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의 (복잡하게 꼬여 있는) 개화기를 한국인들이 싫어하는 일본으 성공사례와 비교해서 서술한다는 것은 심리적으로 몹시 부담스러운 일이다. 불가피하게 일본은 잘했고, 조선은 못했다느 식으로 반복될 텐데, 누군가는 읽던 책을 집어던질 수도 잇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욕을 먹더라도 조선과 일본의 개항을 비교 하기로 마음먹었다.
1876년 개항한 조선은 34년 뒤인 1910년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망국을 향해 폭주하는 조선이란 기차에 올라탄 승객들은 비참한 상황이었다. 실제로 기차를 운전하는 기관사들은 기차를 어떻게 움직여가야 할 지 몰랐고, 또 일부는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려고 혈안이었다.-8-
- 이 책은 1876년 조선의 개항 이후부터 한일합방의 1910년까지의 34년을 아쉬워하며 썼다.
1900년 이후 상황은 조선이 자주적으로 개혁할 만한 내부동력, 경제적 환경이 사라진 상태 였음으로 소흘히 다뤘다. -13-
- 16세기부터 '주자학'과 '소중화사상' 에 함몰되어 조선을 제외하고는 모두 무식한 오랑케 나라인제 외부를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잇었겠는가.
현재 대한민국의 상황을 보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것 같기도하다. 경제,정치,외교,안보 등의 문제에서 누구의 주장이 옳은지, 누구의 주장이 틀린지 분별이 잘 되지 않을 때가 많다. 마치 17~18세기에 당파의 이익을 챙기고 백성을 내팽개쳐둔 당쟁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 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역사도 100년만 지나면 누가 옳았는지 선명해질 것이다. '그때 우리가 이런 길로 갔더라면.....' 하는 후회가 커질 수도 있고, 격심한 진통을 겪으면서도 '우리의 갈 길을 제대로 갔구나 ! ' 하는 감탄을 할 수 도 있다.
강력해진 후금과 좋은 관계를 형성하려 했던 광해군의 대외정책을 긍정적으로 재평가하거나, 병자호란에서 척화론을 주장해 후대까지 명성를 얻은 김상헌에 대해 비판 의 칼을 대는 것도 그런 이유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도 마찬가지다. 당시 민주화세력이 혼란을 조장하고 나라를 위기에 빠뜨린다고 비난했지만, 이런 민주화 과정이 없었다면 1960~1970년대 산업화 시절에 쌓였던 잘못된 관행과 비리,정경유착의 부정부패, 비민주적인 질서가 개선되지 못하고 현재까지 이어졌을 것이다. 혼란과 진통이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더 나은 상황를 만들기 위한 과정이라면 견디고 나아가는 것이 맞다. 붉은 사과 한 알을 얻기 위해 한여름의 찌는 듯한 더위와 태풍을 견뎌야 하듯이, 대가 없이 얻어지는 성과는 없다.
대통령 선거를 치른 뒤 3~4년이 지나면 우리는 늘 "손가락을 잘라버리고 싶다" 는 이야기르 하곤 했다. 잘못된 시선으로 잘못된 지도자를 뽑아놓고,나중에는 손가락을 자르고 싶다는 식으로 자학한다.
빆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묵묵히 일하는 지도자를 찾아 낼 수 있는 유권자들의 넓고 깊은 안목이 필요하다. 19세기 말 개화기 조선의 지도자들을 통해 21세기 대한민국 국민들이 얻을 수 잇는 교훈을 찾아볼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이다. -15~17-
- 일본은 1840년 1차 아편전쟁 때 바로 위기감을 느꼈는데, 왜 조선은 그로부터 16~18년이 지난 1856년 2차 아편전쟁 때가 돼서야 위기감을 느껴던 것일까. 이런 차이는 대체 어디서 오는 것이고, 왜 발생한 것일까? -49-
- 정보와 신간에 민감한 일본은 21세기에도 여전하다.
