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밤이 자정을 넘고 있었다. 밤이 깊을 대로 깊어짐에 따라 바람과 추위가 한층 기승를 부렸다. 진하고 두꺼운 어둠 속에서 바람소리는 매몰찼다. 어둠이 짙은 만큼 별들은 초롱초롱 깨어나고 있었다. 어둠에 박힌 겨울별들의 반짝임은 유난히 또렷하고 맑고 깨끗했다. 그리고 그 작은 반짝임들은 시리고, 멀었다. -9-
-고흥반도를 왼쪽에 품은 보성만에 한겨울의 낙조가 선연한 적황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바닷물 위에 싱그러운 붉은 황금빛 낙조가 반짝이는 윤기를 튕기고 있는 보성만은 어느 때 없이 풍만한 자태로 넘실대고 있었다. 그건 황금이 끓고 있는 거대한 용광로였고, 사위어가는 햇살이 그려내는 뜻 모르게 현란한 고운 한 폭으 그림이었다.
......... 주월산 마루에서는 보성만 일대가 한눈으로 바라보였다.
"참말로 장관이구만이라." 낙조를 바라보고 있던 조성책 오판돌이가 입을 열었다. -82-
-......한때 패검도 멋지게 금테두리 모자에 검정 경부제복을 입고 동분서주하던 노덕술 또한 고동색 두루마기에 몸을 감은 채 조사관 앞에 고개숙이고 있는가 하면, 이 땅의 갑부 박흥식도 자가용 자동차에 마카오 양복은 옛일이라는 듯 꾀죄죄한 세루 두루마기에 눈만 번쩍이며 고랑을 차고 끌려다니고, 일본의 국민복을 입고 각반에 전투모를 쓰고 학병을 권유하던 가야마 미쓰로도 이제는 이광수로 돌아와 회색 두루마기에 몸을 싸고 조용히 제2의 '나의 고백'을 쓰고있다. 흥망성쇠 - 인생의 허무함이 이 같을진대 어찌하여 그들은 사람으로서 걷지 못할 친일반역의 길을걸어 이 같은 눈물의 길을 걷고 이는가? - 229-
-농장 여기저기에 세워진 푯말의 일하지 않는 자는 먹으려 하지 말라, 내일 먹으려 하거든 오늘 일하라. 하는 문구들이 서민영의 대답인 셈이었다. -255-
-나뭇가지를 매만지면서 나무들이 저마다 봄맞이 숨을 쉬고 있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가지 마디마디마다 맺혀 있는 꽃봉오리들은 하룻밤 사이가 다르게 변해갔다. 하룻밤을 지낼 때마다 팽팽한 탄력으로 부풀어오르고 있는 꽃봉오리들은 어느 절정의 순간에 다다라 마침내 껍질을 벗어던지고 꽃을 피워낼 것이다. 모든 꽃봉오리들은 겨울을 맞기 전에 벌써 그 속에 꽃을 담고 겨울을 나는 것이다. 봄의 꽃피움을 위하여 그 얇은 껍질에 싸여 엄동을 견디어내는 꽃의 인내, 아니, 엄동의 추위 속에서도 꽃이 얼지 않도록 하는 그 얇은 껍질에 모아진 보온의 힘, 서민영은 거기서 우주의 신비르 보았다. 그것은 모든 생명현상에 걸치는 경이로움이었고, 인간으로서의 자만을 버리게 하는 가르침이었다 -256-
-깊고 넓게 생각하고, 많은 그 글을 써야 했던 다산이 호를 다산으로 지을 만큼 차를 좋아했던 건 당연한 일이었지요. 차는 미각도 미각이지만 그보다는 정신을 쇄락하게 해주거든요. 다산은 과중한 정신노동을 머리에 쌓이는 피로를 차로 푼 것이지요.
........... 예로부터 중들이 차를 즐겨호 왔던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였지요. 정신노동자가 차를 즐기고, 육체노동자가 먹걸리를 즐긴 것은 퍽자연스러운 현상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일본인들이 보성 일대의 야산에 대단위 차재배단지를 조성하게 되자 못내 불쾌해했다. 도미를 위시해서 맛진 생선이면 다 일본놈들이 차지해 식생활까지 파괴당했듯 우리의 고유한 정서생활 중의 하나가 또 일본놈들에게 침해당하는 것을 그는 아까워했다-259-
-먼 데서 장닭의 목청 뽑는 소리가 길게 들려오기 시작하고, 창호지문에 새벽빛이 젖어들었다. -272-
-은행나무가 제대로 잘 생겨 보일 때는 아무래도 잎이 무성할 대로 무성한 한여름이었다 키가 드높고 가지들이 넓게 뻗은 만큼 무성한 잎들을 매달아 우람스런 체구를 갖춘 은행나무는 위풍스러움을 넘어 신성스러움을 느끼게 했다. 그 은행나무의 나이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구는 500살이라고 하는가 하면, 어느 사람은 700살이라고도 했다. 열 살이나 스무 살 정도의 ㅅ 차이라면 모르겠는데 200살이나 차이가 나고 보면 그 어느 말도 믿기는 어려웠다. 고작 60여 년밖에 살지 못하느 인간으로서 수수백년을 사는 나무의 나이를 알 수 없는 것은 당여난 일일 것이다. 어쩌면 나무의 나이를 아려고 하는 것부터가 부질없는 일인지도 몰랐다.
..............인간에겐 삼사십 년 세월이 늙고 병들게 하는 긴 세월이지만 천 년을 넘게 사는 나무한테는 그 세월이 인간의 하루이틀에 불과할 것이니 무슨 변함이 있을 리 있나. 운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315-
-345-끝. [5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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