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렬한 민족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한국 사회는 근현대의 일본 학자들이 만들어낸 임진왜란상을 직.간접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인식하려 하지 않고 있다. -7-
- 히데요시는 關白(=天皇대신 정치를 행하는 직책) 직을 조카 히데쓰구에게 물려주니 세상사람들이 히데요시를 다이코(太閣=관백 자리를 자제에게 물려준 사람) 라 불렀다. -17-
- 하야시 라잔이 편찬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보]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쟁 선언문이 실려 있다. 일본은 명.조선으로부터 여러 차례 침략을 받아왔기 때문에 명. 조선을 공격하는 것은 정당한 전쟁 즉 '征伐' 이라는 것이다. -26-
- 17세기 3대 임진왜란 문헌이라고 하면 오제 호안의 [다이코기], 하야시 라잔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보], 호리 교안의 [조선정벌기]이다. 이 세 문헌 가운데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키고자 결심한 시점을 가장 이른 시기로 잡은 것은 [조선정벌기]이다. -39-
- 에도 시대 일본인들의 정신에 자리한 임진왜란관 및 한국.중국관에 결정적 영향을 준 것은 고문서가 아니라 이들 대중적 문헌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필자가 에도 시대의 베스트셀러 출판물을 주목해 임진왜란을 이해하고자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43-
- [도요토미 히데요시보]를 집필한 하야시 라잔의 3남 '하야시 가호' 가 쓴 [정한록] 에도 '진구코고神宮皇后의 삼한 정벌' 이래 진구코고가 수립한 한반도와 일본열도 사이의 주종관계가 흐트러지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를 재정립했다는 시각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임진왜란과 통신사의 방일을 테마로 한 수많은 문헌을 관통하는 일본 측의 통설이다. .......신화 시대에 수립되었다고 여겨진 국제질서를 회복하는 전쟁으로서의 임진왜란. 이것이 바로 근세 일본의 임진왜란 문헌에서 神宮皇后가 언급되는 이유다. -56-
- 한양에 집결한 일본군은 이여송의 구원군을 맞아 1593년 1월말 벽제관에서 일전을 벌인다. 이것이 근세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일본인들이 일본군 초대의 승리로 간주하는 벽제관 전투이다. -118-
- '아마노 겐에몬 사다나라' 역시 [다치바나 조선기]에서 벽제관 전투를 "일본과 고려와의 전투의 승패를 판가름하는 전투" "일본과 고려가 자웅을 겨룬 전투" 라고 평가한다. 이렇듯 일본 측은 벽제관 전투를 1597년의 울산 전투 및 1598년 의 사천 전투와 함께 임진왜란의 3대첩으로 규정한다. -119-
-한국에서 임진왜란 3대첩은 진주대첩.한산도대첩,행주대첩이다-121-
-제2차 세계대전 패전이후 현대 일본사회는 임진왜란이 진행되던 당시부터 19세기 말에 이르는 3백여 년간 인구에 회자되어 온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는 적어도 일본 사회의 표면에서 사라졌지만 일본 우익들의 발언이나 중세 전국시대의 유행 속에서 마치 발작처럼 불쑥불쑥 되살아나고는 한다. 이들 이야기는 일본인 자신들도 똑바로 쳐다보고 ㅅㅍ싶어 하지 않는 일본의 또 다른 일면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ㄳ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인의 눈으로 근세 일본인들이 향유한 임진왜란 이야기를 살펴보는 일은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임진왜란에서 오늘날에 이르는 일본 사회를 바라볼 중요한 도구를 손에 쥘 수 있기 때문이다. -223-