유럽과 미국의 주요 신간으 경우 약6개월 정도의 시차를 두고 일본어로 번역돼 나온다. 언어장벽에 의한 학문의 격차가 사라지는 것이다. -55-
- 1868년 일본이 메이지 유신에 성공하면서 국교 재개를 요청했을 때도, 일본에 무슨일이 있었는지를 들여다 보지 않았다. 이웃나라에서 무슨 변화가 잇었는지 조금도 파악하지 않은 채 일본이 '황皇' 등을 사용하니 외교적 격식에 맞지 않는다고 거부한 점은 한심할 따름ㅇ다. -65-
- 메이지 유신이 거론될 때 반드시 나오는 인물들과 장소가 있다. 조슈 번 소속의 과격하고 격렬한 존왕양이 운동가 요시다 쇼인 과 그가 운영하던 사설 교육기관 쇼카손주쿠, 그리고 그의 문하생들이다. 요시다 쇼인은 스물아홉 살이던 1858년 '안세이 대옥' 때 구속돼 그 다음해에 사형당했다.
흔히 한국 지식인들은 후쿠자와 유키치를 한국 식민지화의 원흉,일본 제국주의에 이론적 배경을 제시힌 인물 로 손꼽지만, 사실 그 시조는 요시다 쇼인이다.-67-
- '오경석'
1850년 중엽 청나라 문물을 소개하고,1860년대 서양열강의 접근 때,동분서주한 '오경석' 의 활약상을 보면 중인이 정치를 할 수 없었다 는 것이 얼마나 애석한 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의 성공이 '외국물' 을 먹은 하급무사들이 전면에 나선 덕분인 것 을 감안하면 신분제도에 묶여있었던 초기 개화사상가들의 처지는답답했다.
1866년에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오경석은 베이징에 급파돼 청나라 조정의 실무 관료들과 광범위하게 접촉해 양요에 대한 중국과의연락 및 대책 수집해 대원군에게 보고,프랑스 함대를 격퇴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
그는 친구 유대치에게 양반자제들을 뽑아 그가 중국에서 구입해 온 새로운 책들로 개화사상을 교육하여 나라에 일대 혁신을 일으키자고 제의했다. 박규수의 북촌 사랑방 모임이 발기된 것이다.
1875년 9월 일본이 무력시위로 개항을 요구했을 때도 오경석은 박규수에게 개국을 추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고종은 1876년 2월,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 를 맺고 개국을 한다.
오경석의 활동을 보고,신용하는 오경석 덕분에 박규수 역시 개화사상에 눈을 뜨게 됐다 고 설명한다. -7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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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쓰마 번의 사이고 다카모리는 1877년에 자살하고, 역시 사쓰마 출신인 오쿠보 도시미치 마저 암살되자 조슈 출신의 인물들이 주로 일본을 경영해나갔다. 조슈 지방 출신의 메지지 대신들은 누구인가?
요시다 쇼인의 수하에서 공부를 했거나 그의 영향를 많이 받은 사람들이다.
조선과 아시아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불쾌한 일이지만, 요시다는 일본의 국가전략을 짜서 이것을 널리 알려나갔과, 제자들을 통해 자신으 뜻을 실현해간 일본의 혁명가였다
'요시다 쇼인' 과 그으 문하생들' 과 비교해서 조선의 '박규수와 북촌 사랑방을 찾던 사재부와 중인' 들이 거론된다. 그의 사랑방을 찾던 사람들로는 김옥균, 박영효,홍영식, 박영교, 서광범,유길준, 김윤식, 김홍집,오경석,유대치 도 이 모임에 합류했다. -73-
(참고) -북촌 사랑방 손님들은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삼일천하' 로 끝났다. 김옥균과 박영효,서광범은 일본과 미국 등지에서 망명생활ㅇ르 했고, 박영교와 홍영식은 곧바로 죽었다,
김옥균은 1894년 상하이로 가서 뜻을 펴보려고 했다가 갑오개혁 직전에 조선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 '홍종우' 의 총을 맞고 죽었다. 그는 1910년 한일병합 이후 개화 혁명가로 복권됐으나, 1960년대 식민지사관의 탈피와 민족주의적 사관으 대두로 다시 친일파 김옥균으로 전락했다.친일의 개념이 나라를 팔아먹거나 일본에 부역했다느 개념을 적용하는 것이라면 김옥균에게느 부적절하다. 그는 일본을 모방해서 조선을 근대화시키고 싶은 대의를 실현하려다가 실패한 것이다. 갑오개혁을 실행한 김홍집 내각에 대해서도 친일파 내각이라고 낙인을 찍는데, 그것도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청나라의 구속에서 벋어나 하루 빨리 근대화해야 조선이 자주독립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김홍집에게 있었다. 김홍집은 일본이 군대를 밀고 들어와 강요한 1894년 갑오개혁 때 정권을 책임졌으나, 고종이 아관파천에 성공해 그를 파직하자 고종을 만나러 러시아 공사관으로 가는 길에 분노한 조선 백성에게 맞아 죽었다.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철종의 부마인 박영효 는 왕실 사람이라고 해서 일본으로부터 후작이란 작위까지 받고 노년을 따뜻하게 살았다.-86~87-
