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떤 사람을 못났다고 욕하기는 참 쉽지만, 그 못난 사람의 내면에 들어 있는 '진심' 을 읽어 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일단 어렵게라도 그 진심을 읽고 나면 거기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16-
- 가장 심한 훈척의 우두머리는 중종의 왕비 '문정왕후' 의 남동생 '윤원형' 이다. 문정왕후느 아들인 명종이 열두 살 어린 나이에 임금이 되면서 20년 동안이나 수렴청정을 했다. 이처럼 윤원형은 역대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권력 남용과 부정부패의 끝을 보여 주었다. -31-
-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인 성호 이익은 "선조 임금의 시대야말로 이땅에 인재가 넘치던 시절" 이라고 말했다.
결국 임진왜란만 없었다면 , 한국사에서 가장 문물이 발달했던 융성한 시대로 기억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황,기대성,이이,유희춘,허준,조식,정인홍,최영경,각재우,김면,유성룡,이순신,권율,이원익,이덕형,이항복,성혼,장현광,이지함,허균,정철,권필,송익필,이산애,최경창,신사림당,허난설헌,이옥봉,(미암 유희춘의 부인인) 덕봉 송 씨,한석봉,휴정(서산대사),유정(사명대사), 등의 인재가 선조시대에 두각을 나타냈다. -69-
-이순신은 서른두 살 나이에 겨우, 그것도 28명 중 12등이라는 성적으로 과거에 붙어 무신이 된다.
무과에 붙은 지 1년이 다 되어서야 '권관' 이라는 하급직을 받아 가장 근무여건이 좋지 않은 곳, 함경북도 삼수에 배치되었다.
그 뒤 1586년, 선조 19년에 북방 최전선인 녹둔도에서 여진족의 침략을막는 일에 참여하여, 녹둔도에서 패전한다. 현재의 작가와 학자들은 이 녹둔도 사건이 "병력이 부족하니 지원이 절실하다" 는 이순신의 요청을 묵살한 '절도사 이일' 의 전적인 잘못이라고 주장한다. '이일' 이 자신의 잘못을 이순신과 경흥 부사 '이경록' 에게 뒤집어씌웠다는 것이다.
이때도 선조는 이순신의 죄를 크게 묻지 않고, "백의종군하여 다시 공을 세울 기회를 주도록하오" 라고 지시했다. 그후 복직되어, 정읍 현감,진도 군수 같은 직책을 맡았다가 1591년 선조 24년 2월,마침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임명된다. 이순신의 나이 마흔일곱 살,임진왜란이 일어나기 꼭 1년 2개월 전이었다. -84~85-
-여기서 선조의 올바른 판단과 혜안 역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선조의 인사 방식' 을 보면 언제나 그처럼 사실 관계를 냉정하게 살핀 다음, 원칙에 따라 결정했다.
이런 선조의 원칙주의,사실주의의 인사 원칙 덕분에 묻혀 버리지 않고 빛을 낼 수 있던 인재도 많았다. 즉, '조헌' 은 임진왜란 당시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용감하게 싸우다가, 금산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한다.
'장필부' 는 1572년 선조 5년 여진족의 대규모 침입을 물리쳐 큰 공을 세웠다.
'윤탁연' 은 임진왜란때 함경도 순찰사가 되어 의병을 모집하고, 일본군을 물리치려 사방을 뛰어다니다가 객사한다.
'고경명' 은 임진왜란때 금산 전투에서 목숨을 버리며 힘껏 싸워 일본군이 전라도를 짓밟는 것을 늦추었다. 이처럼 선조는 한 번 잘못을 한 사람, 다소 흠이 았는 사람이라도 재기할 기회를 주었다. 즉, 이이, 이순신, 유성룡등에게도 재기할 기회를 주었다.
선조는 한 번 잘못 한 사람, 다소 흠이 있는 사람이라도 재기할 기회를 주려 애썼다. 이이 , 이순신, 유성룡,과거의 '잘못된 정권' 곧 윤원형 정권에 몸담았던 사람이라도 무조건 쳐내야 한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았다.-86~89-
- '기대승' 같은 성리학자들은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선조는 성리학 공부를 하는 틈틈이 궁궐 밖에서 살 때부터 보았던 역사책을 계속 탐독하고 있었다. 그래서 세상 운수라는 것이 좋기도 하다가 나쁘기도 하는 법임을 알았고, 융통성이라고는 없이 원칙만 고집한다는 게 반드시 좋지만도 않음을 알았던 것이다. -90-
(참고) ; 선조는 민간에서 지낼 때(임금이 되기 전에) 이른바 '임금의 학문' 말고도 여러 가지 다른 것을 익혔다, 그래서 이황이나 기대승의 말이 기본으로 옳다고 여기면서도, 성리학만을 중요시하고 역사 공부나 소설 읽기를 하찮게 여기느 태도는 거북하게 생각했다. -77- )
- 선조는 허준과 이순신에 대한 내공을 꿰뚫어보고 파격 승진을 시켰다.
