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복한 학생' 선조,
조선 최고의 스승들, 이황,기대승, 이이 등에게서 배우다.
그 첫 번째 스승이 이황이다.
그러나 선조가 이황의 제왕학 강의에 깊은 흥미를 가져던 것 같지는 않다. 여러가 지 이유가 있겠지만 선조는 經보다는 史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실록] 에는 선조가 사저에 머물던 하성군 시절 역사서인 [십구사략] 을 읽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래서 이황의 강의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대충 듣는 척만 한다고 신하들의 지적을 받았다.-105-
- 선조 8년은 당쟁 원년이다. 하필이면 선조가 학문 수련을 마치고 왕권을 행사하게다는 의지를 밝힌 그해 10월부터 김효원과 심의겸의 갈등을 시작으로 조선 역사 300년을 뒤흔들게 되는 붕당정치의 불씨가 타오르기 시작한다. -121-
- 선조 탄생의 1등 공신 이준경 ;
명종10년(1555) 을묘왜변이 일어났을 때는 도순찰사를 맡아 왜적을 무리치고, 이 공으로 우찬성에 올랐고 이후 좌찬성,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명종 20년 (1565) 마침내 영의정에 까지 이른 다. 선조의 집권에 결정적인 공을 세운 이준경은 원상이 되어 미숙한 선조가 국왕으로서 자리잡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다. -85-
- 선조의 시대를 연 장본인은 이준경이지만, 선조의 치세를 뒷받침해 줄 인물들을 길러낸 것은 이황이었다. 이황이 길러낸 인물들은 선조도 좋아했다. 선조는 역대 왕 누구 못지않게 사람을 알아보는 눈, 즉 知人之感 이 뛰어난 지도자였다. -149-
- 이건창은 당쟁사 연구의 교과서로 불리는 [당의통략] 에서 "김효원을 지지한 사람은 김우옹,유성룡,허엽,이산해,이발,정유길,정지연 등이고 동인이라고 불렀다" 고 했다. 그리고 동인 소장파에는 정인홍,우성전,김성일,이원익,이덕형 등이다. 동인이라 한 것은 김효원이 서울으 동쪽인 건천동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이건창은 "심의겸을 지지한 사람은 박순,김계휘,정철,윤두수,구사맹,등이고 서인이라고 불렀다 " 고 했다. 서인이라 한 것은 심의겸이 서울으 서쪽인 정릉방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인은 이황과 조식의 문인들이 많았고,
서인은 이이와 성혼의 문인들이 많았다. -205-
** [黨議通略] ; 선조 때 김효원과 심의겸에 의한 동서붕당에서 시작하여 영조의 탕평책에 이르기까지의 내용을 기록한 조선왕조 당쟁사.
- 당쟁 초창기 '동인의 영수' 허엽의 행적은 비판으 대상이 되엇다. 허엽은 허균과 허난설헌의 아버지이다. '동인의 영수' 를 자처한 허엽은 동서 화해론을 내세운 이이와 사사건건 대립하게 된다. 이이는 자신의 [석담일기] 에서 허엽을 '망령된 선비' 라고 불렀다. -208-
- 병판 이이의 10만 양병' 주장은 文弱 풍조의 조정에 큰 파문을 일으 켰다. 10만 양병설의 반대자는 유성룡이었다. 두 사람은 개인적 친분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은 서인, 한 사람은 동인인 데다가 급진개혁과 온건개혁이라는 점에서 충돌이 잦았다. 유성룡은 "아무 일도 없이 평화로운 때에 군사를 양성하는 것은 화란의 단서를 만드는 것" 이라는 논리로 이이를 반박했다. 결국 '10만 양병'이라는 선조 연출, 이이주연의 국방개혁 플랜은 좌절되고 말았다.
이준경이 당쟁을 걱정하자 헛소리라고 몰아세웠던 이이는 막상 당쟁이 심화되자 중재자가 되어 당쟁 완화에 힘썼고,
이이의 10만 양병 주장을 반박한 유성룡은 막상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해 전란 극복에 큰 공을 세우게 된다. 어쩌면 그게 인간이고 그래서 역사를 보고 또 봐야 하는 것인지 모른다. -215-
- 기축옥사 ;
정여립은 1589.10.17일, 진안의 죽도에서 자기 목을 찔러 죽었다.
