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169.사기 -고은수 풀어씀

최해식 2014. 10. 6. 04:49

-오제 계보 :

黃帝 - 전욱 - 제곡 - 제요 - 제순     -15-

 

-제요 임금은  1년을 366일로 정한 후 윤달을 두어 시차를 조정했다.  -18-

 

-제순 임금은 팔원八元 이라는 고신씨를 섬기던 유능한 여덟 명의 인물을 등용해 다섯 가지 가르침을 전파하도록 했다. "父義 母慈 兄友 第慕 子孝"

" 아버지는 위엄 있게,  어머니는 자애롭게, 형은 우애 있게 , 동생은 공손하게 , 자식은 효성스럽게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

이 다섯 가지 가르침(五敎)이 잘 실천되니 집안은 화목해지고 세상은 안정되었다.  -26-

'고요'는 요 . 순 . 우 임금을 도와 五形과 五敎를 보급하고 공정하게 재판했다. 그래야 '아버지는 의롭고 어머니는 자비로우며 형은 우애 있고 동생은 공손하며 자식은 효를 다 해야 한다.   "父義 母慈 兄友 第慕 子孝" 라고 주장하며 화목하고 태평한 사회를 만들었다. -277- [죽기 전에 논어를 읽으며 장자를 꿈꾸고 맹자를 배워라]  김세중 편저 中

 

 

-중국 최초의 국가  하왕조 계보(기원전 21세기~ 16세기)

우 - 계 - 태강 - 중강 -.................공갑 - 고 - 발 - 걸

우왕의 아버지는 '곤' 이며 곤은 帝제 '전욱'의 아들이다.-31-

 

-갑골 문자의 나라 은왕조 계보(기원전 16세기~ 11세기)

탕왕 - 외병 -중임 - 태갑 - 옥정 -..........태정 -제을 -주왕

 

은나라의 시조는 '설'이다.  설의 어머니는 '제 곡 ' 의 둘째 부인이고,  설 이후 열네 번째 제후로 즉위한 사람이 바로 탕왕이다. -38-

 

-봉건제를 시행한 주왕조 계보(기원전11세기~ 256년)

무왕 -성왕 -강왕 -............. 유왕(782~ 770) - 평왕(770~ 720) - 환왕(720~697) - 양왕(652~619) - ............. 현왕(369~321) - 신정왕(321 315) -난왕(315~ 256)

주나라 시조의 이름은 기棄.다      기의 어머니는 '제 곡' 의 부인이다.

棄의 12대 후손인 고공단보, 그의 아들 계력,계력의 아들 서백 창(문왕), 문왕의 아들이 주나라 초대왕 무왕 이다.

서백 창(문왕)은 위수에서 여상(강태공)을 만나  ' 돌아가신 아버지 태공이 기다리던 사람 ' 이라는 뜻으로 태공망 이라고 부르며 스승을로 삼았다.

무왕은 즉위하자 태공망을 군사 참모로 삼고 동생 주공 단' 을 보좌관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문왕의 위업을 계승하여 영토를 넓혀 나갔다.-51~57-

 

-유왕(782~ 770) 은 포사를 총애하여 왕후 '신후'를 폐하자 쫓겨난 신후는 크게 분한 나머지 견융족과 손잡고 유왕을 공격하여 '여산' 아래에서 죽이고 원래 태자였던 의구를 새왕으로 받드니 그가 평왕(770~ 720)이다. 평왕은 수도를 낙양으로 옮겼는데 이때부터 주나라는 쇠약해져서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공격하고 빼앗게 되었다.  춘추전국시대의 시작(기원전 770년부터) 이다. -62-

 

-춘추 전국 시대는 춘추 시대와 전국 시대로 구분된다. 

기원전 770년부터 403년까지를 춘추 시대,

기원전 403년 부터 秦나라가 중국을 통일하는  기원전 221년까지를 전국 시대 라고 한다. 

춘추 시대에는 각 제후들이 자신의 세력과 영토를 넓히는 가운데서도 여전히 주나라 왕실을 받들고 그 권위를 존중했던 것에 반해 ,

전국 시대에는 제후들이 주나라 왕실을 무시하고 스스로 왕이라 칭하며 패권을 차지하려고 했다. 

따라서 춘추시대는 독자적인 세력을 가진 제후들이 수없이 난립하고 많은 제후국들이 있었던 반면,

전국 시대에는 비교적 강대한 나라들이 대립해서  권력 다툼을 벌였다.

