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천 황현은 1910.8.29일, 한일합병조약 이 공표되자 9월8일 절명시 4수를 남기고 음독 殉死했다.
150여 년 전 근대화의 여명기에 일본의 사무라이와 조선의 선비들이 목숨을 버린 과정이 꼭 그와 같았기 때문이다. 일본은 봉건제 사회에서 근대화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수만 명의 사무라이들이 국가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투쟁에 목숨을 던졌다.
초야의 이름 없는 사무라이들이 근대화를 향한 열정으로 자신의 이념에 목숨을 던졌고, 그 죽음으로 나라는 살았다. 당시 일본에는 죽음을두려워하지 않고 나라를 바로 세우려는 지사들이 넘쳐났다.-4-
-한일합병사에 나오는 인물들이 모두 동향(죠슈번, 현재의 야마구치 현) 출신이다. 이중에 핵심인물들은 '요시다 쇼인'의 쇼카손주쿠에서
동문수학한 사이였다 지금까지 일본 대 조선으 국가 대결구도로 파악해 왔던 한일근대사에 관한 상식이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이다. 일본의 60분의 1에 불과한 1개 번에 조선이 당했다는 말인가! -7-
- 죠슈번 출신 8인 ;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노우에 가오루, 미우라 고로, 소네 아라스케,데라우치 마사다케,하세가와 요시미치, 가쓰라 다로, 이들 8인을 말한다.
이들이 모두 같은 죠슈번 출신이라는 사실은 조선이 일본에 병합당한 것이 아니라 일본 서남단의 일개 외방인 죠슈번의 '하기萩' 한 곳 출신이다. 특히 조선의 통감중, 초대( 이토 히로부미 ), 2대( 소네 아라스케 ), 3대( 테라우치 마사다케 ) 통감과 또 총독 중 초대(데라우치 마사다케) , 2대(하세가와 요시미치) 총독은 모두 죠슈번 출신이다. 무려 15년 (1905~1919) 동안을 죠슈 출신이 대를 이어 조선을 유린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를까.
이것은 그 특정지역 사람들이 시대적 사명으로 공유하고, 이것을 국가적 과제라고 생각하고,이를 실행하려는 독적 권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집단의식을 갖고있는 인물들의 계보를 따라 올라가면 그 정범에 단 한 사람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바로 요사다 쇼인이다.
한일합방 추진의 주도적 역활을 한 죠슈번 출신의 8인은 이 양대 인맥의 줄기에서 뻗어나온 가지들 일 뿐이다.
다다미 8칸짜릴 좁은 시골 학숙에서 일본을 뒤흔든 내노라하는 인물들이 배출됐고, 그들의 가지에서 또 그만큼의 인물이 쏟아져 나왔다. 쇼인은 그들에게 조선에 대해 무얼 가르쳤을까? -281~283-
-역대 총리중에서도 고이즈미 준이치로와 아베 신조安倍晉三 가 특히 요시다 쇼인을 추앙하는 발언을 많이 했다.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고이즈미는 일본 개항의 관문인 가나가와현 출신이고, 아베는 요시다 쇼인과 같은 죠슈번 출신 으로 외조부가 56,57대 총리를 지낸 기시 누부스케, 외종조부가 61,62,63대 총리를 역ㄹ 임한 사토 에이사쿠, 아버지가 외무대신을 지낸 가민당의 거물 아베 신타로 였다.
아베의 집안은 수상을 3명이나 배출한 야마구치현의 명문거족이다. 특히 아베느 요시다 쇼인의 수제자였던 '다카스키 신사쿠高杉晉作고삼진작' 를 몹시흠모하여 신사쿠의 이름에서 '晉' 자를 따왔다. 아베와 고이즈미가 매파 중에서도 유독 한국과 긴장관계를 유지했던 데는 이처럼 요시다 쇼인의 DNA가 가장 진하게 배어 있다. -101-
- 다다미 8장의 초라한 시골 학숙에서 스승은 제자90명을 키웠다.