그리고 10.27일,백관들이 차례로 서서 보는 가운데 그의 아들 정옥남과 역모 관련자들을 능치처참하여 저잣거리에 머리를 내걸었다.
추관推官-수사책임자, 또한 사실대로 심문하지 않는다고 하여 서인들,특히 정철은 이 역모사건을 엄청나게 확대코저 했지만, 선조는 후폭풍의 무한 확산을 현명하게 조정하였다.
이런 혼란의 와중에당초 계획된대로 11.18일 일본으로 보내는 통신사로 황윤길,김성일, 서장관으로 '허성'을 선발했다.
이런 경과에서 볼 수 있듯이 선조의 조처는 '관대' 했다. 그는 사화의 비극을 잘 이해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1589.12.1일 선조의 비망기에도 나와 있다.
"역적의 問徒문도 중에 賊黨의 진술에 관련되지 않은 자는 중한 율로 다스리지 말라"
막연한 소문이나 비방을 근거로 하지 말고 물증주의에 입각해 피해자를 최소화할 것을 명하고 있는 것이다. 서인의 입에 의존해 동인을 몰살시키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되겠다는 선조의 구상이다. -236~239-
- 한편 선조는 사태의 확산을 우려하고 있었다.
12.7일 , 선조는 좌의정 '이산해' 를 불러 당부한다.
"요즘의 양상을 살펴보면,사건이 번져갈 조짐이 있으니, 이는 내가 매우 좋아하지 않는 바이다. 이번 기회를 타서 평소 언론이 같지 않은 사람들을 모조리 적의 무리로 指斥지척한다면 그 해독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은 성격이 偏急편급하여 예로부터 언론이 중도를 얻지 못하던 경우가 많았다. 혹 조정에 강개하고 과격한 사람이 있어 賊變에 대해 분개한 氣를 이기지 못하여 과도한 논란이 미치지 않아야 할 사람에게까지 미친다면,어찌 온당한 일이겠는가. 만약 그러한 경우가 있을 적에는 경이 힘써 말려야 할 것이요. 이것이 경이 오늘날 이리저리 주선해서 사태를 진정시켜야 할 일이다. "
이는 서인들이 복권을 서두르고 있엇고, 선조는 이 같은 사태진행에 우려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동인의 영수인 '이산해' 에게 힘을 실어줌으로써 완급 조절을 시도하려고 했다.
선조의 이같은 적절한 속도 조절은 과거의 극단적인 사화에 비추어볼 때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할 대목이다. 사실 여기서 선조가 어느 한쪽에 극단적인 혐의나 의심을 가졌다면 참으로 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날아가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좌의정 이산해, 우의정 정철의 불안한 '동거' 정권이 이어지게 된다. 이는 선조 자신도 정국을 어는 정도 통제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는 뜻이다. -241~242-
- 방계승통, 늘 선조를 따라다니며 괴롭혔던 말이다.
명종비 인 인순왕후 심씨와 영의정 '이준경' 이 하성군 '이균' 을 왕위로 올리기로 했을 때 이균은 열여섯 총각이었다. 게다가 즉위와 함께 선조는 명종의 양자로 입적됐기 때문에 3년상이 끝날 때가까지 혼인을 할 수 없었다. 인순왕후와 주변 신하들은 선조가 인내해 주기를 바랄뿐이다. 게다가 혈기를 참기 힘든 10대 후반이었다. 혼인이 금지돼 있었지만 남녀 문제는 사생활이라, 제3자의 통제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251-
- 선조는 정식 혼인에 앞서 궁중 음식을 만드는 소주방 나인을 가까이했다. 그가 바로 임해군과 광해군의어머니인 공빈 김씨다. 그녀는 출산후유증에 시달리다가 광해군이 세 살 되던 해, 선조10년 , 1577년5월1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선조는 훗날 인빈 김씨가 되는 소용 김씨에게 빠졌다.
윤정란의 [조선의 왕비]에 따르면 선조는 일찍부터 공빈 김씨와 교제를 가졌다. 인순왕후 심씨는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선조의 正妃인 '의인왕후 박씨'가 아이를 갖지 못하는 石女로 판명되자, 김씨와의 교제를 허락했다. 이때 나인의 신분이 소용(정3품) 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리고 스물두 살 되던 해 장남 임해군을 낳자 단번에 정1품인 공빈(정1품) 으로 직첩이 뛰어올랐다.