( 퍼온글 *홍종우는 왜 김옥균을 쏘았나: http://tkssjap.blog.me/90022008494
김옥균[1851~1894]- 조선 후기 정치가: http://blog.daum.net/philook/1572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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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은 후쿠자와 유키치 같은 지식인이 서양의 실상과 실체를 일본인들에게 널리 알려나갔기 때문에 일본사회 전체가 근대화르 향해 방향을 잡아갈 수 잇었다,
우리에게는, 독자적으로 '조선의 길' 을 제시해줄 만한 조선의 사상가가 부재했다. 개화의 필요성을 양반과 선비들이 받아들이고, 이것이 백성들에게 스며들어가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흥선대원군이 후쿠자와 유키치처럼 유럽과 미국을 주유했더라면, 최소한 1847년 예정대로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왔더라면, 그의 대외정책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밑도 끝도 없는 상상을 하며 아쉬움을 달랠 뿐이다. -113-
- 일제는 합병 유공자들에게 물질적. 정신적 보상을 잊지 않았다.
일본에게 받은 은사금이나 작위만 가지고 따져보면, 고종이 가장 많은 은사금과 가장 높은 지위를 보장받앗다. 이완용은 백작이 되고 15만엔의 은사공채를 받았다. 이런 표현을 보면 누가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하는지 명확하다. -119-
- '가쓰 가이슈 勝海舟'
1868년 7월에 에도는 도쿄로 개칭됐다. 에도 성이 피 흘리지 않고 새 천황에 넘어가는 과정에는 막부의 총사령관 '가쓰 가이슈' 의 역할이 컸다. 그는 천황파와 두쿠가와 막부가 무력으로 대치한 상황에서 '도쿠가와 요시노부' 를 자신의 非戰論으로 설득하여, 천황군을 맞이해서 한 번도 싸우지 않고 에도 성을 고스란히 내줬다고 '후쿠자와 유키치' 에게 비난을 받았다.
가쓰는 막부의 편에 서서 근대적 개방을 지향한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메이지 새 정부에서도 일했다. 그는 가난한 하급무사 집안에서 태어나 서양 병학을 습득하기 위해 난학을 배우면서 해안방어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1855년부터 3년 동안 나가사키에서 네덜란드 교관에게 해군에 관한 기술을 배우고, 1859년 군함 조련소 교수의 수장이 되엇다.
1860년 , 일본 최초로 태평양을 횡단한 '간린마루' 의 선장으로 미국에 갔다. 그는 미국에서 돌아와 일본해군을 근대화하고 해안방어체제를 발전시키는 데 공헌했다. -138-
- '도쿠가와 요시토미'가 14대 쇼군으로 결정되자, 막부는 1858년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인가하고, 네덜란드,러시아,영국,프랑스와도 같은 조약을 체결햇다. 이것이 '안세이 安政' 5개국 조약 이다. 이어 막부는 존왕양이파'를 무력으로 제압하는 '안세이 대옥' 을 결행했다. 이때 조슈 번사 요시다 쇼인이 처형된다. 이때를 기점으로 존왕양이파의 활동은 '막부타도' 라는 '도막 倒幕' 운동으로 전환된다. 존왕양이파인 미토 번 무사들은 1860년 3월 안세이 5개국조약을 체결한 '이이 나오스케' 를 살해 했다.-140-
(참고 글) "사쿠라다몬"
- 하급무사들이 존왕양이파에서 개국론자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막부으 쇼군 '요시노부' 가 평화적인 권력이양인 '대정봉환' 을 단행하고, 보신전쟁에서 막부파 총사령관 '가스 가이슈' 가 에도 성에 천황파를 무혈입성하게 한 일들은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불필요한 피를 보이지 않아 내부 역량이 낭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메이지 유신의 성공이 하급무사와 하급무사 출신의지식인들이 결합한 개혁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위로부터의 개혁이라고 볼 수 있는 이유이다.