허준에게느 정삼품 당상관 인 '통정대부' 벼슬이 내려졌다 그러자 의원에게 무슨 당상관이냐며 상소가 빗발쳤다.
이순신에게는 진도 군수인 종사품 당하관에서 전라 좌수사인 정삼품 당상관이라는 한꺼번에 관등이 세 단계 뛰어오르는 높은 벼슬을 내리자 이 역시 이치에 어긋나는 인사라며 철회하라는 상소가 빗발쳤으나 선조는 모두 물리쳤다.
선조시대에는 인재들잉 넘쳐났다. 인재들이 넘치다 보면 그 틈에 가려 당장의 유행과 맞지 않는 인재들이 그대로 쩌 썩어버릴 가능성이 높아지는데, 선조느 그런 인재를 저버리지 않고 재능을 알아보며, 끝까지 믿으면서 기회를 주고 ,날아드는 비난과 의심을 막아 주는 것이 진정한 인사 행정 사령탑의 책임이라 생각하고 선조는 왕으로서 그 책임을 참으로 훌륭하게 해냈다.
이처럼 선조는 선비들이 놓치기 쉬운 점이나 유학자들이 범하기 쉬운 실수를 잘 추슬러서 진주가 흙 속에 묻히는 일을 막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선조를 진정한 '인사의 달인' 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달인' 덕분에 [성학집요] 도, [징비록] 도,[난중일기] 도,[동의보감]도 모두 써질 수 있었다. -93~96-
-선조 시대에는 [신록] 이 두 번 써여졌다.
하나는 [선조실록] 으로, 이는 광해군 시절 동인에게서 갈라져 나온
북인이 정권을 잡았을 때 쓴 것이다. 따라서 동인에게 긍정적이다.
두 번째는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정권을 잡은 뒤에, [선조수정실록] 을 만들게 된다. 여기서는 반대로 서인을 긍정적으로 , 동인을 낮추어 썼다, -122-
- '이이' 가 병조 판서를 맡아서 근본적인 국방개혁과 대규모 양병(* 10만 양병설의 문헌 근거가 적다고 한다.) 을 추진하는 대담한 개혁이 '서인의 우두머리' 로 여겨지는 이이를 중심으로 추진되고 있다 고 하여
'이이를 사직시켜야 한다' 라는 동인들의 상소에 , 선조는 어쩔 수 없다고 여겨 이이를 병조 판서 직에서 해임했다, 어쩌면 평화에 찌들어 나약할 대로 나약해진 조선의 국방력을 다시 추슬러 강국으로 거듭나게 하고, 임진왜란을 맞아 최선의 방어책이 마련될 수도 있었을 기회는 이렇게 물거품이 되었다. -129-
- 선조는 "선비들이 중심이 되는 정치" 라는 원칙과 "인재를 함부로 버리지 않는다" 는 방침을 계속 지켜 나가고 있었다. 그동안 동인이 너무 설쳤으니 이젠 서인에게도 숨통을 틔워 줄 겸 동인을 어느 정도 억누르겠지만, 결코 서인의 한풀이에 장단을 맞춰 동인을 쓸어버릴 생각은 전혀 없었다. -136-
- '기축옥사' 때 최영경은 실제로 있지도 않은 '길삼봉' 이란 인물이라는 누명을 쓰고 투옥되었다.
'기축옥사' 로 인해 동인과 서인이 편을 갈라 서로 해치다 못해 죽이기까지 하는 사건이 꼬리를 물었다. 이는 지방 행정의 혼란과 불안을 가져왔다.
그래서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그토록 빠르게 지방 방어선이 무너진 이유 가 되기도 했다. 날로 격화되는 당쟁 때문에 도리어 힘이 나뉘는 상황이었다.
당쟁으로 인한 이 모든 일이 선조의 잘못이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당시 왕위에 있던 사람으로서 현명하게, 좀 더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해 대처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은 분명 남는다.
이를 보고 선조은 이렇게 생각했을 법하다.
"선비를 최우선으로 대우하는 정치 체제를 만들었건만, 그 결과가 이것인가? 진저리가 난다. 이제 누구를 믿고 누구와 정치를 해야 하는가?"