[경국대전] 의 내명부 직위에 따르면 후궁의 경우,빈(정1품),귀인(종1품),소의(정2품),숙의(종2품),소용(정3품),숙용(종3품),소원(정4품), 숙원(종4품), 등의 서열이 있다. 상궁의 경우에는 정5품에 해당한다. 당시 김씨가 아들을 낳음으로써 얼마나 빠르게 직첩 상승이 이뤄졌는지를 알 수 있다.-252~253-
- 선조2년(1569) 12월경 선조가 현령 박응순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였다는 사실이다. 그가 의인왕후 박씨다. 선조로서는 왕위에 오른 지 2년 반 만이다. 의인왕후는 후궁들 사이에서도 '살아있는 관음보살' 이라 부릴 만큼 후덕했고, 미모도 뛰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아이를 낳지 못하는 석녀였다. 의인왕후는 선조에게 존경의 대상은 될 수 있어도 애정의 대상은 아니았다. 어쩌면 의인왕후는 선조에게 본의 아니게 깊은 고민을
안겨주었던 인물인지도 모른다. 적장자를 낳아야 한다는 선조의 갈망을 풀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후궁을 즐겨 찾는 선조를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임진왜란 때도 선조는 의주로 가면서 인빈 김씨를 데리고 갔고 正妃정비인 '의인왕후' 는 따로 강계로 피난을 갔다. 선조 26년(1593) 한양 수복 후에도 의인왕후는 줄곧 황해도 해주에 머물렀다. 결국 마음고생을 심하게 하던 의인왕후는 선조33년 (1600) 4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255-
- [당의통략] 의 저자 '이건창' 은 정철쪽이 먼저 도발한 것으로 본다.
성혼과 정철이 이산해를 축출하려고 모의를 했는데 이를 송익필이 이산해에게 알렸다. 사실 그의 이력만 놓고 보면 성혼과 정철의 논의를 밀고 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이건창이 '밀고' 라고 하지 않고 '누설' 이라고 한 것은 어쩌면 실수였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262-
- 우리는 흔히 선조가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고 있다가 갑자기 임진왜란을 당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선조는 끊임없이 북방의 변 과 함께 남방의 왜변 에 대한 대비책을 고민했다. 1588.3.26일 에도 왜변이 걱정된다며 죄인들 중에서 武才가 있는 사람들은 풀어주어 왜변에 대비토록 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당시 이순신도 함경도 녹둔도 둔전관으로 있다가 절도사 '이일' 의 무고로 파직당해 백의종군 중이었는데, 선조의 이 같은 명에 따라 이듬해 복직했다. 임진왜란 불과 3년 전의 일이다. 왜란의 조짐을 선조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당쟁은 이 모든 것들을 無化시키고 있었다. -273-
(참고글) ;
선조는 임진왜란이 터지기 몇 해 전부터 왜란으 조짐을 경계하고 있었다. 선조가 1589년 1월21일,비변사에 '불차채용' 의 특명을 내린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는 서열에 관계 없이 능력 있는 장수들을 뽑아 올리라는 것이었다. 이때 영의정 이산해와 우의정 정언신이 각각 이순신을 ㅇ추천했다. 중복 추천을 받은 것이다.-351-(참고글)
- 종계변무 ;
1588년 3월28일 선조는 모처럼 기쁜 소식을 들었다.
명나라에 사은사로 갔던 유홍이 종계가 변무된 사실을 조정에 알려온 것이다.
유홍(1524~1594)은 1588년 사은사로 명나라에 가서 종계변무를 관철시킴으로써 이조판서어ㅔ 올랐고, 이듬해 정여립의 모반 사건이 나자 이를 잘 다스린 공으로 평난공신 3등에 책록됐다. 더불어 같은 해 종계변무를 성공시킨 신하들을 공신으로 책봉한 광국공신 1등에 오른 것이다.
1591년 우의정에 오를고,1594년에 는 좌의정에 올라 해주에 머물고 있던 왕비를 모시던 중 그곳에서 사망했다.
[대명회전] 이란 우리의 [경국대전] 에 해당하는 명나라의 법전이다.