춘추시대의  다섯 패자를 가리켜  '춘추 오패 ' 라고 한다.

춘추 시대의 첫 번째 패자는 제나라의 환공이다.

춘추 시대에는  한 번 천하의 패권을 잡았다고 해서 영원히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끊임없이 다른 제후들이 도전을 했고 따라서 싸움은 끊이지 않았다.  -70~ 71-

 

-공자는 말했다.

"부귀가 찾아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나는 마부라도 기꺼이 하겠다.  노력해서 될 일이 아니라면 나는 차라리 내가 원하는 대로 도를 행하고 덕을 쌓겠다 "

" 날씨가 추워져야 비로소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 "

이는 세상이 혼탁해졌을 때에야 비로소 깨끗하고 맑은 사람이 드러난다

" 군자는 죽은 뒤에 자신의 이름이 칭송되지 못함을 부끄럽게 여긴다. "

또한 가의(漢나라 문제 때의 정치가 이자 문인) 는 말했다.

" 탐욕스런 사람은 재물에 목숨을 걸고 열사는 명예에 목숨을 걸며 권세욕이 큰 사람은 권력에  목숨을 걸고  평범한 백성들은 그저 그날그날에 집착하며 살 뿐이다. "

 

비슷한 색깔이 서로 어울리고 비슷한 부류가 끼리끼리 모이듯 용이 날아오르면 구름이 따라오고 호랑이가 울부짖으면 바람이 몰아치듯 성인이 나타날 때에 세상 만물도 다 뚜렷이 드러나게 된다. 

백이와 숙제도 공자의 칭찬이 있고 나서  그 명성이 드러나게 되었고

안연이  특히 학문을 좋아했지만  " 파리가 천리마의 꼬리에 붙어 천 리를 갈 수 있는 것처럼"  공자의 칭찬을 받아 더욱 두드러지게 죄었다.

 

이처럼 시골에 묻혀 사는 사람이 덕행을 닦아 명성을 떨치고자 해도

자신을 알아줄 덕과 지위가  높은 사람을 만나지 못한다면 어찌 후세에 이름을 전할 수 있겠는가 ? <백이열전> -66~ 67-

 

-제 '환공' 은 노나라의 장수 '조말' 의 위협에 굴복한 약속을 취소하려했다.   그러나 '관중' 는  환공에게 약속을 지킬것을 건의하며 하찮은 약속이라도 신의를  저버리지 말아야  다른 나라로 부터 신뢰를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며   " 주는 것이  곧  얻는 것임을 아는 것이 정치의 비책이다. " 라고 말했다.  -79-

 

-秦나라 왕 계보(기원전778년~ 206)

1양공(778~ 766)

2문공(766~ 716)

8성공(664~ 660)

9목공(660~ 621)

10강공(621~ 609)

14애공(537~ 501)

16도공(491~ 477)

25효공(362~ 338)

26혜왕(338~ 311)

27무왕(311~ 307)

28소양왕(307~ 251)

29효문왕(251~ 250)

30장양왕(250~ 247)

31진시왕(247~ 210)

32호해(210~ 206)

33자영(206)

 

-'장의' 는  秦나라 혜왕(기원전 338~ 311 ) 때 재상으로 그는 일부러 진나라의 재상을 사직하고  위나라에 가서 재상이 되었다.

그가 위나라의 재상이 된 까닭은 진나라를 위해 일을 하기 위해서였다. 

장의 는 위나라 왕을 설득했다.

"새의 깃털도 많으면 배를 가라앉히고 가벼운 사람도 떼 지어 타면 수레의 축이 부러지며 여러 사람의 입은 무쇠도 녹게 만들고 여러 사람의 비방은 사람을 파멸시킬 수 있다고 들렀습니다. "

결국 위나라 왕은 합종을 포기하고 장의를 통해 진나라에 화평을 청했다.  장의는 돌아가서 다시 진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158-

 

-춘신군은 초나라 경양왕을 섬겼다.

춘신군은 진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소양왕'에게 말했다.

"[시경] 에 '처음이 없는 사람은 없으나 끝을 잘 맺는 사람은 드물다 ' 라고 했고, [역경] 에는  ' 여우가 물을 건너다 끝내는 꼬리를 적신다. '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시작은 쉽지만 결과가 어렵다는 뜻입니다.  -179~ 180-

 

-진나라 소양왕이 죽고 태자 안국군이 왕이 되었다. 그가 효문왕이다.   효문왕 은 화양부인을 왕후로 하고 자초를 태자로 삼있다. 

