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271/ 한국근대사 산책5 - 강준만 지음

최해식 2015. 5. 22. 13:46

-淸 말의 개혁사상가인 량치차오梁啓超(1873~1929) 는 1899년에 쓴 [한국의 근상] 이라는 글에서 한국의 위태로운 처지의 가장 큰 원인으로 정치의 불량을 지적했다.  1500년 이전에는 조선이 일본보다 우월하지 않은 점이 하나도 없을 정도였는 데 조선이  이렇게 몰락한 까닭은 정치가 불량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 량치차오는 전 세계에서 개인주의가 가장 발달한 나라는 조선이 으뜸이라고 보았다. 좋은 의미는 아니다.  한국인은 관리가 되어도 권세를 부리는 데에만 신경을 쓸 뿐 내일은 나라가 망한다 해도 아무런 대책이 없다고 했다. 또 조선 사회는 음험하고 수치심이 없는 자가 항상 우세하며 정결하고 스스로를 아끼는 자는 언제나 열세에 놓여  잇다고 주장했다. 다만 이는 천성이 아니라 사회 현상의  압박으로 그렇게 된 것이라고 했다. 요점인즉슨, 을 망하게 한 것은 조선일 뿐 일본이 아니라는 것이다.-105-

 

- 1882년 중국 지안에서  높이 6.8미터에 달하는 광개토대왕 비석이 발견되었다.  1500년 전 건립된 이 비석은 4면에 걸쳐 1750자가 넘는 글자로 고구려 광개토대왕(375~415)의 업적을 빼곡히 기록하고 있었다. 일본은 1907년 탁본을 떠서 박물관에 전시했다.  이런 과정이 한국인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광개토대왕은 중국의 본토까지 영토를 확장하였으며, 을지문덕은  적少.은 군대로 수양제의 30만 대군을 격파하여 "한국의 4000년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한 사람" 이 되었다.

을지문덕을 숭상하는 일은 곧 잃어버린 한국의 민족성을 찬양하는 수단이며, 동시에 중국의 정치적,문화적 영향력을 추방하고자 했다. 

유길준은 '을지'  와 같은 순수한 성씨가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을 한탄했으며,  신채호는 "이렇게 강하고 용감한 것이 바로 우리 민족의 본성이다! " 라고  을지문덕을 칭송하녔다.-116-

 

- '안중근' 은 1879.9.2일  황해도 해주의 鄕班 집안에서 급진개화파 인 '안태훈'의 아들로 태어났다, -129-

 

- [매천야록]은  1864년 대원군 집정에서부터 기록해 1910년 9.10일 까지 기록하여 46년 만에 끝을 맺었다. [매천야록]은 일제강점기에 그의 집안에 祕藏돼 잇다가 해방이 되어서야 빛을 보게 된다.  김윤식.김현은 [매천야록]은 유교적 세계관에 충실하려 한 조선 지식인의 전형적인  '보고문학'이다.라고 평가했다. -206-

 

- 1910.8.22일  순종 황제가 참석한 가운데 어전회의에서  총리대신 이완용은  한일강제병합안을 가결시켰다. 일제는 1주일이나 극비에 부쳤다가 8.29일에 병합조약을 포고했다, 이를  '경술국치' 라고 한다.  일제는 8.29일 대대적인 축하 행사를 벌였으나 한국인들은 조용했다. 이 조용함과 차분함 속엔 조약에 대한 냉소함의 표현이 담겨있었던 건 이니엇을까? 아니면 '량치차오'의 말마따나, 한국은 전 세계에서 개인주의가 가장  발달한 나라이었기 때문일까? -201~210-

 

 

-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이태진은 2000.8월 그동안 연구 성과를 모은 단행본 [고종시대의 재조명] 을 출간했다  이태진은 그동안 굳어져 내려온 고종은 유약한 군주 라는 등식을 전면 부정하며  고종을 동도서기론의 개화를 추구한 개명군주로 평가했다,  그는 '고종 암약론' 은 일제가 고종시대으 근대화 성과를 매장하기 위해 조작한 허위라고 반박했다.

이태진 교수는 "일제는 대한제국이 1897년 광무개혁을 통해 자력 근대화의 가능성을 강하게 보이자 이에 위기감을 느껴 고종의 무능설을 유포했다. 그리고 대원군과 민비사이의 다툼에서 우왕좌왕하는 나약한 군주라고 허위사실을 조직적으로 만들어 냈다. 이제부터 고종으 근대화 노력과 외교전략을 복권시켜야 한다" 라고  했다.  또한 고종은 1896년 아관파천 이후 대한제국 출범을 앞두고 서울으 근대적 도시개조사업과 일본 공사관의 공작활동을 차단하기 위해  황제가 '익문사' 란 비밀 정보기관을 창설.운영한 사실 등을 밠혔다. " -236-

 

- 인조는 1637.1.30일 남한산성을 나와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신하의 예를 올리면서 무릎을 끓어야 했다. 세자를 포함하여 조선 신하 500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벌어진 일이었다. 김훈의 장편소설 [남한산성]은 그 장면을 잘 묘사하고 잇다.

