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257 /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 이덕일 지음

최해식 2015. 4. 4. 15:54

- '임헌회任憲晦' 는[오현수언五賢粹言] 에서 다섯 사람의 조선 학자를 분류했다.

덕치의 조광조, 도학의 이황, 학문의 이이, 예학의 김장생,

의리의 송시열 이다.-17-

 

- 현 시대는 앞 시대를 이어받아 이루어졌으므로 그가 현재에 미치고 있는 영향력의 긍.부정도 냉정하게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20-

 

- 왜군이 나타나기도 전에 국왕이 도망가자  백성들의 분노는 임금에 대한 충성이나 사대부에 대한 복종도 없었다. 전주에서 함경도 회령으로 귀양간 '국경인鞠景仁' 은 왜란 발발 다음해 선조의 두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이 근왕병을 일으키러 오자 체포해 왜군 장수 '가토 키요마사' 에게 넘겨주기까지 했다.-23-

 

-율곡이 쓴 [격몽요결]  제1장<입지>편에는,

"처음 배우는 사람은 먼저 뜻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반드시 성인이 될 것을 약속해야 한다. 털끝만큼이라도 자신이 남보다 뒤떨어진다는 생각에 자신을 버려서는 안 된다."

스스로 공자나 맹자 같은  성인이 되겠다는 자세를 가지고 학문을 하라는 권고이니 꿈 많은 소년의 가슴을 부풀게 만드는 권고이다. -29-

 

-송시열은 [맹자] 를 천 번 이상 읽었다고 소문난 사람이다. 그런 그도 <호연> 章에 이르자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글이 어렵고 쉬운 것이 아니라 나의 공력功力이 이르지 못한 데가 있는 것이다'  라고 탄식하고는 문을 걸어 잠그고 읽기를 오륙백 번이나 했는데 비록 글이 입에 쉽게 오르기는 했으나 그 의리는 종내 깨달을 수 없었다.

훗날 제자 '박광일' 이 물었다.

"선생님은 [맹자] 를 천 번이나 읽었다고 하던데 정말입니까?"

"내가  [맹자]를 천 번 읽었지만 앞의 두서너 篇은 일생 동안 외웠으니 몇천 번 읽었는지 알 수 없네" 라고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30-

 

- 명을 망하게 한 존재는 사실상 농민반란군이엇다. 그중 가장 세력이 컸던 역졸驛卒 출신의 '이자성' 이 세력이 커지자 스스로 '대순황제' 라 칭하고 북경을 공략해 함락시켜  명을  멸망시켰다.

그런데, 명나라 황손들도 버리는 명나라를 조선의 사대주의자들은 계속 받들어 모셨다. (조선은 희안하다. 왜 그랬을까?)

아마 청이 없었다면 '이자성' 의 순順나라 가 명을 대신해 중원을 지배했을지도 모른다.  북경이 함락되었을 때 명의 유일한 정예군은 '오삼계' 가 이끄는 부대였다. 청군을 치기 위해 요동으로 진격하여 산해관을 돌파하던 그는 북경이 이자성에게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군사를 돌리기로 결심하고 청나라 진영에 편지를 보내,청과 연합전선을 결성해

'이자성' 을 치러 북경으로 가자는 제안을 하고,항복하였다.-55-

 

- 서울 송파구 삼전동에  있는 삼전도비(대청황제공덕비) 는 약 350여 년 전인 1637년  병자호란 패전의 표시로 세워졌다,

그 해 1월30일 인조는 남한산성의 서문을 열고 항복으 상징인 남융복 차림으로 소현세자와 대신들을 거느리고 삼전도로 내려와, 청 태종이 앉아 있는 '수항단' 을 향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궤구복' , 즉 '삼배구고두' 의 항복례를 치렀다. -221-

 

- 백호 '윤휴'는 현종15년(1674) 7월에 밀소를 올려 지금 불벌을 단행하자는 상소를 올렸다.

"때는 쫓아갈 수 없으며 기회는 놓쳐서는 안 됩니다. 시기를 이용하고 사세를 틈타 자신의 보존을 도모하는 것도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때가 이르렀는데도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도리어 어지러움을 당하게 되고 하늘이 주는데도 가지지 않으면 도리어 재앙을 받는다' 고하였는데 오직 지금이 그러한 때입니다."

윤휴가 상소를 올린 1674년에는 명나라의 마지막 유장遺將으로서 번왕에 봉해졌던  '오삼계' 가 청나라 타도를 외치면서 군사를 일으켜 대륙이 요동치고 잇엇던  것이다.-293-

 

- 1680년, 숙종은 경신환국을  단행했다. 

환국은 정권교체를 뜻하는  조선의 정치용어이다.

즉, 남인이 무너지고, 서인이 득세했다. 6년여 만에 남인들의 세상이 가고 , 서인들의 세상이 온 것이다. 이는 또한 거제도의 유배지에서 남인들에게 칼을 갈고 있던 송시열의 세상이 다시 온 것이다, -299-

 

-

 

- 송시열에게 중요했던 것은 사대부라는 계급의 이익이었고, 서인.노론이라는 당의 이익이었다. 이를 위해 농민과 여성들은 억압 받아야 했다.

송시열의 예론은 이처럼 철저하게 사대부,노론, 그리고 남성만을 위한 예론이엇다.

1694년 갑술환국이후 그의 당 노론은 소론을 무리친 후 조선이 망할 때까지 일당 전제를 계속한다.

송시열이 사회변화를 실현시키는 데 자신의 목숨을 걸었다면 진정한 성인으로 많은 백성들의 가슴 속에 살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대부 계급의 이익과 노론의 당익을 지키는 데 목숨을 걸었다.결국 그의 당인 노론은 조선이 망할 때까지 정권을 잡았으나 이는 백성들의  나라가 아니라  그들의 나라에 불과했다.  따라서 송시열은 소위, 공자가 말하는 군자가 되지 못하고,소인이 되어버린 꼴이다. -396-

 

-....-398-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