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살아있는 한국 현대사1권 1945~1959 "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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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배는 내 곁에 있다.
진시황의 아버지 자초를 왕위에 올리는 데 결정적인 역활을 한 사람이 여불위다. 당시 여불위가 자초를 보면서 한 말이 ' 奇貨可居기화가거 ' 이다. 기이한 물건은 미리 차지해두는 것이 좋다 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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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이유 ;
우리 힘이 미약했기 때문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항하여 나라를 지키고 유지할 국력이 없엇다. 남의 나라를 침략하는 사람들이 나쁘지만, 자기 나라를 지킬 힘이 없는 것도 자랑할 일은 아니다. ......이웃이 도둑 심보라면 문단속을 잘해서 도둑질을 예방하는 것도 이웃끼리 화목하게 사는 방법이다.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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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식민지에서도 경제가 성장했다는 주장은 일견 당연하다. 하지만 누구를 위한 성장이냐가 중요하지 않겠는가. 과연 식민지 백성, 한국인을 위한 성장이겠는가? 당연히 식민지 본국과 일본인을 위한 성장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일본의 유력한 정치인들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한국의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 는 망언을 서슴지 않았다. 일본은 한일 국교 정상화 회담 과정에서도 식민지 지배에 대한 청구권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국가 차원의 사죄도 없었다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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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전범 국가지만 진정한 사죄와 나치 시대 역사 청산으로 이웃 나라의 신뢰를 얻는 독일과는 대조적이다. 과거의 잘못을 되돌릴 수는 없어도, 철저한 반성을 통해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수는 있다.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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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외국어를 배우는 이유는,
수단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다. 영어를 배움으로써 선진 기술과 지식을 습득할 수 있다. 외국인과 의사소통이 가능하고, 시장을 개척하여 우리가 만든 물건을 팔 수 있는 길도 생긴다. 외교 관계에서 우리의 이익을 지킬 수도 있다.
영어는 세계와 교류하는 수단이고, 나아가 세계에서 우리의 이익을 지킬 수 있는 무기다.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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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광용이 쓴 단편소설[꺼삐딴 리]가 있다. '꺼삐딴'은 러시아어로 대위를 이미하는데, 리(이인국 박사)란 인물이 친일파에서 친소파로, 다시 친미파로 변신해가는 이야기가 잘 그려졌다. 해방 후 한국에서는 '꺼삐딴 리' 처럼 친일파가 친미파로 변신했고, 그 한가운데 영어 열풍이 있었다. ........미군정 고위층은 친일파로 의심받은 지주 출신 유학파들이 요직을 차지했고, 그 아래는 일제강점기 친일 관료들이 재빠르게 변신해 다시 중요한 직위를 차지했다. 이들은 미군과 가까워지기 위해 밤새워 영어 공부를 했다.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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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敵産은 적의 재산이란 뜻으로, 일본이 우리나라를 지배하면ㅅ 확보한 집과 토지,공장,건물 등을 말한다.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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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탁통치안은 루스벨트가 심취한 신 식민지 통치방식이다. 그는 미국 역사에서는 위대한 대통령인지 몰라도 우리나라의 운명과 관련해서는 상당히 고통스런 결과를 안겨준 인물이다.-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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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경찰은 한국민을 억누르고 독립운동가를 탄압한 민족 반역자들이다. 그들은 해방된 나라에서 다시 경찰이 되어 공산주이자를 때려 잡는다며 독립운동가들을 잡아 고문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나중에 월북하는 김원봉 같은 거물 독립운동가조차 일제강점기 자신을 고문한 경찰(노덕술 수도경찰청 수사국장)에게 다시 잡혀가 수모를 겪고 분통을 떠뜨렸다.-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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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미국에서도 자신이 중심이 되지 않으면 상대를 헐뜯고 비판하는 패권적인 태도를 보여 문제가 되었다. 이런 태도는 해방 정국이나 대통령이 된 다음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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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9년에 출발한 상하이 임시정부는 1920년대 중반이후 독립운동 세력의 정파 간 노선 갈등과 파벌 싸움으로 거의 해산 위기에 처하지만 김구는 포기하지 않고 임시정부를 끝까지 지켜냈다. -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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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정치파동 ; 출전 http://busan.grandculture.net/Contents?local=busan&dataType=01&contents_id=GC04200970
1952년 7월4일 경찰과 군인들이 국회의사당을 포위한 가운데 헌법 개정안이 통과되었다 -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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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은 패망과 함께 한국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했으나 한국전쟁으로 반전의 계기를 마련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1960년대 이후 한국에 대한 영향력을 점차 회복했다. .......일본에게는 한국전쟁이야말로 호박이 덩굴째 굴러 들어온 것이나 마찬가지다.우리 민족에게는 엄청난 재앙이 일본에게는 복덩이라니,이웃의 화가 나의 복이 된 경우다.-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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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6월28일 새벽2시 40분경에 진행된 한강교 폭파는 인민군을 저지하기 위한 작전이라고 한다. .......6월30일 대전으로 피신한 이승만 대통령이 국민에게 사과문을 발표해야 한다는 국회의 결의를 전달하기 위해 찾아간 신익희 국회의장과 장택상.조봉암 부의장은 뜻밖의 말을 들었다. 이승만은 "내가 唐 덕종이야?" , "내가 왜 국민 앞에 사과해? 사과할 테면 당신들이나 해요" 라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이승만의 이런 태도는 우민관(백성을 어리석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 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상하이 임시정부 시절부터 자신은 최고 지도자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고, 해방 후에도 자신이 대통령이나 되는 것처럼 행동했다. 정부 수립 후 대통령이 되어서는 국민 위에 군림하는 통치자라는 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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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교 폭파의 희생양, 공병감 최창식 대령 ;