한편 조선의 근대화가 유실된 이유 로 개혁과 혁명의 원동력이 되는 세력의 부재 이기 때문이다. "왕권 중심의 보수적 근대화를 이루려던 조선의 고민은 근대화를 추구할 계급 또는 계층이 부재했다" 라고 김동택교수는 평가했다. (교수신문,2005.90~91) -143-
- 갑신정변(1884년) 이 실패로 끝나자 박영효의 형인 박영교와 홍영식은 바로 살해됐고,일본에 망명한 김옥균,박영효,서광범 등에게 고종은 대역부도죄인으로 선고했다. 결국 김옥균은 민영익이 보낸 암살자 홍종우의 손에 죽고 말았다.
갑오개혁(1894년) 을 추진했던 김홍집은 고종이 있는 러시아공사관으로 가려고 지금으 세종로를 지나는 중에 성난 백성들에 의해 무참히 맞아죽었고 종로 사거리에 효수됐다. -150-
- 1865년 5월, 조슈 번의 '다카스키 신사쿠' 는 무력으로 막부를 타도한다 는 결정을 내렸다, 이는 1865년 4월에 막부가 조슈 번에 대한 2차 정벌을 선언하자 무력으로 대응하겠다고 결정한 것이다.
조슈는 1864년에는 막부 편에 서서 1차 조슈를 정벌했던 사쓰마를 끌어들여 1866년 1월 '삿조 밀약' 을 맺고 막부타도를 전면화했다.-173-
- 동인도회사 나가사키 지부장인 '토머스 글로버' 는 '사카모토 료마' 가 해원대를 이용해 일본 신식 해군을 창설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줬다. 해원대는 일본 상사의 원형이자, '미쓰비시' 의 전신이 된다. -218-
- 김옥균의 집은 한성부 북구 홍현인데, 그의 집 옆에는 서재필의집이, 앞에는 김홍집의 집이,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박규수와 홍영식, 서광범의 집이 있었다. 그는 1870년을 전후로 박규수으 북촌 사랑방을 들락거리며 개화사상에 눈떠가다, 1874년 개화당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렇게 김옥균은 역관인 오정석은 물론 역관이자 한의사인 유대치, 조선시대 천민이었던 승려 '이동인' 까지 신분을 가리지 않고 교유하고, 선배 관료로는 김홍집,김윤식이 있고 아래로는서광범,윤치호,서재필,유길준 등이 있었다, 철종의 부마인 박영효와도 친구였다. -221-
- 일본 정부는 1886년 8월 김옥균을 '오가사와라섬 '에 귀양을 보냈으며,1888년에는 북해도로 추방하여 연금시켰다. 그 뒤 도쿄로 돌아와
1894년 3월 청나라의 상하이로 망명을 하여 일본에서 만난 조선 최초으 프랑스 유학생 '홍종우' 와 상하이 행에 동행했다. 그러나 홍종우느 고종의 밀명을 받은 자객이었다. 홍종우는 상하이 '동화양행' 객실에서 쉬던 김옥균ㅇㄹ 암살했다.
1894년 4월13일 청나라 군함의 호송을 받아 김옥균의 시체와 함께 귀국한 홍종우는 고종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특별시험을 거쳐 홍문관 교리에 임명됐다. -228-
- 1877년 세이난 전쟁으로 '사이고' 가 자살하고, '기도' 가 병사한 뒤, 1878년 '오쿠보 도시미치' 가 암살되자 '이토' 는 오쿠보 자리를 계승해 내무경이 되었다. '유신3걸' 이 모두 죽고 '이토' 만 남아 번벌정부의 핵심으로 올라선 것이다.