이런 환멸 때문에 선조는 이이가 죽은 뒤로 더욱 과격해져서 당쟁의 격화기에 오히려 더 소극적인 대응을 한 것은 아니었을까? -138~139-
- '종계변무宗系辨誣'
명나라에서 [대명회전] 이라는 책을 펴낼 때, 조선을 소개하면서 태조 이성계가 고려 말의 권신이던 이인임으 아들이라고 잘못 기재했다, 이를 바로잡아 달라고 중국에 끊임없이 요청하는 노력이 바로 종계변무였다. 마침내 선조가 재위 21년 (1588) 이를 성공시키자 선조으 ㅣ위상이 크게 올라갔다, 하지만 당시 조선에서는 일본의 최고 실권자들 계통을 잘못 알고 있었으니 일본으 입장에서는 분통이 터질 만도 했다. -150-
- 일본군의 침공 소식을 들은 조정은 먼저 '순변사 이일' 을 파견해서 대구에서 적을 막도록 했다. 뒤늦게 도착한 '이일' 은 지휘할 병력이 온데간데없음을 알고 멍하니 있다가 결국 자신도 도망쳐 버렸다-154-
- 전쟁 소식을 접한 조정에서는 서둘러 '순변사 이일' 을 대구로 내려보내려 했다. '이일' 은 한양에서 병력을 어느 정도 차출해서 내려 가려 했는데, 도무지 병사들을 모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흘이 지나도록 우물거리고만 있는 것을,선조가 어서 몸만이라도 내려가라고 떠밀었다. 하지만 대구에 집결했던 병력은 이미 저절로 흩어진 뒤였다. -162-
- 유성룡조차 이이의 양병설은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불순한 주장이라며 비난을 퍼부었다. 유성룡은 나중에 그 일을 깊이 후회한다.
그렇다면 선조은 어땠을까? 모두가 알다시피, 선조 대에서 임진왜란이 터지기 전부터 이미 백 년 이상 속으로 곪고 찌들어 온 국방 체제의 모든 폐단을 시원하게 개혁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노력은 했다. 앞선 임금들의 노력에 비하면, 선조의 노력은 상당히 평가 받을 만한 것이다-155-
- 임진왜란 일어나기 3년전,선조 22년(1589) 8월1일자 실록에는,
선조가 신하들과 나눈 대화가 있다. 이 대화에서 선조가 임진왜란이 일어날 상황을 놀랄 만큼 정확히 예상하고 있으며, 우리 방어 전략으 허점도 꿰뚫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신하들은 어이없을 정도로 느긋했다. 그들의 머리속에는 일본은 예나 지금이나 '왜구'일 뿐이었다.-157-
-선조는 다른 쪽으로도 할 수 있는 노력을 다 기울였다. 선비들이 정권을 잡고 난 뒤 무인들을 줄곧 업신여기는 분위기 속에서 그래도 선조는 전공을 세운 무인들에게 과분할 정도의 상을 내려 사기를 북돋웠다.
아마도 시간이 1,2년만 더 있었더라도 조선 군대가 일본군의 조총에 그토록 혼비백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1590년,선조는 우리 국방 태세의 근본문제였던 '정보 부족' 도 타개하려고 성종6년 (1475)에 교류가 끊긴 이래 무려 115년 만에 다시 일본에 통신사를 보내 그곳 사정을 알아오라고 시킨 것이다. -159-
-이처럼 살펴보면, 선조의 임진왜란 대비는 특별히 모자라가나 어리석은 점이 없었다. 하지만 실제 침공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대규모였으며, 그것에 제대로 대비하기에는 오랜 세월 동안 악화되어 온 폐단과 모순이 지나치게 컸다. 물론 상황이야 어찌 됐든, 국난 당시에 최고 통치자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는 이유만으로도 선조에게 충분히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무턱대고 "어쩌다 저런 사람이 왕이 되어서" , "선조만 아니었다면" 하는 식으로 비판하는 것은 매우 부당하다. -161-
- 선조37년(1604) 6월25일에 공신책봉을 발표했다.
호성공신(문관과 기술관)은 지나치게 후하고 선무공신(무인)은 소금처럼 짰다.
일본군마저도 그 기상을 기려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는 송상현, 육지에서 첫 승리를 거두었으나 정보가 잘못 전해져서 그만 처형당했던 신가,여러 차례 적을 격파한 정기룡,칠백 의총의 조헌, 홍의장군 곽재우, 전라도를 사수한 고경명, 진주성에서 장렬히 전사한 김천일, 그리고 사명당 같은 의병장도 책봉에서 배제되었다.
이처럼 무신들을 노골적으로 푸대접하는 것은 어려서부터 역사를 열심히 공부했던 선조가 도달한 어떤 결론 때문이었다. 무인에게 힘을 주면 나라가 혼란에 빠진다는.
