고, 전두환처럼 너무 지독하지 않고......문제 좀 일으키지 않아주는,요컨대 천사 같은 지도자를 바란 것이엇다. -9-
-1943.11.28~12.1일의 테헤란회담, 1945.2.4~11일의 얄타회담에 이어 3번 째 포츠담에서 3나라의 정상회담이 있었다. 포츠담, 독일제국의 출발점인 프러시아를 상징하는 도시. 그곳에서 연합군의 실세인 미국,소련,영국의 정상회담이 끝났다.(1945.7.17~8.2) -21-
- 바르샤바의 아름다운 경치를 제일 잘 즐길 수 있는 곳이 어딘지 아세요? ....."바르샤바역 앞의 과학궁전 꼭대기층입니다." -25-
-우리의 반일감정은 폴란드인의 독일에 대한 감정과 비슷한 수준이라 할 수 있겠으나, 러시아에 대한 감정은 그와 차원이 달랐다. (러시아도 폴란드를 침략,'카틴학살' 을 했다.) -26-
-극우파의 눈에 자기들과 다른 사람은 모두 좌파로 보이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1930년대 일본에서도,조선에서도 군국주의 반대자들에게는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모두 좌익의 딱지를 붙였다.-91-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신흥지주층은 전통적 양반 지주의 기반 없이 조선 말기의 혼란속에서 치부의 기회를 잡은 아전과 모리배들이었다. 박경리 [토지]에 나오는 최씨 집안은 도태된 지주이다. -101-
-1945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연합국들에게 해방된 한국의 관리를 맡길 만큼 믿음직한 존재로 인식되지 못하였다. 일본과의 전쟁에서 뚜렷한 역할도 없었고,국내에조직된 지지세력도 없었다-131-
-실제로 식민지시대 초기에 일본 명문대학에 유학한 사람들은 다른 배경 없이도 20대 나이에 언론사와 학교의 간부로 발탁되어 일반 기자와 교사들의 몇 배 되는 봉급을 받았다. 서양에 유학한 소수의 사람들은 유학 사실만으로 명사 대접을 받았다. -135-
-"위기가 곧 기회" 라는 말은 뒤집어보면 "기회가 곧 위기" 이기도 한 것입니다. -140-
-전숙희의 [사랑이 그녀를 쏘았다]에 낙랑클럽 활동 무대의 하나로 나오는 미쓰코시백화점의 댄스홀도 그렇게 만들어진 모양이다. 몇 개 댄스홀이 6만 미군장병의 '여성 수요'를 충족시키는 데 얼마나 효과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후임 지배자(미군)를 편안하고 즐겁게 해주려는 전임 지배자(일본군)의 노력은 눈물겹도록 알뜰하다. ........해방 후의 조선처럼 생산력이 저하된 사회에서 현금은 매우 큰 힘을 가진다. 숙식만 제공해도 수많은 유민을 조직할 수 있고 약간의 용돈만 뿌려도 수많은 시위대를 동원할 수 있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부정선거의 대명사가 막걸리와 고무신 아니었는가. -281-
-박헌영,그는 "절에 가서도 새우젓 얻어먹을" 재간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자신의 약점을 감추고 강점을 최대한 활용하는 능력을 오랜 불법투쟁을 통해 체득했을 것이다. -337-
-미군정은 남한에서 영어를 유일한 공용어로 삼았다. 미군정의 점령통치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결정이다. 한국인을 다스리는 정치라면 한국어와 영어를 함께 공용어로 지정하고 통역제도를 공식화해야 했다. 영어를 유일한 공용어로 했기 때문에 통역제도는 공식화되지 못하고 개인의 필요와 취향에 따라 채용되는 주변적 요소가 되어 엄정한 운영기준이 세워지지 못했다. -340-
-미군이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한 해방정국에서 가장 강격한 생존무기는 단연코 영어였다. 일제시대 때 해외유학을 했거나 국내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 영어를 잘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사람들은 대지주 집안 출신으로 해방 전엔 친일파, 해방 후엔 친미파 노선을 걷는 사람들이엇다. 정당으로 보자면 바로 한민당이 그런 사람들로 구성된 정당이었다.-344-
-1904년11월,이승만은 선교사들의 후원으로 미국 유학을 떠났다. 미국 도착 8개월만네 국무장관과 대통령을 면담했다는 것은 대단한 재간이다. 절에 가서 새우젓 얻어먹는 정도가 아니라 소를 잡아 잔치를벌일 재간이다. 1905년 8월 루스벨트 대통령과의 면담에서 그의 기막힌 수완이 빛을 발했다. 그는 하와이의 한국계 주민 8천명의 청원 대표 윤병구 목사를 수행해서 미국 대통령을 만난 것이엇다. -370-
-카이로선언의 한국 독립 방침에 "in due course" 라는 문구가 들어 있다. 흔히 '적절한 시기에' 라고 번역되는데, 아주 정확한 것은 아니다. '마땅히 거칠 과정을 거쳐서' 라고 하는 편이 낫겠다. -411-
-베트남에서는 1954년까지 프랑스를 상대로 민족주의운동이 진행되었고, 그후에 개입한 미국은 남한에서처럼 극우세력을 강고하게 키워 민족주의를 배제할 기회가 없었다. ........... 남한에는 베트남과 달리 분단고착을 원하는 세력이큰 정치적 역할을 지금까지 맡아오고 있다. 일반국민 사이에도 민족주의보다 국가주의가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분단과 전쟁의 책임이 한국인의 결함이 아니라 외세의 작용에 더 있음으로 "엽전은 안 돼" 하는 자기비하에서 벗어날 근거를 찾고 싶은 마음임을 솔직히 밝힌다. -423-
-......-430-끝. 잘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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