"일 배요! 조선 왕이 구층 단 위를 향해 절했다. 세자가 왕을 따랐다. ......"

오수창은 이어 "최명길의 현실적인 정책이 후대로 이어지지 않고 김상헌의 척화론.반청론으로부터 전란 이후 19세기까지 조선을 이끈 이념이 도출디었다는 사실을 어떠게 볼 것인가"  라고  문제를 제기했다.

"최명길은 한때 국정을 주도하고 국가의 큰 위기를 수습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도 그는 불투명한 언행을 별로 보이지 않았다, 반면에 감상헌의 판단과 행동은 국가 존망의 기로에서 국정의 정상에 잇던 인물로서 최선의  길이었다고 선뜻 인정하기에는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고 생각한다.  최명길은 바르고 옳았다,  김상헌은 다만 이겼을 뿐이다. 그것도 조선 후기 지배층의 테두리 안에서만." 이렇게 말한다면 일개 서생으 철없는 소리가  되고 말 것인가.-257~259-

 

- 조선은 임진왜란과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무슨 교훈을 얻기는 했는가?

어찌됐건 치욕을 겪긴 했지만 조선은 망하지 않고 살아남았다.

매천 황현은 [오하기문] 에서 임진왜란 .병자호란 이후 나라가 오랫동안 태평하여 바야흐로 나라안에 전쟁이 없었으므로 문신과 훈척들이그 자리(군사를 관할하는 직) 을 반이나 차지하여고  무신들 또한 대부분 세습한 장수들로 비단 옷을 걸치고 기름진 음식을 먹음면서 방탕하게 노는 것이 기생과 같았다" 며 개탄했다.

교수 송준호도  "그 당시 우리는 너무 폐쇄적인 삶을 살았고, 밖으로 눈을 돌리지 않았어요. 그 이유는 전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보면 우리나라처럼 온실 속에서 산 민족이 없어요. 임지왜란과 병자호란을 제외하고 안팎으로 200년은 너무나 평화가 난만해서 유교 경전을 암송하고, 그 가르침대로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잇엇다고 믿엇던 겁니다"  라고 주장했다. -259-

 

- 조선왕조은 어떻게 유례없이 500년이란 긴 왕조를 유지시켰는가?

미국학자 '에드워드 와그너(1924~2001)' 는 조선의 과거제도가 선비들에게 '성공의 사다리' 의 기능을 해 사회 안정에 이바지 하고 조선왕조가 오래 지속되는 데 기여했다는 것이다. 특히 조선의 과거제도는 서울 거주자를 대상을 실시되었기 때문에 서울에 거주하는 세도 높은 가문이 유리했고, 응시기회도 많았다. 이것이 특정 가문의 후예들이 대거 국가 요직에 등용된 이유다.

다산 정약용이 죽기 전 자녀들에게 무슨 일이 잇어도 사대문 밖으로 이사가지 말고 버텨야 하며 서울을 벗어난 순간 기회는 사라지며 사회적으로 재기하기 어렵다고 신신당부한 동시에 경고했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엇을 것이다. -260-

 

- 송준호 교수는 말했다.  " 중국이 조선과 달리  개방사회로 갈 수 잇엇던 원동력 은 끝없는 이민족으 침략으로 사람이 죽고, 나라를 오랑캐에 빼앗기는 체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유교 경전만 가지고 세상일이 다 디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깨달은거죠. 그 결과 중국은 서자차별도 없고, 본관제도도 없앴고, 상인 천시 사고방식도 사라졌습니다.사회 각 분야에서 외부 침략에 대응을 하다 보니 개방된  것이죠.  조선은 이런 역사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나라가 망할 때까지 오로지 유교경전에 매달린 겁니다.  유교 경전에서 얻은 지식과 생각만으론 국가를 경영하기 어려웠다, -267- 

 

-이 세상엔 축복과 저주가 동전의  양면관계를 이루는 경우가 매우 많다, 당파싸움도 그런 경우다,  당파싸움은 권력집중을 위해 한국인들이 낳은 필연적 결과다.  그런 삶의 구조하에서  남 잘되는 꼴을 죽어도 못 보는 사람들이 많다, 배가 아픔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자신도 죽어라 하고 노력해야 한다,  한국인은 그렇게 해왔다, 그래서 성공했는지는 모르겠지만,삶은 다할 나위없이 피곤하고 만족은 영원한 신기루가 되고 만다. 한국인의 행복지수가 매우 낮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국은 가족은 강하고 국가는 약한 사회다, -295-

 

-지난 2005년 종친회를 빙자해 5년 동안 7,900명에게 싸구려 족자를 비싼 값에 팔아  7억여 원을 뜯어낸 사기 사건은  어떤가. 이 사건에서 놀라운 사실은 그간 피해신고가 단 한건도 없엇다는 사실이다. 종친회으 가공할 파워라 하지 않을 수 없다, -302-

 

-........-310-끝.그냥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