그는 흑선이 내항한 날 '우라가' 만으로 간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이다.
스승이 참수되고 그중 재주가 출중한 4명의 준재들도 모두 20대에 세상을 떠나고 난 다음해,1868년 메이지유신이 단행됐다 때를 맞춰 목숨을 던진 준재들이 떠난 빈자리를 그 뒷줄에 섰던 남은 제자들이 차고나와 일본의 근대화를 완성했다, 그 공백을 메우고 우뚝 선 인물이 바로 이토 히로부미 였다 그들이 제국의아침을 열던 그때 나이도 30대였다
'겨우 서른에....' 그들은 제국의 아침을 열었는데 조선은 그때 무엇을 했는가 하는 자괴감이 머리를 누른다.
일본의 최남단 가고시마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시로야마 공원에 올라가면, 메이지유신의 元勳으로 사이고 다카모리 를 추모하는 현창관이 있다. 세이난 전쟁(1877년) 으로 큐슈 일대를 헤집고 다니던 사이고軍은 이 아름다운 고향 뒷산에서 최후의 결전을 치르고 목숨을 던졌다.
가고시마에서 구마모토를 거쳐 나가사키를 돌아 시모노세키,하기,야마구치까지 3천리 길에는 그들의 족적이 널려 있다.-19~20-
- 선비 는 전투의 승리 자체보다 명분이 목숨보다 더 중요할 때가 있다. 명분에 중독이 되면 죽음을 초월하여 만용에 가까운 객기가 발동하여, 조선은 겁도 없이 청나라에 반기를 들어 병자호란을 자초하였다.
반면에 무사집단 은 일단 전쟁을 벌여 지게 되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사실을 수많은 전투를 통해 뼈저리게 절감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길 수 있는 전쟁이 아니면 섣불리 칼을 빼들지 않느다. 전쟁으로 승산이 없으면 타협밖에는 없다.
흑선함대으 내항으로 에도 시내는전쟁 일보 직전의 대혼란이 일어났다,
어쨌든 사무라이들이 전쟁 임박을 상정하고 싸울 준비를 했다는 점은 당시 동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이 갖지 못한 일본만으 저력이었다.
사무라이, 그 자신들이 바로 전투력의 주체였다는 점에서 서세동점의 위기 상황에 똑같이 처했던 조선 및 중국과는 대응 태세에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특히 외부세력이 접근할 때 지배계급이 상무적 집단이냐, 아니냐 하는 점은 국가의 운명 자체를 좌우하게 된다. 상무집단은 전투으 관점에서 국가가 살아남을 수 있는 현실적 수단을 찾게 되고, 그것이 근대화라면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근대화에 매진 하게 된다. 초기 산업사회 기술적 발전은 대부분 군사력을 근대화하여, 이들 나라들이 제국주의 시대 중심국가로 부상했다. 사무라이 사회였던 일본은 군사적 도발에 대해 전쟁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새무기에 특히 호기심을 보여 신문물 도입에 주저하지 않았다. 따라서 19세기 근대화 과정에서 상무집단인 일본만이 근대화의 우등생으로 남을 수 잇었던 중요한 배경 이 바로 이 대목이다.