1881년 이토는 대립하던 '오쿠마 시게노부' 를 추방하고 메이지 정권으 최고 실력자로 떠올랐다. -238-
- 가쓰라- 태프트 조약 ;
1905년 7월 미국의 전쟁부장관인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나중에 시어도어 루스벨트대통령의 후임으로 미국 대통령이 된 者임.) 를 도쿄에 파견해 일본 수상인 가쓰라 다로아 비밀회담을 갖고 위 조약 체결을 했다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지배권과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을 상호 인정한 다" 라는 밀약이다
미국은 동아시아 정책에 필요한 일본의 협력을 확보하기 위해 조선의 운명을 두고 흥정했다. 이는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은 '을사늑약' 을 맺기 4개월 전에 일어난 일이다. -247-
- 중국의 급부상과 미국의 재정위기 등으로 최근 미국의 아시아 회귀정책이 주목을 받고있다. ( *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2011년 발표한 '아시아 회귀 Pivot to Asia ' 정책은 미국의 동아시아 외교안보 전략이다 )
21세기 미국과 일본,한국,북한,중국 5개국의 관계를 1900년대초와 비교해서 잘 지켜볼 필요가 잇다.
중국은 미국이 한국 . 일본과 연합해 대중국 봉쇄전략을 구사하고 있다고 종종 비난한다.
한국은 북한과 통일하기 위해 미국과 일본은 무론, 중국과 러시아의 협조가 필요하다. 한국과 북한의 통일은 민족의 문제가 아니라 외교적인 문제라고 하는 이유이다. 미국이 (한국과 일본 중에서 자신들의 외교정책을 실현하기 위해) 어느 나라에 더 비중을 두고 있는지도 잘 살펴봐야 한다. 고종은 미국을 믿었으나 미국은 두 차례( '가쓰라-태프트 조약' 과 '루트-다카히라 비밀협정' )나 일본과 밀약을 맺으며 조선의 뒤통수를 쳤다. 미국이 한국 편이라고 하기에는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가 너무 미묘하다. 21세기는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와 비슷하다. -248-
- 개화론자들 사이에서도 갈등이 격해졌다.
'메니지 유신 3걸' 인 사이고 다카모리가 1877년 '세이난 전쟁' 을 일으켰다. 정부 최고 책임자로 세이난 전쟁을 진압한, '메이지 유신 3걸' 오쿠보 도시미치가 1878년 도쿄에서 자객에게 암살당했다.
이토 히로부미를 주측으로 하여 '메이지 헌법' 을 1889년 2월에 공포하여 일본 국체를 유럽의 영국처럼 완전히 바꾸었지만 그 내부는 여전히 중세의 일본이 숨 쉬고 있고, 중세의 일본인으로 살기를 원하는 많은 지식인들이 있엇다. 그 대표적인물이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와 [도련님] 의 저자 나쓰메 소세키이며,그는 일본 근대화에 대해 비판했다. -258-
- 일본은 임오군란이 일어난뒤 중국과 군비경쟁을 했다.
1883년 8개년 계획을 세워 대함6척,중함과 소함 각각12척,수뢰함과
포함12척 을 건조한다. 이 무렵 일본은 군함을 자체 제작할 수 잇을 만한 기술력을 확보했다고 봐야 한다.
1904년 러일전쟁을 벌여 승리를 하자 일본은 아시아 국가로 우뚝 설 수 있었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숭리한 것은 서양에서도 13세기 몽고족의 유럽 침략 이후 아시아 세력이 유럽 세력을 누른 첫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는 일본이 주장한 1930년대 대아시아공영론을 수용하는 근거가 됐다. -259-
- 메이지 유신 전후로 창업해 21세기에도 기업을 유지하는 장수기업들이 생겨났다.
