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780 / 이이화의 못다한 한국사 이야기- 이이화 지음

최해식 2019. 2. 24. 18:46

 이이화는 주역의 대가인 也山李達야산 이달의 4째 아들로 1937년 대구에서 태어났다.-1-

출전 ; 야산 이야기 http://cafe.daum.net/hyunboo00/S99y/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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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웅의 아들이 환검인데, 이 환검의 '검'은 곧 임금이라는 뜻이다.  나중에는 단군으로 부렀다.  단군은 '박달 임금'의 뜻을 한자로 쓴 것이다. ........이 환인.환웅.환검이 바로 우리나라의 三神이 되었다. 이 삼신을 때로 三聖이라고 부른다.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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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성은 [한국의 역사상]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남쪽에서 신라에 의한 반도 통일이 이룩되고 북쪽에서는 고구려의 옛 땅에 발해의 건국이 성취되어 우리 역사는 드디어 삼국시대로부터 남북국시대로 접어들었고, 이 남북국시대는 장장 이백 수십 년을 지나 다시 고려 시대로 바뀐 것이다. -35-


- 중국에서는 발해를 '바다 동쪽의 훌륭한 나라[海東盛國]' 라고 칭송해 마지않았다. 발해는 이렇게 230여 년 동안 이어지다가 끝내 북쪽에서 일어난 거란족에 의해 멸망하였다.      발해의 멸망은 우리 역사에서 큰 비극인 셈이다. .......만주의 길림성과 요녕성 일대에는 발해의 많은 유물이 발견되고 있다. 지금도 황해의 위쪽을 발해만이라 부르고 있으며,  옛 동경성에는 발해의 거대한 궁궐터가 남아있다. -38-


- 지금 중국에서는 고구려,발해를 예전 중국의 지방정부로 역사책에 쓰고 있다.  이에 맞서 우리는 예전의 기록과 정신을 되새겨 발해 역사를 우리나라 역사로 깊이 새김질해야 한다. 

과거 역사를 철저히 인식하는 태도가 역사를 가진 민족의 바른 태도이기 때문이다. -39-


-욕설의 역사 ;

'염병할 놈' = 장질부사 같은 전염병이 한 번 휩쓸고 지나가면 온 마을 사람들이 모조리 죽어 페허가 되었다.  그러니 이 염병을 얼마나 무서워했겠는가? 염병을 앓으라고 한다면 저주와 다름이 없었다. 조선 후기에 와서는 이 욕이 가장 많이 유행했었다. -52-


- 아무리 재주와 능력이 있더라도 천한 신분을 갖게 되면 벼슬자리에 오를 수도 없었고 선비의 班列반열에 낄 수 없는 것이 당시 사회현실이었다.   -57-


-유구國이 고려와 조선시대에 계속 교류했다는 기록은 [고려사] 나 [조선왕조실록]에 자세히 전해온다. 특히 허균이 살았던 시대에 식자들 사이에 널리 읽혔던 [표해록]에는 지은이 崔簿최부가 제주도에서 표류하여 중국의 남쪽 지방을 거쳐 북경을 통해 다시 조선으로 건너온 이야기 속에 유구국 이야기가 나온다.  당대 식자층인 허균은 [표해록]을 읽어 유구국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홍길동도 실존인물이었고 17,18세기에는 도둑들이 대지주를 터는 일이 흔히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율도국이 유구국을 상정하고  그렸다는 것은 하나도 이상할게 없다. [홍길동전]이 조선 후기에 꾸준히 인기를 유지해온 것은 그 사실성과 긴박성에 있다. 이 소설은 당시 사회의 모순을 어느 소설보다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71-


- 예리한 눈으로 후금을 지목한 광해군 ;

1592년 세자로 책봉되어 分朝분조를 맡으면서 광해군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비참한 현실을 눈으로 보았다. 우리의 군사는 아무 쓸모가 없엇고 민생은 도탄에 빠져 있는 현실을 보며 명나라 군사들의 지휘에 꼼짝달싹 못하는 나라의 힘을 보면서 광해군은 통탄했다.  難이 끝나자 명나라에 대한 조선의 사대의례는 더욱 지성스러워졌고, 再造字小(=나라를 다시 만들어주고 작은 것을 사랑해준다는 명에 대한 은혜) 의 은혜의식은 이 나라 선비와 지배자들의 정신 속에 팽배해 있었다.  이런 가운데 광해군은 왕위에 올랐다.  -73-


