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168춘추전국의 영웅들2 -신동준 지음

최해식 2014. 9. 27. 05:11

-2권 목차 :

6.관중 ; 부조리한 봉건질서를 허물다.

7.손숙오 ; 겸양의 자세로 백성을 섬기다.

8.자산 ; 정나라를 열국의 중심으로 만들다.

9.안영 ; 소신과 기개로 군주를 보필하다.

10.오자서 ; 약소국 오나라를 반석에 올리다.

11.범리 ; 나설 때와 물러날 때를 알다.

 

-세상의 모든 이치가 그렇듯이 한쪽이 깊어지면 그 반대되는 경향도 깊어질 수밖에 없다. 

마치 산이 높으면 계곡 또한 깊어지는 것과 같다. 

만일 조조가 덕까지 갖췄을 경우 더 많은 인재들이 그의 휘하에 몰려들었으리라 . 

물이 지나치게 맑으면 고기가 모여들지 않듯이 재덕을 모두 겸비한 완전무결한 인간에게는 사람이 접근하지 않는다. ............

.......  유비는 기본적으로 학문 등을 열심히 닦지 않아 재才가 부족했다.

전장에서조차 손에 책을 놓지 않던 조조와 대비된다.  -14~ 15-

 

-[노자 ]은 <도덕경>에서 대기만성을 역설했다.

그릇이 작으면 빨리 채워진다.

小器에 채워진 재주는 小才에 불과할 뿐이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  대기는 규모가 큰 만큼 다 채우려면 오랜 시간이 걸란다.  말 그대로 大才는 오랜 숙성기간이 필요하다.  세상에 차고 넘치는 인물은 소의에 얽매인 小才이다.

어느 시대나 대의에 입각한 大才란 드물게 마련이다. -27-

 

-맹자] 는 <고자 상>에서 학문에 대한 기본 입장을 밝힌다.

" 인은 사람의 마음이고   의는 사람이 가야할 길이다.

그 길을 따르지 않고 마음을 잃은 채 찾을 줄 모르니 애처롭다.

사람들은 닭과 개를 잃어버리면 곧 찾으려 한다.

하지만 마음은 잃은 채 찾을 줄 모른다. 

학문을 하는 길은 다른 게 아니다.  그 마음을 찾는 것이다. "

 

[순자] 첫 편에 편제된 <권학> 첫머리에 나오는 글이다.

" 학문 연마는 평생 그치지 않아야 한다. 

청색은 남색에서 취하나 남색보다 더 푸르다.

얼음은 물이 얼어 생긴 것이나 물보다 더 차다.

학문을 하면 사람이 되고 학문을 버리면 짐승이 된다.

학문하는 데 스승을 가까이하는 것보다 나은 방법은 없다. " -31-

 

-현재까지 [관자][논어] [한비자]등은 제왕학의 기본서로 꼽는다. -34-

 

-유비는 제갈량과의 만남을 이른바 수어지교 에 비유했다.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과 같다는 뜻이다.

명군과 현신의 만남 ,   그 효시가

1] 제환공과 관중 이다. 

이어서

2] 진문공과 조최,

3]초장왕과 손숙오,

4]오왕 합려와 오자서

5]월왕 구천과 범리

6]진목공과 백리해 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다.-44-

 

-정나라 재상 '자산' 은 공자보다 1세대 앞서 태어나, 공자의 사상적 스승이며 군자의 모델로 삼았다.

공자는 도인인 제자 '안연(안회) 의 말을 들은  이후에 고개를 끄덕이며 뒤느게 깨닫는 모습을 보이는 '모자란 스승' 에 불과했다. 

일부 학자들이 '안연' 을 두고 장자 사상의 효시로 간주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107-

 

-정나라가 수시로 강대국의 침략을 받는 약소국 신세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부국강병이 필요하고 형정의 주조를 통한 강력한 법치가 불가피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정나란는 종기를 앓는 아이와 유사했다.  자산이 세족은 물론 백성들로부터 원성을 크게 들으면서도 법치에 기초한 부국강병책을 강력 추진했던 이유다.-121-

 

-약소국 정나라는 晉과 楚 양대 강국의 틈새에서 무수한 침략ㅇㄹ 받으며 심한 고초를 치르고 있다.

