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759/ 부산은 넓다.- 유승훈 지음

최해식 2018. 12. 23. 21:04

- 교린의 뜻으로 세운 왜관 ;

조선은 1426년(세종8년) 부산포,내이포,염포 등 三浦를 개방하고 왜관을 설치해 쓰시마의 왜인들이 교역을 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하지만 임진왜란으로 조선은 쑥대밭이나 다름없었다. 7년에 걸친 전쟁은 끝났지만 그 상처는 참혹해 재건을 위해서는 전란기만큼 힘든 세월을 보내야 했다. -65-


-조선 조정은 전란 시 끌려간 3,500여명의 포로 송환을 위해 교류가 재개되자 1607년 지금의 수정동 자리인 두모포에 왜관을 설치하고 두모포 왜관이라 불렀다. 초량으로 왜관이 옮겨간 뒤에는 古館 혹은 舊館이라 불렀다. -66-

▼ 조선후기 화가 卞璞변박이 그린 부산 초량의 왜관도

초량왜관의 면적은 약 10만 평에 달했고, 약 500명의 쓰시마 사람들이 상주하고 있었다. -202-[일본인과 이순신-이종각 지음]

 

- 나는 하루에한 번씩은 약조제찰비 곁을 지나친다. 그때마다 이 비석에 적힌 조문에 따라 사형에 처해졌을 사람들이 떠올라 섬뜩하다.  이 비석은 1683년 일본에 통신사로 갔던 윤지완이 쓰시마 주와 전문 5개조에 달하는 약조를 체결하고, 그 내용을 비석에 새겨 조선과 일본 측에 각각  세워둔 것이다. 부산박물관의 비석은 원래 守門에 세워진 조선 측의 비석으로, 용두산 공원 동쪽에 잇다가 1978년 옮겨왔다. 이 비석의 5개 조문 가운데 3개 조문이 모두 사형에 처한다는 내용이다. -89-

약조제찰비▼


- 왜관으로 조선인들이 모여든 것은 朝市때문이다  朝市조시는 왜관의 관문인 守門수문 밖에서 열리는 아침 시장으로 왜관의 특성과 생활상을 잘 드러내준다. ......守門은 왜관의 정문으로 [초량왜관도]를 보면 바로 해안가와 접했고  남북 방향으로 설치되어 있다.     이 수문 밖에서 쌀,과일,채소, 생선 등 식료품을 파는 아침 시장은 조선인과 일본인들이 자연스럽게 부딪칠 수 있는 장소였다. 아침 시장에서의 계속된 만남을 통해 조선인과 일본인들은 단골관계를 맺었고, 상대국의 생활 문화를 이해하며 이웃에 전파했다. 아울러 이러한 교류는 지극히 인간적인 만남으로 싹텄다. -90-


-'죽기전에'라는 상업적 전략 대신에 긍정적 마케팅을 제안해 본다면 '태어나서 꼭'   '살아서 꼭' 이라는 수식어가 더울리지 않을까?

나는 부산의 마을 중에서 '살아서 꼭' 이라는 말을 붙여 관심을 끌고 싶은 아름다운 동해안 어촌이 바로 기장군 죽성리 두호마을의 뒷산 황학대정상에 있는 '국수당' 이다. 국수당은 두호마을의 제당이다. 국수당은 마을의 수호신인 할배신에게 마을의 평안과 풍요를 비는 제사를 지내는 장소다.  .......동해안 별신굿은 두모포영과 같이 사라져버린 역사가 아니라 여전히 두호마을에서 '살아 있는' 민속이기에 우리가 살아서 꼭 봐야 할 전통 축제인 것이다. -132-(출전) http://blog.daum.net/chscoral/1437


-국수당은 거대한 해송에 포위되어 있었다.  거목 사이에 지어진 국수은 멀리서 보면 마치 하늘로 뻗은 나뭇가지 사이에 새가 둥지를 튼 모양새다.  이 조거수는 수령이 약 300년으로 추정된다.

두호마을은 조선시대 군사요충지였다. 동해안을 관찰할 수 있는 탁 트인 조망 덕에 수군 기지인  豆毛浦營두모포영이 이곳에 있었다. 두모포에서 보면 동래와 울산으로 가는 배들의 동태를 자세히 감시할 수 있다.   뛰어난 조망 덕에 왜선을 감시하고 자 한 두모포가 되레 적들에게 이용당하기도 했다. 왜장 '구로다 나가마사' 가 수천 명의 백성을 동원해 두모포 진 성 위에 왜성을 쌓은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두모포영이 동래현 수정동 바닷가로 옮겨가면서 두모포라는 이름도 가져갔다.  이제 두모포 옛 지명의 자취는 두호마을에서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134-