-1621년 요동이 후금의 손에 함락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광해군은 후금과 명나라, 또 조정의 신하들로부터 끊임없는 시달림을 받았고, 광해군은 1623년 인조반정으로 왕위를 내놓을 때까지 버티었다.-80-


- 후금은 명나라를 치기 전에 후환을 없앤다는 정책으로 1636년 조청전쟁 곧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이때 조정은 쑥대밭이 되었고 무수한 살육을 부른 끝에 치욕의 항복을 했다. 이 두 전란 때 광해군은 강화도와 교동도에 유배되어있으면서 이런 현실을 지켜보았다.  이때 광해군의 심경은 어떠했을 까?

성호 이익은 조일전쟁 때 명나라가 원병을 보낸 것은 명나라의 방어를 위해서였으므로 지나친 은혜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바로  사대 모화주이자들에 대한 경고의 의미를 담고 있다 하겠다. -82-


- 광해군의 국제질서에 대한 감각은 최명길에게 온전히 전해졌다. 최명길은 두 나라의 정세르 개인의 노력으로 세밀히 파악하여 주화파라는 비난을 한몸에 받으면서도 강화를 성립시키기에 온 힘을 기울였다.

광해군은 인조가 삼전도에서 항복한 뒤 제주도에 갇히는 몸이 되었다.   조정이 광해군이 후금과 내통할까 의심하여 멀리 바다 한가운데로 보낸 것이다. 광해군은 이 땅의 임금 중에서도 자주와 자립을 추구한 보기드문 군주였다.  그의 이런 정책 때문에 사대 모화주의자들에게 쫓겨나 외로운 섬에서 생을 마쳐야 했다. -83- 


-정약용은 '조심하고 두려워하라' 는 뜻으로 堂號당호를 '與猶堂'여유당 이라했다. -94-  


-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공동체의 이익을 놓고 경쟁하면서 상대 집단을 가차없이 몰아 붙이거나  자기 집단의 이익을 위해 패거리를 지었다. 이것이 굳어져 파벌을 낳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파벌은 조선 중기에 고착되어 조선 말기의 안동 김씨,풍양 조씨, 여흥 민씨등의 세도정치에까지 이르렇다. -102-


- 조일전쟁때 전라도 사람으로 첫째가는 공로자들인  김덕령,정충신,김천일고경명은 모략에 걸려 죽거나 공도 인정받지 못하는 서러움을 겪었다.-117-


-1861년(철종11년) 전라도 유생 수백 명이 과거장인 성균관 주변에서  시위를 했다. 왜냐하면 과거가 특정 지방과 특정 문벌에 의해 좌지우지될 뿐만 아니라 온통 부정으로 치러지고 있었고 호남지방 응시자들에게는 온갖 제약이 가해졌기 때문이다.  입신양명을 위해 청춘을 바쳐 글공부를 하여 실력을 뽐내보려고 해도, 실력으로 합격하는 경우는 드물었다.-119-


-허균의 논리대로 豪民호민이 주동이 되어 일어났던 농민봉기의 원인은 무엇일까?

첫째는 19세기 후반기에 심해던 지배층의 부패요, 둘째는  전정과 군정과 환곡을 다스리는 삼정의 문란이요, 셋째가 민중의 자각이다.-139-


- 동학농민전쟁의 주체세력은 신분에 따라 몰락양반, 퇴직관리,일반 평민,노비,백정 등이 참여했고, 경제 수준에 따르면 중소 지주,소작농,소상인, 머슴, 무뢰배들이 참여했다.  다만 현직관리,전통 유림,대지주,객주 등은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160-


-우리동포들은 만주땅 두 곳을 중심으로 모여 살았다.  하나는 서간도로  압록강 너머 유하현 같은 산악지대이다. 이곳에 무관학교와 많은 독립단체들이 모여 있었고, 이회영,김동삼,이상룡 같은 지사들이 활동하였다.  다른 하나는 북간도로 용정지역이다. 지금은 연변이 중심지이지만 그때는 용정이었다. 홍범도,김좌진,이청천등의 연합독립군이 일본군 수백 명을 몰살시켰다. -178-