자산은 이런 위기상황에서 집정의 자리에 올랐다.  이후 그는 20여 년 동안 부국강병 을 추구해 마침내 내우외환에 시달리는 패망위기의 정나라를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며 자주독립을 이룬 강소국으로 털바꿈시켰다.  이는 기적에 가까웠다.

뛰어난 리더십을 지닌 지도자르 만나면 아무리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 처한 나라일지라도 크게는 천하를 호령하는 강대국이 될 수 있고 작게는 열강이 얕보지 않는 강소국을 만들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123-

 

-[한비자]<외저설 좌상>의 대목이다.

" 정간공 때 자산은 정사를 맡은 지 5년이 디자 나라 안에 도적이 없어지고 길에 흘린 것을 줍는 자가 없고 복숭아나 대추 등 과일이 거리에  주렁주렁 열려 있어도 따가는 자가 없고 송곳을 길에 떨어뜨릴지라도 3일 안에 돌아오고 3년 동안 흉년이  들어도 백성이 굶주리는 일이 없다. "

또한 [사기]<순리열전>에서

정소공 이 총애하던 재상 '서지' 때는 나라가 어지러웠다.  이후 시간이 흘러 자산이 재상이 되자 1년 만에 소인배들의 못된 장난이 사라졌고 노인들은 무거운 짐을 나르지 않게 되었고 어린애들은 밭을 갈지 않게 되었다.  2년 후에는 시장에 외상으로 물건을 파는 사람이 없어졌다.  3년 후에는 밤에 문을 잠그는 일이 없어졌고 길에 떨어진 물건을 줍는 자가 없게 되었다.   4년 후에는 농구를 논밭에 두고 귀가할 수 있게 되었고  5년 후에는 척적(군적 등의 호적) 이 필요 없게 되었다." 라고 했다.

 

[한비자] 와 [사기] 모두 자산이 정사를 잘 펼친 덕분에 백성들이 태평한 세월을 누리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126~ 127-

 

 

-길에 떨어진 물건조차 손을 대는 일이 없는 순박한 民風을 태평성재의 징표이다.  이것이 道不拾遺도불습유. 이다-127-

 

-과거 중국의 문화대혁명 때 균빈을 이상국 건설을 위한 과도기로 호도하면서 이념투쟁에 매진했다가 세계 최빈국으로 전략한  적이 잇다. 개발과 혁신을 치부致富와 연결시키는 고리를 봉쇄한 탓에 철밥통이 유행했다.  등소평의 개혁개방이 이뤄지지 않았다면 지금쯤 중국은 철밥통의 횡행으로 백성들이 사방으로 이산하면서 군벌이 다시 등장해 서구 열강의  반식민지 상황 이 되었을 공산이 크다.

모택동이 문화대혁명을 부인한 등소평을 임종에 즈음해 후계자 반열에 올려놓는 고육책을 쓴 것은 군벌의 등장에 따른 악몽의 재현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성리학이 지배하던 시절의 균빈과 20세기 공산국가의 균빈은 필연이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남한보다 우위에 있던 북한이 21세기에 들어와  이밥에 고깃국을 자상낙원의 구체적 모습으로 선전하고 있는 현실이다.

 

구한말에 조선을 내방한 서양 선교사들 눈에 조선의 백성은 나태하고

게으르기 짝이 없는 백성들로 보였다.    열심히 농사를 지어봐야 겨우 식구들이 입에 풀칠하는 수준의 나락밖에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래 게으른 게 아니라 소수의 사대부들이 부를 거머쥐고 백성을 궁지로 몰아넣었기 때문이다.  이들 모두 철밥통 문화 속에서 暴富를 즐기는 殘賊에 지나지 않는다.  -129~ 130-

 

 

-기원전 496년 정나라의 현상  ' 자산 ' 은 대부 ' 유길 ' 을  불러 말했다. " 덕이 있는 자만이 관정寬政.으로 백성을 복종시킬 수 있소.  그렇지 못한 사람은 猛政으로 다스리느니만 못하오. 무릇 불은 맹렬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두려워하므로 불에 타 죽는 사람이 많지 않소,   그러나 물은 유약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친근하게 여겨 쉽게 가지고 놀다가 물에 빠져 죽게 되오   그래서 관정을 펴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오. "  라고  말했다.  -131-

 

-정나라와 한반도 :

'자산' 이 집정할 당시 정나라가 처한 상황은 현재의 한반도 상황과 별반 차이가 없다. 