- [구로다 가보]의 저자 가이바라 엣켄은 "남이 나라를 착취하고 사람을 많이 죽이는 것을 武라고 할 수 없다" 라고 해서 도요토미 ㅎ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을 비난한다. 그리고 "하늘의 도는 낳는 것을 좋아하고 죽이는 것을 미워하며 착한 것을 복주고 악한 것을 벌주신다" 선악의 응보는 필연적이다. 옛날부터 일본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사람을 많이 죽인 장군은 반드시 ㅈㅂ집안이 멸망하고 자손이 끊긴다. 하늘의 도는 무섭도다. 전쟁에 임해서 사람을 죽이는 것은 할 수 없이 그리하는 것이다. 살사람을 죽이는 것을 좋아함이 아니다" 라고 해서 조선 침략이라는 악행ㅇㄹ 저지른 대가로 하늘의 벌을 받아 도요토미 가문이 멸족했다고 논평한다. -126-
-정유재란의 책임을 일본 지식인들은, 특히 일본 유학자인 '가와구치 조주'은 [정한위략]에서 간신 이덕형이 완세자 진=임해군 을 일본에 보내는 것을 간신 이덕형이 저지하자 없던 일로 했다" 는 [明使紀事本來]의 대목을 인용한다. 그런 뒤에 '히데요시' 는 다시 군대를 일으키면ㅅ 조선이 왕자를 보내지 않았음 명분으로 삼았다. 그런즉 조선이 다시 침략을 받은 것은 간신 이덕형 때문이다. 이같이 제1차 침략과 제2차 침략 모두 조선 측에서 원인을 찾는 것은 근세 일본 임진왜란 문헌의 특성이다. 그리고 일본의 저자들이 이렇게 당당하게 조선 책임론을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은 [양조평양록] [무비지] [명사기사본말] 같은 명 측 문헌에 이러한 주장이 실려 있기 때문이다. 명의 임진왜란 문헌에서는 문란하고 무능한 조선의 정치와 조선국왕 선조의 음란함, 류성룡.이덕형 등 간신의 발호로 조선이 일본을 막지 못했기 때문에 명나라 군대가 조선을 구해준 것이라는 주장이 되풀이 된다. 조선을 구원한 것이 명나라라는 의도를 강조하는 것이다. -166-
- 명의 [양조평양록]과 일본의 [조선정벌기]에서는 조선 수군 원균이 명군과 합류해서 일본 수군의 거점을 치려고 했는데 김응서가 이 정보를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알리는 바람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당시 김응서는 의령의 육로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의령일대는 일본인과 섞여 일가와 같았다' 는 구절이 있어서 마치 김응서가 고니시와 내통하는 스파이인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긴다. 이러한 불신과 의심을 받은 사명당과 김응서 모두, 침략 전쟁의 무대가 되었으면서도 명과 일본이라는 두 외국군 사이에서 시달리던 조선 관민의 처지를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진다.-178-
- [양조평양록] [무비지] 등의 명 측 문헌도, 조선은 국왕 선조와 류성룡,이덕형 등의 관료, 병사에서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총체적으로 무능했다고 비난한다. 예컨대 조선으로 파견된 제독 '양호' 는 조선국왕에게 전략을 누설한 '김응서' 를 파직시키라고 다그치고는 '조선신민은 전쟁을 할 생각이 없고 게으르다. 명나라에서 수만 명의 군대가 이렇게 오랫동안 외국에 나와 고생을 하는데도 국왕 이하의 자들이 창을 베개 삼아 臥薪嘗膽할 뜻이 없다.' 라고 책망했다. -185-
- 정유재란 때 일본군이 가장 크게 곤욕을 치른 전투는 1597년 12월에서 1598년 1월 사이에 전개된 울산성 농성전이었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압도적인 수의 조선.명 연합군에 포위되어 굶주림에 시달렸다.-193-
- 1597.2 ; 일본군의 재침
1597.7 ;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 전사
1597.8 ; 황석산성 전투, 남원성 전투
1597.12 ; 울산 전투(~1598.1)
1598.8 ;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1598.10 ; 사천전투
1598.11 ; 순천전투, 노량해전
1600. ; 세키가하라 전투 -238-
-............-240- 잘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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