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756/ 이순신-이봉수 지음

최해식 2018. 12. 9. 17:37

- 1589년 정여립의 역모사건(기축옥사)으로 1천여 명이 죽고 국론이 분열되는 최악의 상황까지 벌어졌고 조정은 더욱 극심한 혼란에 빠져 일본의 침략에 대비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41-


-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당시 경상좌수사는 박홍이었다.  그는  왜군이 쳐들어 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중과부적이라는 핑계를 대고 좌수영성을 이탈하여 竹嶺죽령까지 도망을 쳐 버렸다. -46-


- 일본군의 침략을 가장 먼저 확인한 곳은 다대포 응봉(부산시 다대동 산31-2)에 있는 봉수대였다.  당시 봉수대의 책임자인 '이등'과 '서건' 등이  1592.4.13일 오후 4시 무렵  90여 척의 왜선이 대마도를 출발하여 경상 좌도의 추이도(다대동 쥐섬) 를 지나 부산포로 다가 오는 것을 발견하고 가덕진 첨사 전응린과 천성보 만호 황정에게 다급히 상황을 알렸다.  1592년 4월 13일 다대포 응봉에서 바다를 관찰하던 봉수군들은  왜군의 침입을 알렸고,그렇게 7년의 임진왜란이 시작되었다.-60-


- 한강을 방어하던 도원수 김명원은 임진강으로 퇴각했고, 부원수 신각은 유도대장 이양원을 따라 양주로 가서 함경도에서 온 병마사 이혼의 원군과 합세하여 해유령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1592년5월16일 양주에서 파주 광탄으로 넘어가는 고개인 해유령에서 이뤄낸 전투는 임진왜란 최초의 승리였다.  그러나 도원수의 허위보고로 선조는 신각을 참형에 처한라는 명령을 내렸고, 해유령전투의 승리보고를 접하고서는 사형집행을 정지시켰으나, 신각은 이미 사형을 당한 후였다.-69-


- 1592년 5월7일 옥포해전을 필두로, 7월8일 한산대첩에서 연전연승하여 남해의 제해권을 확보하면서 적의 해상 병참선을 끊어버렸다. 이는 임진왜란의 전세를 바꾸는 전기가 되었다. -72-


- 고니시의 부하였던 요시라는 1597년1월11일 경상우병사 김응서에게 접근하여 가토가 서생포로 올라오는 날짜와 시간을 알려주며 이순신을 시켜 가토 함대를 공격하라고 제안했다. ........1597년2월6일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하고 체포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이순신은 2월26일 한산도에서 체포되어 3월4일 서울의 의금부 전옥서에 구금되었다.   -83-


- 다시 시작된 전쟁;

정유년 재침에서도 선봉으로  나선 '고니시' 는 두모포(기장)로 상륙하여 2월에 부산의 옛 진영을 점령하고 장기간 머물 계획을 세웠다.  또 다른 선봉장인 '가토' 는 기장에 주둔했다가 양산을 거쳐 서생포(울산)로 들어가 진을 쳤다.........겨울이 닥쳐오자 진로를 봉쇄당한 일본군은 10월부터 남해안으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퇴각한 일본군은 울산에서 순천에 이르기까지 남해안 곳곳에 성을 쌓고 주둔했다. ........하지만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미 1597년8월18일에 병사한 상황이었고, 일본군은 이를 철저히 비밀에 부친 채 도요토미의 유언에 따라 철군을 서두르고 있었다........명나라 장수 유정은 9월20일 순천의 '고니시' 군을 공략했고, 이순신과 진린은 해상을 봉쇄하고 왜군과 수일간 격전을 벌였다.  다급해진 '고니시'의 구원 요청을 받은 시마즈가 사천성에서 병선 500여 척을 이끌고 1598년 11월18일(양력12.15) 밤 남해 노량으로 습격해왔다. 그리고 임진왜란 최후의 결전인 노량해전이 시작되었다. 밤을 새워 싸운 이순신은 다음 날 아침 승리를 눈앞에 두고 관음포 앞바다엣 적탄에 맞아 전사했다.  그러나 승리했다.  이로써 동아시아  전체를 휩쓸었던 임진왜란은 끝이 났다. -84- (*** 나는 400여 년 전의 전쟁사실에 흡뻑 빠져들어 있어봤다. 난 어떻게 그 당시의 사실을 실감나게 알 수 있었을까?  바로 그 때의 기록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정말 주요하구나!. 라고 새삼 실감한다. )