이처럼 중앙의 힘이 약해지면 군벌이 나타나 반란을 일으키거나, 그 위기를 진압하면 그 진압한 장수가 또 다른 군벌이 되어 왕조를 쓰러뜨리는 일이 역사에는 숱하게 있어 왔다
당장 전쟁 도중인 1596년, 장수들끼리 손을 잡고 몰래 힘을 길러서
'이몽학의 난' 이라는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던가! 이제 또 그런 일이 없게 하려면 전쟁 영웅은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이 필요했다. -200~202-
- 선조는 조선 후기에도 별로 존경 받는 임금이 아니었다. 하물며 지금에 와서는 조선 최악의 임금으로 손꼽힌다. 하지만 사람의 참된 '역량' 은 때를 잘 만나지 않으면 제대로 빛나기 어려운 법이다. 또한 사람으 참된 '노력' 도 그가 처한 시대와 상황을 잘 살피고 냉정히 분별하지 않으면 제대로 드러나기가 쉽지 않다. -241-
-선조는 누가 뭐래도 성실한 인간이었다.
선조는 능력 부족을 느끼면서도 끝까지 최선을 다해 자신에게 던져진 과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러다 보니 고독과 우울에 빠질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간혹 실수도 범했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 대부분의 처지가 아닐까? 우리는 거의 누구나 시대에 등을 떠밀려 오늘날 우리가 처한 입장에 서 있다. 그리고 주어진 과제를 놓고 씨름하면서, 수십 년이나 성실하게 해내는 것이, 과연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일까?
그렇기에 우리는 선조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 진면목을 되새겨 보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막중한 책임을 짊어지고 고독한 길을 가는 사람. 그것은 우리 자신의 보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 그러지 않았던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남을 사랑할 구 있다고,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많이 닮은 선조를 더 사랑해야 하지 않을까. 사랑이 정히 힘들다면, 동정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최선이라 믿는 일에 마지막까지, 그야말로 악착같이 달라붙었던 선조의 성실한 심지에는 한 조각 존경을 바칠 법도 하지 않을까.
선조가 오늘날 우리를 보았더라면, 과연 뭐라고 말했을까?
"너희들이 더하구나. 너희들이 내 백성을 죽이는구나. 나는 최선을 다했어도 실패했는제 너희들은 그나마 그 최선조차 조금도 하지 않는구나....."
그러지 않았을까. 아마도 그래서 우리는 역사를 배우는 것일 터이다.
잘못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잘못딘 현실을 바로 잡고 바꿔나가기 위해서 이기 때문일 것이다.-246~247-
-....-248-끝.
[부록] 임진왜란 꼼꼼 연표
-1592년(선조25년) 4.24 ;조식의 제지이자 사위인 곽재우가 재산을 털어 의병을 모집했다. 최초의 의병 부대 탄생이다.
-1593년(선조26년) 2.12 ;권율이 행주산성에서 2,300명의 병사로 3만의 대군인 일본군을 무찔렀다. 한산대첩,진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불리는 행주대첩에서 조선군은 하루 동안 일곱 차례에 걸친 일본군의 공격을 버텨 냈고, 일본군은 물러났다. 권율의 공을 높이 평가하여 명나라 황제가 직접 상을 내렸다.
-1592년(선조25년) 3.7 ; 선조가 명나라 장수 '이여송'을 만나 다섯 번 절하고 세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오배삼고두' 의 예를 보이고는 일본과의 강화 협상 반대와 한양으로 진격할 것을 요청했다.
-1597년(선조30년) 7.16 ; 원균이 칠천량에서 처참하게 패배했다. 원군,이억기,최호가 전사했다. 배설이 칠천량에서 도망치는 바람에 전함 12척만이 무사했다. 거북선도 모조리 깨졌다. 수군이 전멸했다.
칠천량 해전은 원균이 지휘했지만, 기획하고 몰아붙인 것은 권율이었다.
-1597년(선조30년) 9.16 ; 이순신이 울돌목에서 전선 13척으로
적선 330척을 유인하여 이겼다. 명량대첩이다.
-1598년(선조31년) 8.18 ;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철군을 유언으로 남기고 병사하였다.
- 1598년(선조31년) 11.19 ; 선조가 유성룡을 파직하였다,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였다. 적선 200여 척이 가라앉고
50여 척이 도주했다.
-1598년(선조31년) 11.26 ; 일본군이 퇴각을 모두 마쳤다.
7년 전쟁이 끝났다.
-
'한국' 카테고리의 다른 글
256 / 조일전쟁 - 백지원 지음 (0) | 2015.04.04 |
---|---|
254 / 조선의 못난 개항 - 문소영 지음 (0) | 2015.04.04 |
252 / (에피소드) 한국사 - 표학렬 지음 (0) | 2015.04.04 |
247 / 조선왕조 실록 下 -백 지원 지음 (0) | 2015.03.29 |
246 / 조선왕조 실록 上 -백 지원 지음 (0) | 2015.03.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