효문왕이 즉위한 지 1년 만에 죽자 태자 자초가 왕으로 즉위했다.  이가 곧 장양왕 이다.  장양왕은 양어머니 화양부인을 화양태후 라 하고,

생모 하희를 하태후라 하여 존중했다. 

장양왕이 즉위한 지 3년 만에 죽자 태자 정이 왕위에 올랐다. 이가 진시왕 이다. -224-

 

-진시황의 재상  이사

이사는 초나라 출신으로 어느 날 이사는 관청 변소의 쥐들이 더러운 것을 먹다가 사람이 다가가면 놀라 달아나는 것을 보앗다.  그러나 창고 에 있는 쥐들은 쌓인 곡식을 먹으며 큰 건물에 살면서도 사람이 와도 거들떠보지도 않느 것이었다. 

그리서 이사는 탄식하며 말했다.

" 사람이  '훌륭하다, 훌륭하지 않다.' 라고 말하는 것도 결국은 이런 쥐들과 다를 바가 없구나.  자신의 몸을 두는 장소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

이렇게 생각하고 순자을 찾아가 천하를 통치한는 학문을 배우고 순자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 저같이 비천한 위치에 있으면서 어떤 계획도 세우지 않는다면 마치 짐승이 물고기를 보고서도 사람들이 본다고 해서 억지로 탐욕을 참고 지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가장 큰 부끄러움은 낮은 지위에 있는 것이며 가장 큰 슬픔은 가난한 것입니다.  오래도록 비천한 지위와 곤궁한 처지에 있으면서 세상의 부귀를 비난하고 영리를 미워하거나 스스로 무위의 경지에 안주하는 것은 선비가 진정으로 걸어야 할 길이 아닐 것 입니다. 그래서 저는 진나라 왕에게 유세하러 거려고 합니다. "

이사는 진나라 재상 여불위를 찾아가 가신이 되었고  여불위는 이사의 현명함을 알고 진시왕의 비서관으로 임명했다. -231~ 232-

 

-환관 조고' 는 승상 '이사' 를 설득했다.

가을에 서리가 내리면 잎과 꽃이 떨어지고 얼음이 녹아 물이 흐르게 되면 만물이 움직입니다.  이것은 필연의 법칙입니다.  -238-

 

-한나라 왕 계보(기원전206년~ 기원후5년)

1고조(206~ 195)

2혜제(195~ 188)

3소제공(188~ 184)

4소제홍(184~ 180)

5문제(180~ 157)

6경제(157~ 141)

7무제(141~ 87)

13평제(1~ 기원후 5)     -253-

 

-유방은 장량의 말대로 진나라의 군대를 방심시킨 후 공격하여 무찔렀다.  유방은 함양에 입성해 진나라의 왕 '자영' 으로 부터 항복을 받았다.

유방은 진나라 궁궐에 머물고 싶었으나 궁궐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간곡히 충고했다.

" 충성스런 말은 귀에 거슬리지만 행실에 이롭고,   독한 약은 입에  쓰지만 병에 이롭다."  라고 장량이 말했다.  -305-

 

-유방이 승하하고  '여후' 의 태생 인 태자가 뒤를 이었다. 그가 곧

'혜제'이다.  여후가 장량에게 입은 은덕에 감격해 억지로 음식을 먹게  권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한세상을 살아감은 마치  흰 망아지가 문의 틈새를 지난느 것과 같이 빠른 것인데  굳이 그토록 고통스럽게 까지 할 필요가 있습니까 ? "

장량도 할 수 없이 여태후의 권유에 따라 음식을 먹엇다.  그 후 8년 뒤 그는 세상을 떴다. -312-

-유방 ;  진승과 오광의 난으로 진나라가 혼란해지자 병사를 일으켜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한나라 왕이 된다 .

여태후  :  한나라 고조의 황후로 유방의 천하 통일을 보좌하고 한나라 초기 여러 제후(한신 등등)들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매우 중대한 역할을 했다.   유방이 죽은 뒤 정권을 장악해 16년간 한제국을 통치했다. -315-

 

-한신이 말했다.

"병법에는 죽을 곳에 빠져 본 후에야 살 수 잇고  망할 곳에  있어 봐야 흥할 수 있다"  라고 병법에 쓰여 있다. "

한신이 잡혀온 광무군에게 말했다.