1509년에 간행되었는데 마침 1587년에 중수작업이 이뤄졌다. 문제는 이 [대명히전] 에 조선과 관련된 대목이 들어 있는데 거기에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고려 말의 권신이었던 이인임의 아들이라고 잘못 기록돼 있었다. 그것은 [명태조실록] 에 처음부터 잘못 기록되었기 때문에 그 이후 명나라 공식 문헌에는 계속 그렇게 기록되는 전통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 종계, 즉 이성계의 혈통을 바로잡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종계변무' 이다.
이 종계변무의 소식을 듣고 선조는 '東韓이 再造되었다' 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이것은 요즘 식으로 말하면 '제2의 건국' 과도 같은 것이다.
5월2일 '유홍' 이 돌아와 [대명회전]을 종묘에 바치게 되자 선조는 종계변무의 의미를 "금수의 나라에서 예의의 나라로 변한 것" 이라고 극찬했다. 또 신하들이 이 공은 모두 선조의 노력 덕분이라고 하자, 선조는 한사코 사양하며 그것은 모두 신하들의 노력임을 분명히 했다.또한 신하들은 선조의 존호를 올려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으나 선조는 아주 절절한 태도로 사양한다. 이는 선조라는 사람의 인품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잇다.
"이번에 종계가 바로잡힌 것은 조종의 쌓으신 덕과 경들이 극진한 충성으로 이루어졌을 뿐, 나는 거기에 털끝만큼의 공로도 없다. "라고 하여신하들의 "존호를 올려야 합니다" 라는 주청에 사양을 했다. (** 선조의 다른 진명목이라 할수 있다.) -274~277-
-(참고글)
조선 조정 최대의외교 현안이엇던 '종계변무' 는 1584년 선조 때의 역관 홍순언 이 정정사를 따라 북경에서 명나라 예부시랑(외무부차관) '석성' 을 만나서 해결되었다. 한편 석성은 명의 병부상서(국방부장관)로 승진하여 조선의 청병으로 명 조정에서 논란이 격렬할 때 조선 편에서서 파병을 찬성해 이를 관철시켰다. 이러한 석성과 홍순언의 사적인 인연이 명의 조일전쟁 파병을 성공시킨 한 요인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그 후 홍순언은 명나라 원병군 사령관 이여송의 통역관이 되엉 그와 함께 전장을 누볐다. 홍순언에 대한 기록은 [통문관지]에 상세히 실려 있고, [선조실록] [성호사설] [서포만필] [열하일기] [연려실기술] 등 모두 30여 권에 실려잇다. [조일전쟁-백지원 지음] -207-
- 대원군 이란 왕위를 계승할 적자손이나 형제가 없어, 종친 중에서 왕위를 잇게 될 때 그 왕으 아버지를 이르는 호칭 으로 선조가 처음이다. 그의 생부인 '덕흥군' 이 세상을 떠난 뒤였기 에 '덕흥대원군' 으로 추존되었다. -281-
-1591년 정철의 '건저의 ' 문제로 삭탈간직된 정철,윤두수,윤근수 3인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복귀되어 선조를 호종하여, 특히 윤근수는 명나라와의 외교르 담당했다
윤근수가 [대명회전] 전질을 갖고 오던 날 선조느 공신 책봉을 명한다. 이렇게 해서 선조 23년(1590) 초, 열아홉 명의 광국공신이 책봉되었다. 1등은 윤근수,황정욱,유홍이다. 2등은 홍성민,이후백,윤두수,한응인,윤섬,홍순언, 윤형이다. 3등응 기대승,김주, 이양원, 황임, 윤탁연,정철,이산해,유성룡, 최황 등 아홉 명이다. 그러나 광국공신 1등은 전략을 바꾸어 기회를 정확하게 포착한 선조 자신이았다-291-
- 2등 공신에 책록된 상통사 홍순언의 미담 ;
황정욱의 상통사로 북경에 들어간 홍순언은 석성과 '그녀' 의 도움으로 '종계변무' 문제를 해결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됐다.
광국공신 2등에 책록된 송순언은 궁궐수비대라 할 수 있는 우림위장에 오른다. 그러나 사간원에상소가 올라오자, 선조는 물리쳤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터지자, 홍순언의 활약은 가히 눈부셨다. 명나라의 지원병 요청,이여송의 통역관으로 선조와 이여송이 만날 때의 통역도 홍순언이 맡았다. 선조는 홍순언을 키웠고, 송순언은 선조를 구했다.-293-
- 신립은 역사의 죄인까진 아니어도 임진왜란의 대표적인 패장이다.