-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은 고군산도(군산시 선유도) 에서 12일 동안 머물렀다.  이순신이 선유도에 머물던 기간 중에도  일본 수군은 이순신 함대를 추격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 수군의 동태는 '강항'이 쓴 [간양록]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강항은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전쟁이 끝난 후 1600년에 풀려나 조선으로 돌아왔으며  일본에 주자학을 전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03-


- 바다에는 하루에 두 번씩 밀물과 썰물이 교차한다.  바닷물의 수위에 따라 1물부터 15물까지로 구분하는데,  매달 8일과 23일은 반달이 뜨는 날로 15물인 조금이고,  보름과 그믐에는 8물인 사리가 된다.  조금 때에는 조수 간만의 차가 크지 않지만, 사리 물때에는 밀물과 썰물이 크게 움직인다........대표적인 경우가 사리 물때를 만나면 유속이 엄청나게 빨라지는 명량의 조류 흐름을 이용한 명량해전이다.  -134-


- 전쟁이 진행될수록 의병들은  관군으로 편입되었고 의병장에게는 임시 벼슬이 내려지기도 했다. 하지만 전쟁 말기에는 이들이 쿠테타를 일으킬 것을 두려워한 조정에서 의병장들을 兎死狗烹시켰다김덕령이 장형을 받아 곤장을 맞고 사망했다.  곽재우도 산으로 은둔해버렸다-158-


- 전장에서 굶어 죽거나 얼어 죽은 대표적인 예가 1598년1월29일의 울산성 전투이다.  조명 연합군은 울산왜성을 포위하고 고사작전에 들어갔다.  식량이 바닥난 가토 기요마사 부대는 말을 잡아먹고 물이 없어 오줌을 받아 마시다가 갈증을 못 이겨 성 밖으로 물을 가질 나온 왜병들이 매복해  있던 조명 연합군에게 사살당하였다.  가토 기요마사는 자결할 생각까지 했으나 가까스로 달려온 구원병들의 도움으로 생명은 부지할 수 있었다. -160-


- [난중일기] 를 보면 이순신만큼 날씨를 세심하게 관찰한 장수도 없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1594년 1월1일부터 5일까지의 일기를 보면 같은 비라도  "비가 퍼붓듯이 내렸다" , "비는 그쳤으나 흐렸다" , "비가 계속 내렸다"  라고 매일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161-


- 임진왜란 발발 사실을 최초로 관측한 곳이 다대포  응봉의 봉수군이다.  1592년 9월1일 오전에 화준구미를 지난  조선 수군은 대대포에 이르러 적선8척을 격파했다. -198-


- 부산포해전 ;

1592년 9월1일 부산포해전에서 그들의 본거지를 위협하여 돌아갈 길을 염려하게 했으나, 그날 선봉에 서서 싸웠던 녹도 만호 정운이 전사했다.   다대동 몰운대에는 정운 장군의 충절을 기리는 순의비가 있고  부산포해전이 벌어졌던 양력 10월5일을  '부산 시민의 날' 롤 지정하여 기리고 있다.  -201-


- 배설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도방어사 조경의 휘하 군관으로 참전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는 경상우수사로서 원균과 이순신의 지휘를 받았다. 전란 중에 신병을 이유로 잠적하여 참형을 받았지만, 그 뒤 그가 쌓은 무공이 인정되어  선무원종공신 1등에 추증되고 사면복권되었다. -226-


- 부산 영도다리 아래의 좁은 목이 초량목이다. 

   부산포해전에 나오는 초량목해전이 있었던 장소는 영도다리 아래의 좁은 협수로인 원초량을 말한다. -259-


- 역사는 반복하면서 발전한다.  임진왜란과 같은 위기는 언제라도 다시 닥쳐올 수 있지만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을 이순신 장군으로부터 배운다면 역사는 더욱 진보할 것이다. ........한신대첩에서 이순신에세 참패한 왜장 아키자카 야스하루는  이 세상에서 가장 미운 사람도 이순신이고, 가장 존경하는 사람도 이순신이고, 만나서 차 한 잔 하고 싶은 사람도 역시 이순신이라했다. -290-


-.............-291-끝.잘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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