무사정권이었던 일본은 외세의 압력에 대해 전투으 개념으로 대응하여 일단 전투에 임하면 승리가 지상과제이기 때문에 승리의 관점에서 사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승산이 없으면 일단 납작 엎드렷으나 후일의 승리를 도모하기 위한 생존전략의 차원에서 적의 앞선 군사기술과 장비를모방하려는 의욕이 넘쳤다,
무사정권인 일본은 생존을 위한 군비 확충의 측면에서 이들 신식무기와 군사기술을 집중 흡수하여, 군사적인 부문에서 먼저 시작된 근대화 과정에서 일본이 단연 두각을 나타낼 수 잇었다. 흑선, 구로후네의 내항은 바로 그 결정적 전기를제공했다. -32~34-
- 일본은 북쪽의 홋카이도와 본토인 혼슈, 그 아래쪽의큐슈'九州'와 시코쿠'四國' 등 4개의 큰 섬으로 이루어져 잇다. 큐슈는 바로 9개의
'구니(나라)' 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고 시코쿠는 4개의 '구니' 가 있는데서 비롯됐다. 이처럼 번'을 하나의 구가로 인색했다는 것이 아직도 지명에 그대로 암아 있다. 에도시대에는 국가를 뜻하는 '구니國'가 곧 '번'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41-
-미국을 첫 접촉의 대상으로 만난 것이 일본의 큰 행운이었다. 당시 미국은 유럽 여러 제국과는 달리 멕시코전쟁(1846~1848)에서의 승리로 미국 서남부의 광활한 영토를 확장하여 서부개척에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에 식민지 개척에 눈을 돌리 필요도, 여유도 없었다. 따라서 일본도 천운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큰 행운이었자만, 행운은 그저 굴러들어오지 않는다 준비된 자만이 잡을 수 있다. 당시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그런 자격을 충실하게 갖춘 유일한 나라였고, 전 세계적으로 보더라도 서양 제국주의와의 접촉에서 식민지로 전락하지 않고 자력갱생에 성공한 국가로는 일본이 유일하다. 자기 스스로 헌법을 정하고 의회 제도를 도입하는데 성공한 유일한 나라였다.
동아시아 3국 중에서 문화적으로 가장 후진국이었던 일본의 무엇이
이런 일을 가능하게 했을까? 사무라이 정신은 아니었을까?-61~62-
- 요시다 쇼인이 노야마옥에 갇혀 잇었던 기간은 1854.10.24일부터 다음해 12.15일까지 이다. 이 동안 쇼인은 무려 600권이 넘느 책을 읽었다. 한 달에 40권, 하루에 한 권 이상 책을 읽었다. 그가 남긴 저작이나 그 후의 활동상을 보면 엄청난 독서를 했던 것 만은 사실다. -98-
- 1844년 '웨이위안魏源'이 [海國圖志] 를 출간했다. [해국도지] 는 아시아권 최초로 세계 각국의 역사,지리, 정치, 경제, 문화, 군사에 관한
정보를 집대성한 백과사전으로 최신정보의 보고였다. 이는 단순한 백과사전이 아니라 동아시아 3국이 근대화 과정에서 빈발하는 외세와의
충돌에서 자주성을 상실하지 않기 위해 교범으로 삼았던 이론무장의 교과서이기도 했다. [해국도지] 는 단순히 정보의 전달에만 주력한 것이 아니라 그 정보르 활용하여 어떻게 서양세력을 이길 것인가 하는 방법론에 편찬의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해국도지]를 본격적으로 인용한 실학자 '이규경' 도 [오주연문장전산고] 에서 '척사론' 의 관점을 강하게 부각시켰다.
이처럼 조선의 학자들은 '척사론' 의 관점에서 이 책을 해독했다,
이처럼 사무라이의 나라인 일본과, 선비의 나라인 조선의 관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대목이다.-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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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조선의 백과사전 [오주연문장전산고] 에 <유속격언변증설> 이라는 글이 있다. 여기에 부자가 되는 일곱 가지 방법에는 ;
1.근구검용勤求儉用
2.견예광학見藝廣學
3.불미주색不迷酒色
4.불흠부채不欠負債
5.자제일심子弟一心
6.주모불녕불主母不영佛
7.제부화해諸婦和諧
이상은 옛사람들이 말한 부자가 되는 일곱 가지 방법입니다.
[일일공부 - 장유성 지음]-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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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시다 쇼인이 노야마옥에 갇혀 잇었던 기간은 1854.10.24일부터 다음해 12.15일까지 이다. 이 동안 쇼인은 무려 600권이 넘느 책을 읽었다. 한 달에 40권, 하루에 한 권 이상 책을 읽었다. 그가 남긴 저작이나 그 후의 활동상을 보면 엄청난 독서를 했던 것 만은 사실다. -98-
- 사람이 출세하려면 천시,지리 , 인덕을 다 갖추어야 한다.