'자산' 이 집정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정나라가 아침에 진나라에게 복종하다가 저녁에 초나라를 따르는 식의 朝晉慕楚 의 기회주의 외교를 했다. 

'자산' 은 조진모초의 기회주의 외교를 고치기 위해  먼저 진 . 초 양국의 내정을 면밀히 검토했다.  그들이 정나라에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

또 정나라가 해줄 수 있는 게 무엇인지를 따졌다. 

진나라는 겉으로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사실은 실리를 더 챙겼다.  허장성세로 기세싸움을 벌이면서 초나라와의 정면충돌을 최대한 피했다. 

'자산'은 우선 초나라의 소외감을 풀어주고 대접하는 쪽에 초점을 맞춰 정중한 내용의 외교문서를 작성했다.  이에 초나라는 크게 만족 하였다. 또한 진나라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려 교역과 민간외교를 확충나가 기존의 동맹관계를 다지며 신뢰를 더욱 두텁게 쌓았다.  이로인해  진나라가 정나라의 친초 행보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초나라의 자부심을 만족시켜주면서 동시에 민간외교를 적극 활용해 진나라를 만족시키는 절묘한 책략 을 구사한 덕분이다.  이것이 從晉和楚 책략 이라 부른다.

한국도 종진화초 책략을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반룡부봉攀龍附鳳 연미연중聯美聯中 책략이다. 어디가 용과 봉황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용봉을 동시에 올라타는 것이다.  올라타는 주체는 한국이다.

중국이든 미국이든  어디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정말 중요한 것은)   올라타고 가는 것이 장땡이라는 말이다. 

 

미국과 중국의 관심은 양측 모두 서울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저 한다.

미국통의 목소리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역효과 또한 커진다.  중국의 서울에 대한 경계심과 반감이 그것이다. 

논리와 계산에 익숙한 살람은 외양보다 실속을 중시한다.  미국이 이 경우에 속한다.  '자산' 이 진나라를  대할 때 이런 식으로 접근했다. 

 

종합적인 관점에서 볼 때 연미는 작은 목소리로 진행되는 게 바람직하다.  연중은 오히려 목소리를 높일 필요가 잇다.  이는 중화의 역사문화에 익숙한 중국 수뇌부들의 서울에 대한 경계심을 풀 수 있는 중요한 책략이다

중화는 이익보다 명분을 중시한다.  과거 약소한 공물을 받고 이보다 몇 배나 이익이 나는 상사賞賜를 하사하는 조공무역이 중화질서의 기본 축  으로 작동한 것이다. 

 

'자산' 은 초나라의 체면을 최대한 살려주어 초나라가 정나라와 진나라의 전통적인 우호 관게에 시비를 걸지 않도록 만들었다.  "실리를 중시한 진나라" 에 대해서는 무역과 민간외교의 활성화를 통채 눈에  보이는 이익을 주고, "명분을 중시한 초나라" 에는 정중한 외교언사로 자부심을 만족시키는 방법 으로 난제를 해결했다.  -132~ 135-

 

 

-사마천은 춘추전국시대에 등장한 현상 중 '안영' 을 가장 높이 평가했다.