8월28일 국방부는 한강교 폭파의 책임을 물어 공병감 최창식 대령을 체포했고, 9월21일 사형선고와 함께 처형했다. 당시 한강교 폭파의 지휘 계통은 신성모 국방장관, 장경근 국방차관, 채병덕 참모총장, 김백일 참모부장, 최창식 공병감으로 이어졌다. 이들 가운데 아무 권한도 없는 말단 현장 책임자에게 책임을 덮어씌운 것은 정말이지 무책임하고 비겁한 행위다. ..............최창식 대령의 미망인은 12년 뒤 재심을 청구했고, 최 대령은 1964년 무죄를 선고받아 사후 복권되었다. 이로써 한강교 폭파와 초기 혼란의 책임에 대한 법적.정치적 판단은 무산되고 말았다. 이 문제는 역사적 심판으로 남았을 뿐이다. -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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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시기 남한에서 적어도 수십만 명이 무고하게 히생된 것은 분명하다.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어야 했을까? .........흑백논리에 따른 편 가르기와 인간의 광기다. 우리 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사고와 인간의 광기가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이는 데 기여했다. -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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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정치파동 ; 출전 http://busan.grandculture.net/Contents?local=busan&dataType=01&contents_id=GC04200970
부산 정치 파동은 1951.11.30일 정부가 직선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하면서 시작되어 이듬해 7.4일 군과 경찰이 부산의 임시 의사당을 포위한 가운데 국회의원들이 기립 투표로 발췌 개헌안을 통과시키기까지 과정을 설명하는 용어.이다.
1952년 7월4일 경찰과 군인들이 국회의사당을 포위한 가운데 헌법 개정안이 통과되었다 -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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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때나 실업은 고통스럽다. 일을 하고 싶어도, 일할 능력이 있어도 일자리를 얻지 못한다는 것 정말 괴로운 일이다. 1998년 외환위기와 IMF 구제금융으로 우리 사회에도 실업자가 양산되었다. -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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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욕망;
어떤 이는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으며 그것이 인간을 발전ㅅ키는 원동력이라고 주장하는 가 하면, 어떤 이는 인간의 욕망은 사회적으로 필요한 범위에서 제어 가능하며 그렇게 되어야 인간 사회라는 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다고 말한다. 욕망이나 욕구가 인간의 변화와 발전에 중요한 동력이나, 거기에만 의존할 때 인간 사회는 탐욕과 무한 경쟁의 아비규환이 될 수 있다. -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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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경쟁하지 않고 살 수는 없다. 어디를 가든 경쟁이 있게 마련이다. .......치열한 경쟁도 문제지만, 경쟁이 없는 것도 문제가 된다. 경쟁이 없으면 발전이 더디기 때문이다. -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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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진 정치가 계속되는 곳에서는 정적을 박해하거나 테러를 가하는 일이 일상적이다. 해방 정국에는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 같은 사람들이 정치테러의 희생양이 되었고, 이승만 정부에서는 김구와 조봉암이 정치적 희생양이 되었다. 박정희,전두환 정권에서는 김대중이 박해를 받으며 죽음의 고비를 넘나들었고, 장준하는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이명박 정부에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정치적 박해와 수모를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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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붕은 3.15 부정선거의 원흉으로 지목되어 4.19혁명 발발에 실질적인 원인 제공자가 되었다. 이승만의 양아들이며 그의 친아들인 이강석이 권총으로 일가족을 살해하고 자살함으로써 이기붕 일가는 비극적 최후를 맞았다. 이기붕은 1896년 충북 괴산에서 태어났다. 보성고보를 졸업한 뒤 연희전문에 입학했으나 생활 형편 때문에 중퇴하고, 선교사의 도움으로 상하이에 갔다가 미국으로 건너갔다. 1923년 미국 아이오와 주 테이버 대학 문과를 졸업하고 뉴욕에서 [삼일신문]을 발행에 참여하면서 이승만과 인연을 맺었고 1934년 귀국하였다. -346-
-1959년 사라호태풍이 한반도 남단을 강타하다.
9월16일 오후 9시부터 9월18일 새벽2시경 울산을 거쳐 동해로 빠져나갈 때까지 2~3일 동안, 아니 실제로는 단 두 시간 동안 태풍이 끼친 피해는 상상을 초월했다. -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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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후 베이비 붐 세대는 1955년경 부터 시작된다. 해마다 10만 명이 넘는 제대군인들이 사회에 나왔고, 1959년 부렵에는 제대군인 숫자만 70만 명 정도 되었으니 한국 사회에는 신생아가 그야말로 쏟아졌다. ........그들은 먹을 것 없는 세상에 태어났지만 그래도 축복받았다. 생명이란 귀한 것이고, 자기 먹을 것은 타고난다고 믿던 시절이니까. 그렇게 태어난 세대는 오늘날 은퇴 세대가 되었다. 이들과 함께 한 세대가 흘러가고 있다. 1959년은 베이비 부머들과 더불어 흘러갔다. 그러나 1959년이 지나면서 우리 역사에도 새로운 지평이 열린다는 것을 그때 누가 알았겠는가.-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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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8-끝. 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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