-1939 년 국민당의 장개석 정부는 일본군이 계속 서쪽으로 압박해오며 무한을 점령하자 수도를 중경으로 옮겼다. ........조선의용대는 1938년 무한에서 발족한 독립군이었다. 의열단 출신을 주축으로 항일 전선에 나서게 하였는데 총사령은 김원봉이엇다.  일제가 무한을 점령하자 이들은 중경으로 근거지를 옮겼고 그곳에서 2년 동안 활동을 벌였다. -186-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시일야 방성대곡](=이 날에 목을 놓아 통곡한다)을 써서 나라가 망한 사실을 알렸다가 일제에 의해 구금되었다. .....안국선은 [금수회의록]을 써서 약육강식의 국제 현실을 비판했다.  장지연은 말년에 곡필을 하며 불행하게 죽었고, 안국선은 편안한 삶을 누리다가 죽었다. 이들의 행동은 지식인 지사에 흐집을 만든 역사의 불행이었다.  인간의 지조는 세월이 말해준다. -196-


-일제 식민통치 35년 간은 인간의 지조를 시험하는 모진 기간이엇다. 사람은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을 때 참모습을 보이게 된다.  정인보 ,한용운 같은 분들의 지조는 역사를 밝게 한다.  이 나라의 지사였던 사람이 모두 친일 부역배로 변신했다면 역사가 얼마나 비참했겠는가?   위당은 밝은 세상을 만나 그의 지조에  대해 높임을 받았지만, 만해는 끝내 조국 해방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198-


-전통시대 아동교육에서 [동몽선습] 과 [통감절요]는 필수 과목이었다. [동몽선습]은 6~7세용으로 앞에 오륜을 말하고 뒤에 중국 역사의 개략을 설명한다.  [통감절요]는 8~13세용으로 춘추시대 이후부터 당.송까지의 역사를 쓴 [자치통감]을 줄여 놓은 것이다   어릴 적부터  우리나라 역사를  가르치지 않고  중국 역사를 먼저 가르쳤던 것이다.  -200-


-[삼국사기]는 유교적 사대 사관에 철저하였고 신라 중심적이어서 고구려와 발해의 북방 경영이나 백제의 일본 진출에 대해서는 아주 무시하였다.  [고려사]는 고려의 북방 의지를 소흘히 다루고 불교적 통치방식을 감정적으로 비판하고 고려 말의 여러 상황을 왜곡,오도하였다. -201-


-진주한 미국군은 곧바로 군정 실시하면서 건국준비위원회와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부역배들인 총독부  관리와 경찰들을 요직에 등용하였다. 이런 일은  윤치영, 조병옥, 장택상 같은 민족주의 우파들의 도움을 받으며  진행된 것이다. 또 많은 미국유학 출신을 통역관으로 활용했다. 이들 통역관은 단순히 통역만 한 게 아니고 미묘한 문제를  야기시켰고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나 이권 챙기기에 열중했다.-209-


- 조선시대 기초적인 교과서인 [동몽선습]에서도 중국역사를 먼저쓰고 끝에 우리나라 역사를 간략하게 덧붙여 놓았을 정도이다. 17세기에 들어서 이익,안정복,박지원,정약용 등은 자주적인 역사를 강조하였다.......특히 박지원과 그 일파들은 尊明排凊존명배청의 사대가 허위 날조임을 여지없이 폭로하였다. -253-


-外柔內强과 柔能制剛유능제강의 사고 체계를 이룬다. 자연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의 조화를 꾀하며,뜯어고치는 것이 아니라 기운을 이용하려 하는 것이다. 우리의 초가 지붕과 그 가옥 구조가 그렇고  산과 강이 웅장 장려하기보다 부드러움과 굽이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의 옷은 곡선으로 감싼 듯이 되어 있으며, 음악이나 춤에서도 가락과 사위가 모두 연연하고 부드러움으로 넘어간다. 이것은 외유내강으로 표현되며 유능제강으로 사고의 체계를 이룬다.-259-


- 우리 민족이 약소하고 국토가 좁다고 하여 큰 것만을 좋아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중국과 러시아,미국은 큰 나라이지만 나라이름에 大자를 붙이지 않는다. 한국과 영국, 일본은 작은 나라이지만 大자를  붙인다. 열등감의 발로나 자기 과시는 실질과 거리가 멀다. -266-


-........-267-끝. 잘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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