1830년 스시의 이즈우, 1875년 도시바, 1887년 가오, 1874미쓰이 금속, 1876년 다이니혼 인쇄, 1889다이니혼 방적, 1888년 도시락을 파는 에키벤의 스료켄, 1872 화장품화사 시세이도, 1871년 가래제거제 용각산을 만드는 류카쿠산 등이 생겨났다. -265-
- '100년 전 개항기와 현재의 상황이 비슷하다' 는 이야기를 하면서 벌써 10년을 보냈다,
그러니 110년 전 개항기와 현재으 상황이 비슷하다는 이야기다.
(*그럼 120년 130년 ...... 등 계속 시간만 흘려보낼것인가?)
도대체 110년 전 개항기와 현재 대한민국의 상황이 어떻게 비슷한지 비교한 책은 없다. 현재의 상황과 110년전 상황이 어떤 차이가 있었는지 비교한 책이 필요한데. 그런 책이 없다. -282-
-일본의 개항은 성공하고 조선의 개항은 성공하지 못했다고 학자들이 분석한다. 그러나 실패의 원인을 외부에서만 찾는다면, 110년 전 실패한 조선의 역사에서 배울 것이 없다.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면 다른
모양과 형태로 반복되는 역사읜 소용돌이 속에서 현실을 헤쳐나가고 미래를 구상할 수 있는 힘을 얻지 못한다.
조선개항의 실패읜 원인은 조선의 내부적인 힘의 축적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16~18세기까지 300여 년 동안 누적된 적패 탓이기도 하다. 모든 분야에서 16세기 이래 조선은 진취성을 잃고 자만하고 자족하며 퇴행하고 잇었다. 이런 상황에서 19세기 중엽 외세가 개입하지 않았더라도 왕의 통치철학, 양반들의 사고수준, 삼정의 문란으로 인한 국가재정의 궁핍 등은 개항과 개화의 걸림돌이 되었다. -283-
- 2013년은 한국.북한.중국.징본.러시아에 새로운 정부가 활발하게 활동할 시기다. 동아시아에 공교롭게도 모두 보수적인 정권들,국익을 최우선에 두는 정부들이 들어섰다. 이런 점을 보면 110년 전 개항기르 떠올리게 한다. 개항기에 제국주의는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다른 나라의 권리와 이익을 침해하고 빼앗았기 때문이다. 중국은 세게 NO.2국가이고, 일본은 NO.3 국가이다. 친미외교를 하고 있는 한국에서 부상하는 중국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는 21세기 한국의 과제다.
무엇보다 일본이 걱정이다. 1988년 이래로 '잃어버린 25년' 을 견디고 있는 일본이 걱정이다. 하지만 일본은 노벨상 수상자 19명을 확보한 나라 라는 점을 잊으면 안된다. 특히,이중에서 열여섯 명은 모두 자연과학 분야에서 수상했고, 또 2000년 이후에만 열한 명이 수상했으니, 일본이 도대테 무엇을 잃어버렸다는 것인지 잘 따져보아야 한다. 잃어버린 25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저력을 자랑하는 일본을 보면서 개인적으로 두려움을 느낀다.
특히,외환보유액을 따져보면 , 2012년 12월 현재 한국은 사상 최대인 3,261억 달러라고 자랑하지만, 일본은 1조2,708억 달러이며, 중국은 3조2,850억 달러이다.
조선시대에도 그렇지만 한국은 일본에 비해 책도 많이 읽지 않는다. 이 대목은 정말 답답하다. 국가적 차원에서 다양한 소재와 주제의 책읽기 운동이 펼쳐져야 한다.
북한도 2012년 12월 인공위성 광명호를 우주공간에 쏘아올림으로써 중국.일본 등과 함께 '스페이스클럽10 '에 들어갓다.
한국도 2013년 1월 나로호를 비로소 발사에 성공했다.
북핵문제 해결을 위해 한국은 북한과 경쟁하며 중국과 미국, 일본, 러시아 등에 열심히 외교전쟁을 벌여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의 수준을 보면 효과적인 외교전략을 구상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아서 불안하다.
21세기 한국은 어느위치에 있는지, 현재 무었이 부족한지, 19세기 조선 개항문제를 잘 살펴보면서 고민해보면 좋겠다. 불쾌하고 불편한 책을
내는 이유이다. -286~288- 끝,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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