" 안자가 다시 살아난다면 나는 비록 집편( 말채찍을 들어 마부 노릇을 함) 을 할지라도 이를 흠모할 것이다. "    사마천이 안영ㅇ르 얼마나 사모했는지 능히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안영이 사직과 백성을 위해 군주 앞에서 범안간쟁을 했기 때문이다.  한무제 앞에서 범안간쟁을 했다가 궁형을 당한 사마천의 심경을 투사한 결과로 보인다.   이는 관중을 관자로 칭하지 않고 굳이 관중으로 표현하고 반대로 안영을 안자로 높여 표현한데서 잘 드러난다.  -160-

 

-아무리 뛰어난 신하가 곁에서 보필할지라도 군주 자신이 뛰어나지 못하면 일정한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

군도와 신도는 손바닥이 마주쳐 소리가 나는 것  처럼 서로 호흡이 맞아떨어져야 한다.  그나마 제경공이 나름 동방의 패권을 과시하게 된 것은 ' 안영 ' 덕분으로 볼 수 있다.  -182-

 

-'사마양저' 가 지었다는  병서 [사마법] 은 현재까지도 전해진다.

 

안영은 사마양저를 천거했다.  제경공은  사마양저를 발탁해 장군으로 임명하여 연나라와 진나라 연합군의 침공에 나가 싸우라하고

대부 '장가' 를 시켜 전군을 감독하게  했다. 

그러나 사마양저는 약속에 늦게 나온 장가를  군법에 의거 참형 시키고 진군하여 연 . 진나라 군사를 물리치고 개선하자 제경공은 사마양저에게 군사권을 통괄하는 대사마의  벼슬을 내렸다.

안영과 사마양저는 제니라의 두 기둥으로  활약했다. -183~188-

 

-[오자서열전]에 초평왕의시신에 300번 채찍질을 하자 오자서의 오랜 친구인 '신포서' 가 힐난하자, 오자서가 회답한다.

" 나는 복수할 시간이 없을까 걱정했소.  해가 이미 서산에 기울어졌는데 아직 갈 길이  많이 남아 있는 것과 같소 .  그래서 나는 급히 달려가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행한 것이오.  이를 어찌 도리를 가지고 논할 수 있겠소. "

여기서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다는 뜻의 日暮途遠 성어가 나왔다.  이후 늙고 쇠약한데 해야 할 일은 많다는 뜻 으로 전용되었다. -259~ 260-

 

-공자는 [논어]<자장> 에서 이같이 언급했다.

" (군자인 ) 신하는 군주에게 간할 때 반드시 신뢰를 받은 이후에 간 한다. 신뢰받지 못한 채 간하면  군주는 자신을 비방한다고 여긴다. "

공자는 간언이 지니고 있는 이중성을 통찰하고  있었다.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 는 우리말 속담은 바로

이를 지적한 것이다.  신뢰받지 못한 사람의 중재와 충고는 오히려

 역효과 를 낳을 수 있다. 

 

[한비자]<세난> 은   오자서처럼 잘못된 설득방법을 택한 자들의 위험성을 이같이 경고했다.

" 군주가 아무래도 그만두지 못할 일을 신하가 억지로 그만두도록

 간하면  곧 목숨이 위태롭다. "

 

오자서는 주군인 부차의 신임을 얻은 후 차분히  설득할 생각을 하지 않고 오직 극단적인 수단으로 설득했다가 죽음을 당한 것이다. 

 오만했다고 평할 수밖에 없다. -274~ 275-

 

-세상에 영원한 1등은 없다.

노력하기에 따라서 꼴찌도 1등이 될 수 있다.  스스로를 끊임없이 채찍질하며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는 게 비결이다. 

꼴찌나 다름없는 동쪽 변방의 오 .월은 치열한 경쟁 속에 서 부국강병을 달성해 마침내 천하를 차례로 호령했다.  부국강병을 범추는 순간 이내 상대국에 먹힐 수밖에 없다는 절박감 이 이런 일을 가능하게 했다. 

약 100년간에 걸쳐 진행된 오월시대는 꼴찌가 1등 국가가 되고 돌아가며 1등을 차지했던 4강국이 오 . 월에게 수모를 당한 시기 로 해석할 수 있다. 

범리는 오자서와 더불어 오월시대 최후의 현상 에 해당한다.

책사의 행보에 초점을 맞출 경우 오월시대를 ' 오자서와 범리의 대결 시대 ' 로 간주해도  큰 오류는 없다.  -282-

 

-감사 합니다. 끝.

 

 

 

 

 

 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