이토 히로부미는 이세 가지를 기가 막히게 타고 났다. 전통적인 신분질서가 파괴되던 유신의 격동기(천시)에 태어나 좋은 이웃(지리) 을 둔 덕분에 천하의 스승과 기라성같은 동문(인덕) 을 만날 수 있었다.-113-
- 요시다 쇼인은 '사규칠칙士規 七則'을 만들었다.
이는 사무라이가 지녀야 할 7가지 덕목에 대해 정리한 내용으로 전쟁 중에는 일본 군부가 암송를 장려했던 문건이다. 고 박정희 전 대통령도 일본육사 수학시절 이 '사규칠칙' 을 애독했다고 한다.
쇼인이 강조한 조항은 '뜻을 세우는 것으로 만사의 시작으로 한다.는 '입지론' 이었다. 마지막 7항에서는 '죽어서야 그만둔다. 즉 '생명이 있는 한 그만두지 않는다.' 고 강조하면서 이 4글자, 즉 '사이후이死而後已' 에 모든 것이 담겨 잇다고 했다. 한번 뜻을 세우면 '견인과결' 즉 '굳센 인내와 과감한 결단력'으로 목숨을 걸고 실천하라 '는 것이다. '뜻을 세우면 목숨을 걸라' 고 하는 쇼인의 가르침이 제지들에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었을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130-
- '사쿠라다문의 변變'
1860년3월3일, 요시다 소인에게 사형을 선고하게 했던 막부의 다이로 '이이 나오스케' 가 에도성으로 들어가는 길에 사쿠라다문 밖에서 존왕양이파 낭사들에 의해 암살되는 '사쿠라다문의 변' 이 일어났다. 이이 나오스케가 주도한 '안세이대옥'을 가장 많은 피해를본 지역이 존왕양이 사상의 발상지였던 '미토번(지금의 아바라키 현 중북부)' 이었기 때문에, 미토번으 존왕양이파 지사 17명과 사쓰마번의 1명 등 18명의 낭인들이 복수에 나선 것이었다,
이 암살은 막 싹트기 시작한 존왕양이의 기운을 뽑아내는 대숙청을 단행하면서 과감하게 개항을 추진한 이이 나오스케가 암살된 뒤, 막부에서는 더 이상 과단성 있게 나오지 않았고 존왕양이의 지사들은 득의양양하여 기세를 올렸다. 막부는 이후 정국주도권을 빼앗기고 7년 뒤 왕정복고를 수용하고 해체되었다,
'이이 나오스케'는 존왕양이파로부터 강한 반발을 사기는 했으나 일본의 개국, 개항과정에서 큰 획을 그은 인물로서 , 그 대표적인 사건이 1860년 1월 '견미사절단'이 미국으로 출발했다. 이 사절단에는 일본근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두 사람의 중요 인물이 포함돼 있었다.
1.가쓰 가이슈 ; 요시다 쇼인의 스승인 '사꾸마 쇼잔'에게 사숙하고 후에 그의 누이가 쇼잔과 결혼하여 처남,매부지간이 되었다. 후에 막부으 해군총독으로 일본 해군의 기초를 닦은 인물이다. 해군전습소 감독 시절 '사카모토 료마'를 발굴하여 해군에 입문시켜 '해원대' 의 바탕을 만들어 주엇다.
2.후쿠자와 유키치 ;난학,영학을 배워 양학의 전문가. 1861년에는 막부으 유럽사절단으로 유럽 6개국을르 순방하고 귀국, [서양사정]을 저술하여 전 국민의 필독서로 인기를 끌었다. -142~145-
-(다른 책 참고) 사쿠라다몬 의 변 :
"역사는 생물이구나" 역사는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있고,그쪽으로 가기 위해 "여기다! " 싶은 포인트에서 믿을 수 없는 우연을 겹치게 하거나,터무니없는 행운과 불운을 연출하기도 하는 법입니다.
