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269 / 한국근대사 산책3 - 강준만 지음

최해식 2015. 4. 29. 10:39

-俄館파천(1896.2.11~1897.2.25)이다 -9-

 

-엄상궁은 俄館아관에 있을 때 임금의 아이를 임신했는제, 그아이가 뒷날 영친왕으로 책봉됐던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다. -20-

 

-[서유견문] 평가 ;

1994.2월 서울대 법대교수 '최종고'는   "[서유견문] 은 한국 최초의 해외 여행기로서도 흥미진진하다.  8개국 37개 도시에 관하여 소개하고 있다.  나는 시간이 허락된다면 유길준이  언급한 서양 각국의 도시들을 돌아보고   '신서유견문'  같은 책을 하나 써보고  싶은 게 꿈이다. 

제2의 개국의  의미를 새기며 [서유견문] 을 읽는 맛은 각별하기에 일독을 권하는 바이다"  라고 말했다. -26-

 

- 1890년대 후반의 조선 사회에서 [서유견문] 을 읽는 건 꼭 필요한 일이었다. 특히 1890년대 중반 매관매직은 국가시책이 되어버렸다.  황실은 稅源이 없어 벼슬을 팔아서라도 국고르 충당해야만 했다.  그 결과 탐관오리가 득실거리게 되어, 벼슬을 돈 주고 샀으니 본전 뽑고 이익까지 남겨야 하지 않겠는가-29-

 

- 능력 본위와  평등사회의 구현을 위한, 1894년 갑오개혁은  과거제도를 폐지해버리자,  많은 양반계급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진로 모색을 강요했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이승만은 생활비를 벌면서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배재학당에 입학하게 된 동기이다. -83~85-

 

- 1897년 10.12일, 고종은 왕실 관료들과 향촌 선비들이 '칭제건원'의  요청을 받아들여 황제 자리에 올랐다.  황위에 오름을 하늘에 고할 목적으로 원구단 (환구단)이라는 제단이 만들어 졌다.  즉위식 전날, 원구단을 세심하게 둘러보던 의정대신 '심순택'은  "허어! 불과 삼 년 동안, 세상이 이리도 크게 바낄 줄 누가 짐작이나 했으리. 일각이 여삼추라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당금의 동양 각국 형세로는 요즘의  삼 년이 과거의 삼백 년에 맞먹고도 남음이 있겠구나 " 라며 찬탄을 금치 못했다.

불과 삼년 전인 갑오년 (1894) 음력 12.13일의 일과 비교하면  지금 세상의 움직임은 차라리 꿈을 꾸는 듯할 지경이다.  청나라 세력의 영향력이 강하게 남아 있던 갑오년 당시, 일본으 강요로 추진해야 했던 이른바 개혁의 일환으로 '대군주' 라는 위호를 앞세워 오로지 황제에게만 쓰는  '폐하'  라는 존칭을 쓰기로 하고 종묘에 전알하여 고하는 예식을 거행할 때, 그 상황이 어떠했던가.  -105-

(참고글 ; 갑오년 음력1894년 12월13일(양력 1895년 1월7일)은 고종이 홍범 14조를  반포해 청의 종주권을 부인하고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포하였다.  출처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teachinghub&logNo=220232242220

 

 

 

- '홍범 14조' 제정 반포  ; 음력 1894.12.12( 양력1895.1.7 )

1894.11월 일본공사 '이노우에' 는 국왕을 알현하여  "독립의 기초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내정을 개혁해야 하고 청국과의 관계를 단절했다는 국시의 변경을 종묘에서 고하고,  전국에 선포해야 한다" 고 권고 했다.  국왕은 종묘에서 독립서고문을 奉告했으며 이 서고문에서 '홍범 14개조' 를 선포했다.   이는 '청국과의 관계 단절' 이라는 일본의 의도가 강하게 반영된 것이었다. -241- [한국근대사 산책2-강준만 지음]에서....