그의 참모장인 김여물응 조령의 지리적 이점을 활용하자고 제시했으나 신립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다가 참패를 당했다. 명나라 장수들 조차도 하나같이 조령과 같은 천하으 요새라고 칭찬했다. 그러나 역사는 신립을 마치 장렬하게 전사한 인물처럼 묘사하고 있는 것은 훗날의 역사 때문이다. 신립으 딸은 신성군(인조의 큰아버지) 와 혼인을 했고,
그의 매부 구사맹은 인조으 생부인 정원군의 장인이다. 게다가 그의 아들 신경진,신경인,신경유 등은 모두 인조반정에 참여해 공신으 반열에 올랐기 때문에 역사의 죄인으로 몰지 않았기 때문이다.-298-
- 한국은 임진왜란이라부른다. 일본은 '분로쿠.게이초의 役' 이라 한다 중국은 '항왜원조' 전쟁이라 한며, 이는 6.25를 '항미원조' 전쟁이라 부르는 것고 같은 맥락이다. -325-
- 이순신의 5대조는 세종 때 대제학을 지낸 '이변' 이다. 문신이면서 당대 최고의 외교관이었다. 이변의 손자, 즉 이순신의 증조할아버지인 '이거' 도 문과어 급제해 홍문관 박사,이조정랑을 지냈다.
할아버지 '이백록' 이나 아버지 '이정' 등은 벼슬을 하지 못했다.
이순신은 을사사화가 일어나던 1545년3월8일 한양 건천동에서 태어나어나 가정살림이 어려워 어머니 변씨의 친정인 아산으로 이사갔다.
그의 장인은 보성군수를 지낸 무장 '방진'으로 당시 영의정 '이준경'이 방진에게 이순신과 결혼시킬 것을 권유했다. -349-
- 선조는 임진왜란이 터지기 몇 해 전부터 왜란으 조짐을 경계하고 있었다. 선조가 1589년 1월21일,비변사에 '불차채용' 의 특명을 내린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는 서열에 관계 없이 능력 있는 장수들을 뽑아 올리라는 것이었다. 이때 영의정 이산해와 우의정 정언신이 각각 이순신을 ㅇ추천했다. 중복 추천을 받은 것이다.
선조의 '불차채용' 덕에 이순신은 복직하여 전라도순찰사 '이광' 의
아래에 있다가 정읍현감을 지낸다. 1591년2월, 이순신은 진도군수로 임명되엇다가 곧바로 전라좌도수군절도사(잔라좌수사)로 특진한다.
이순신을 남해의 요충지로 보내 공를 세우게 하라는 선조의 특명이다. 해군으로 변모시킨 장본인은 다름 아닌 선조다. 서둘러 인재를 뽑아 전면 배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은 선조 자신이었다. 선조가 내린 결정의 진가는 1년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마자 극적으로 들어난다.-351-
(참고글 ; 우리는 흔히 선조가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고 있다가 갑자기 임진왜란을 당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선조는 끊임없이 북방의 변 과 함께 남방의 왜변 에 대한 대비책을 고민했다. 1588.3.26일 에도 왜변이 걱정된다며 죄인들 중에서 武才가 있는 사람들은 풀어주어 왜변에 대비토록 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당시 이순신도 함경도 녹둔도 둔전관으로 있다가 절도사 '이일' 의 무고로 파직당해 백의종군 중이었는데, 선조의 이 같은 명에 따라 이듬해 복직했다. 임진왜란 불과 3년 전의 일이다. 왜란의 조짐을 선조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당쟁은 이 모든 것들을 無化시키고 있었다. -273- )
-대북파가 '중립외교'를 했다 하여 광해군시대를 재평가하자는 움직임이 우리 학계에는 일부 있다. 그러나 선조와 광해군의 인사 원칙과 정책을 조금이라도 비교해 본다면 그런 주장은 한 치의 설자리도 없다.
내성외왕 에 다가가려 했전 선조의 꿈은 결국 아들 광해군이 산산조각 내버리고 말았다. 끝. -422-끝.
**[內聖外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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