" 백리해가 우나라에 있을 때 우나라는  망했지만 진나라에 있을 때는 진나라가 흥했소이다.  이는 백리해가 우나라에  있을 때는 어리석었다가 진나라애 가자 현명해졌기 때문이 아니고 오직 임금이 그를  중용했느냐 중용하지 않았느냐 의 차이지요.  ..........

.....마침내 광무군이 입을 열었다. 

" 슬기로운 사람도 천 번 생각에  한 번의 실수가 잇고 어리석은 사람도 천 번 생각하면 한 번은 맞느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또한  ' 성인은 미치광이의 말도 가려서 들을 건 듣는다.'  라고 했습니다. -326~ 327-

 

-괴통은 한신에게 말했다.

" 알고 잇으면서도 실천하지 못한느 것이 모든 일의 화근이 됩니다. ' 아무리 맹호라도 망설이면 벌만도 못하며 아무리 준마라도 나가 지 않으면 늙고 둔한 말만큼도 못하다.  순임금과 우왕의 지혜가 있어도 ㄷ앉아만 있어서는 벙어리의 손짓만 못하다. '   라는 말은 실천이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알려 주고 있습니다.   대체로 공은 이루기 어려우나 잃기는 쉽고 좋은 때를 만나는 일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습니다. 제발 깊이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335-

 

- 사마천은 역사에서 만난 수많은 영웅들의 자유롭고 호방한 삶을 접하면서 그는 모험과 낭만이 가득 찬 세상을 만나기도 했고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들과 성인들을 통해 자신의 사상적인 근원을 찿을 수 잇엇다.

예로부터 한 권의 책을 읽고 인생의 방향ㅇ르 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마천 역시 [춘추] 와 같은 역사책에서 인생의 방향을 정하게 되었고

이 책을 통해 올곧고 호방한 성격을 배웠다. 

 

20세 되던 해 사마천은 길고도 먼 여행을 떠난다. 

그는 여행을 하면ㅅ 역사에 기록된 뛰아난 인물들이 살았던 곳이나 

그 인물들이 최후를 맞은 곳을 들렸고 그들의 행적과 사상에 대한

그때그때의 감회를 기록했다.  그는 역사의 현장을 눈으로 확인하고 가슴으로 느끼는 것이었다.    그래서 후대의 사람들은 사마천의 이 여행을 흔히 '독만권서만리로(  ) '  라고  말한다.  만 권의 책을 읽고  만리 길을 여행했다 는 뜻이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27세가 되었을 무렵 사마천은 낭중이라는 벼슬에 오르거ㅔ 된다.

낭중은 하급 관리직이었지만  황제의 비서관 역할을 하는 중요한 자리였다.  황제를 모시면서 황제의 눈에 들어 발탁이 되면 곧장 높은 자리로 직행할 수 잇는요직이기도 했다.  -345~ 346-

 

-한나라 무제가 이룩한 군사적 업적은 찬란했다. 

남쪽의 월 지역을 평정했고  동북쪽의 고조선을 '정복'? 했으며  장건을 파견해 서역으로 통하는 교통로를 개 했다. -348-

 

- 사마천은 궁형을 받은 후 더욱 열심히 자신의일에 열중했다.  이듬해 사마천은 능력을 인정받아 중서령이 되엇다.  중서령이란 궁형을 당한 환관들 중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직책으로 황제의 비서실장 자리였다.  이렇게 해서 사마천은 [사기] 를 저술하는 작업도 계속 진행시킬 수 잇게 되엇다. -351-

 

-사마천 연보

기원전145년;하양에서 출생.

기원전138년 ; 장건을 서역의 월지국에 파견. 동맹을 맺음

126년;사마천은 긴 여행ㅇ르 떠난다.  서역에 파견되었던 장건이

          13년  만에 돌아온다.

119년; 장건은 다시 서역으로 파견된다.

110년; 사마담 이 별세한다.

108년; [사기] 저술에 착수한다.

98년;   궁형을 자청 한다.

97년;   궁형을 당한 뒤에도 능력을 인정받아 중서령에 임명된다.

91년;   임안에게 답장하는 [보임안서]를 쓰다.

90년 (56세) ; [사기] 를 완성한다.  이후의 행적은 알 수 없다.

                   그의 묘지는  섬서성 한성현 지천진 사마파에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