(참고글) ;  http://blog.naver.com/teachinghub/220232242220

음력 1894.12.13일(양력1895.1.7), 고종은 홍범 14조를 반포해 청의 종주권을 부인하고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언하였다. )

 

 

 

 

- 1898~1899년 사이에 국가 재정이 아주  어려워 賣官賣爵매관매작 또는 賣官賣職매관매직으로 날을 지샜다. 그때 전국수령(군수), 방백(도지사) 중  2/3가 벼슬을 돈으로 산 관리들이었다. -135-

(참고글) -[  특히 1890년대 중반 매관매직은 국가시책이 되어버렸다.  황실은 稅源이 없어 벼슬을 팔아서라도 국고를 충당해야만 했다.  그 결과 탐관오리가 득실거리게 되어, 벼슬을 돈 주고 샀으니 본전 뽑고 이익까지 남겨야 하지 않겠는가-29- ]

 

 

- 1898.2.22일 대원군이 사저 운현궁에서 숨을 거두었다. -145-

 

- 윤치호는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서재필 박사와 서광범 씨는 성격이 정반대였다. 전자는 인색하고 이기적이며 비애국적이나, 후자는 관대하고 애국적이며 정이 깊었다. .....서재필 박사는 행복하게 그리고 편하게 살아가고 잇었으나 서광범 씨는 겨우 생활을 하고 있었다. 자연히 서재필 박사는 가난하고 당당한 친척(두사람은 一家이다 )을  피하고 있는 것같이 보였다. -170-

 

- 갑신정변과 관련해 "재필 자신은 일본군의 보호를 받으면서  일본으로  달아났으나, 재필아비.형. 아우 세 사람이 모두 죽음을 당했습니다"  이와관련하여 '삼족몰살'이라고 하는 야만적인 형벌이 청년 서재필에게 준 상처는 상상하기조차 힘든 일이었다며 서재필이 가진 원한을 인정함과 동시에 서재필의 애국심을 긍정 평가했다. 삼족몰살을 당한 그는 아마도 조선이라는 나라를 저주했을 것이고..... 그를 잊어버리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후에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날 때마다 조국을 위해서 나설 수밖에 없었으니 '아이러니' 라고 할 수밖에 없다,-172-

 

- 고종은 백정 출신인 '길영수' 와  '홍태윤' 을 중용하였다.  홍태윤은 정3품 양주목사로 발탁하였고, 길영수는 상주 군수 등을 거쳐 1903년 정2품  한성판윤까지 지내게  된다. 길영수는 황국협회를 지휘하면서 독립협회와 대항했던바 나중에 일진회가 생겨나면서 다음과 같은 속요가 유행하였다,

"내 주머니 兩半 중

닷 돈은 길영수가 먹고

닷 돈은 일진회가 먹고

닷 돈을 쪽발이(일본)가 먹어서

양반(兩半=兩班)은 없어졌소 "

(** 내주머니에는 모두 몇 돈이 있었나? 30돈?  맞나요? )

이것은 양반들의 세도가 땅에 떨어진 것을 비꼬는  말이요 또 새로운 세도 층의 대두를 풍자한 것이라며 홍태윤.길영수가 백정이 출세한 시초라면 고종은 그들을 해방시킨 선구자 라고 평했다. -219-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이태진' 은 "서울에 전차가 달린 것은 도쿄보다 3년 먼저" 라고 했다, 

당시 조선 형편에 비추어 전차 도입이 빨랐다는 건 분명한 것 같다.

'이태진' 교수는 전차의 빠른 도입을 대한제국의 업적으로 긍정 평가했지만, 이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잇다. -271-

 

-일본에서 처음 도쿄와 요코하마 간 철도가 개통된 것은 1872년,

중국에서 철도가 처음 등장한 것은 1881년이다.

조선은  노량진과 제물포를 잇는 경인철도가 1899년 9.18일 오전 9시, 개통되었다. -(철도개통은 일본이 27년 빠르다.)-280-

 

- 선교사 '아펜젤러' 는 군산 앞바다에서 순직하자,임춘희 목사는 신도들에게  편지를 띄웠다.

"교회 담 한 귀퉁이 마른 흙 틈에서 머리를 내밀며 나온 어린 잎 하나가 꽃이 되어 거센 바닷바람에 흔들리고 있습니다. 괜히  그  앞에 마음이 무너져 눈물겹기도 합니다.  제 선 자리 어디건 제 모습대로 피어 살아있음을 노래하는 들꽃들 ....... 들꽃 같은 삶을 새롭게 새겨봅니다."

 

마포구 합정동 외국인 묘지 공원에 조성된 '아펜젤러' 일가의 묘역에 있는 그의 묘비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왔습니다" 라고  적혀 있다. 그러나 당시 선교사들  중엔  섬기러왔다기보다는 섬김ㅇ르 받으러 온 쪽에 가까운  이들이 많았다. -373-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