(출전) 죽성리 왜성 http://blog.daum.net/chscoral/1436

         두모포 왜관  http://blog.daum.net/chscoral/2210


- 강릉단오제는 국가적 축제를 넘어 세계 문화유산으로 인정을 받은 반면, 기장의 동해안별신굿은 아직 축제 현황에 이름조차 올리지 못했다.  나는 지역축제로서 동해안별신굿이 훨씬 가치가 높다고 본다. 왜냐하면외부의 힘에 기대지 않고 마을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이 굿을 전승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149-


- 양중은 남자 무당을 뜻한다. 세습무인 김석출 양중은 세습무로서 지독한 학습과 반복을 통해 무업을 배우기 때문이다. 따라서 "석출이네 짚누리는 3년만 되면 춤춘다"는 말은 그저 우스갯소리가 아니다.-158-


- 장면총리가 나서서 다방과 요정을 출입하는 공무원을 색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952.5.8일의 단속 결과에 따르면 191명의 공무원이 적발되었는더ㅔ, 그 가운데는 모 부서의 차관을 비롯해 고위직 공무원도 적지 않았다. -184-


-태백산 지역이 우리나라 메밀 재배의 적지로 알려졌다. 강원도에서는 이 메밀국수를 막국수라 일컬으며, 일본에서는 소바라 한다. -242-


-우암동 시장에서 내호 냉면집을 하는 1대 주인은 이영순 씨,2대 주인은 정한금 씨로 둘은 모녀사이다.  두 모녀는 1950년 흥남 철수 때 고향을 등지고 남쪽으로 피란을 내려왔다. ......밀가루와 전분을 3:1로 만들어 팔았는데, 정한금 씨는 이 냉면을 밀가루가 들어간 냉면이라 해서 밀냉면이라 불렀고 성질이 급한 부산 사람들은 밀냉면을 줄여 '밀면'이라 했다. 이처럼 밀가루와 전분이 적당히 섞인 밀면의 탄생은 시대가 만들어낸 사회상, 사람들의 입맛과 선택이 버무려진 결과였다. 서로 다른 문화가 만나서 상호 작용해 만들어내는 문화변동을 흔히 '문화접변' 이라 한다. -257-


- 냉면과 밀면은 면발을 제외하며고느 주재료에 있어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橘化爲枳귤화위지의 고사성어처럼 강남의 귤을 강북에 옮겨 심으면 탱자가 되는 법이다. 귤과 탱자 사이에는 기후와  토양의 문제가 잇듯이 흥남의 냉면이 부산의 밀면이 된 배경에는 전쟁과 피란 등의 역사적 아픔이 배어 있다. -259-


- 직장생활을하면서 '풀 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 거의 2년간은 숱하게  노래방에 다녔다. -330-


- 세상사 어쩐 일이든 '보는 것은 쉬우나, 느끼는 것은 어렵다.'

고구마가 쓰시마에 상륙한 때는 1715년 인데 앞선 사절단들도 고구마를 봤을 법한데, 그들은 이를 구해서 조선으로 보낼 생각은 못 했으나, 조엄은 '사스나포' 에서 고구마를 보자마자 종자를 구해 부산진으로 보냈을 뿐난 아니라 귀로에서도 고구마를 구해 동래로 가져갔다. 이처럼 조엄이 유심히 고구마에 관심을 갖고 종자를 구한 까닭은 백성의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문익점의 목화 전파를 예로 들면서 고구마 종자가 조선에 퍼진다면 백성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라고 말했다. 조엄은 1757년 동래부사와 1758년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하면서 대일본 외교 실무를 쌓은 일본통이었으니 이미 고구마의 존재를 알았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앎에 비해 행동는 한 차원 승화된 것으로 조엄의 적극적인 구원 행동은 높은 '애민정신' 에서 비롯된 것이었다-342-


- 고구마는 古貴麻에서 온 것을 추론된다.  조엄이 쓰시마에서 들어 채록한 이름이'고귀마'였고, 이로부터 '고구마'로 변음된 것이다.

조엄은 1763년 10월에 쓰시마의 사스나포에 도착하여 고구마를 ㅁ 보자마자 바로 두어 말을 구해 부산진을 보내어 종자로 삼게 했다. 다음은 귀로 때인 1764년6월에 다시 쓰시마의 고구마를 구해서 동래의 교리배들에게 보내줄 예정이라고 했다. -347-


- "처음처럼"

처음으로  가졌던 마음을 돌아보고 잊지 말라는 격언이다.

고구마 시배지인 영도의 해안가에 2014년까지 [조엄-조내기 고구마 시배지 역사공원]을 설립한다고 했다. 이 역사공원이 조엄과 강필리의따뜻한 위민정신을 느낄 수 잇는 장소가 디기를 바란다. -357-


-........-427-끝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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