"이이 다이로 "의 암살 이후 막부는 언덕길을 굴러 떨어지듯이 와해되어 갔습니다. 그러니 이 짧은 거리에서 목숨을 빼앗긴 <다이로大老> 는 다른 누구도 아닌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려는 "역사" 자체에 죽임을 당한 것인지도 모름니다. <이이 나오스케> 에게 [사쿠라다몬] 까지의 거리는 터무니 없이 멀었던 것입니다.[에도 산책 -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162~ 163-
-도쿠가와 이에모치(德川家茂) 쇼군은 다이로大老.(장관급)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1815~1860)를 임명하여 반막부파를 철저히 탄압했고 '이이 나오스케' 는 공포정치를 펼쳤다. 요시다 쇼인 등 이름난 지사까지 처형하였다. 1858년부터 이듬해까지 이어진 '안세이安政(1854~1859)의 대옥大獄' 이다.
그러나 권력 회복을 향한 막부의 몸부림은 오래가지 못했다. 때늦은 눈발이 날리던 1860년 3월24일 미토의 탈번 무사 등 18명의 지사가 에도 성 코앞에서 '나오스케'의 가마를 덮쳤다.(에도성 사쿠라다 門 밖에서 '이이 나오스케' 를 암살했다고 하여 '사쿠라다문의 변' 이라고 한다.). 참극의 충격은,선혈에 물든 눈까지 치워가며 함구령을 내린 막부를 비웃기나 하듯 순식간에 에도 성내에 퍼졌다. (이로써 막부의 독재체재는 붕괴하였다. ) [일본사 여행 -하종문 지음] -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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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키가하라 대전 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전국의 패권을 놓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 12만 명과 도요토비 가신단의 서군 8만 명이 충돌한 일본 역사상 최대의 전투였다
동군은 맹주인 도쿠가와의 본거지가 간토지방의 에도인 관계로 이 일대 다이묘 중심으로 편성됐고, 서군은 도요토미의 본성인 오사카성을 중심으로 한 간사이 지방 다이묘들로 편성됐다.
세키가하라전투는 임진왜란의 참전 주력이었던 도요토미의 서군과 참전하지 않았던 도쿠가와의 동군이 도요토미 사후 패권을 놓고 벌인 전쟁이다. -153-
- 스코틀랜드 출신의 무역상인 토마스 글로버가 1863년에 그가 조성한 양간이 지금도 '글로버가든' 으로 나가사키에 남아 잇ㅆ다.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 은 '글로버가든'을 무대로 만들어졌다, -223-
-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을 쏘다" 라니?
일본 사무라이적 복수 원념이 얼마나 집요하고 잔인한 것인지를 상징적으로 본 여주는 사건이다.
1939년 10월 15일 안중근으 아들 안준생이 조선총독부 외사부장 '마쓰자와 다쓰오' 의 손에 이끄려 박문사에서 이토의 명복을 비는 예불을 봉행했다. 이는 총독부가 연출한 비극의 드라마이다. 이 장면은 10월 18일자 '매일신보' 에 '극적인 대면, 吳越 30년 永釋( 영원한 화해) ' 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다음날 준생과 분기치(이토 히로부미의 둘째 아들. 당시 일본광업공사 사장이다.) 는 함께 박문사를 참배했다.
이 일은 당시 조선과 일본의 주요 신문에 '참된 내선일체' 의 상징적 사건으로 대서특필됐다.
이 사건으로 준생은 '호부견자虎父犬子' 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살다가 6.25 전란 중 부산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했고 그의 자손들은 미국으로 흩어졌다.
박문사는 1932년 10월26일 지금의 신라호텔 영빈관 자리에 세워졌다. 그 자리는 장충단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장충단은 1895년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를 보호하려다 숨진 궁내부대신 이경직 과 시위대 연대장 홍계훈의 충절을 기릴기 위해 고종황제가 1900년에 세운 제단이다. 명성황후 살해의 연출자였던 이토 히로부미의 보리사를 하필 이 자리에 세운 의도가 뻔히 드러난다. -301- (참으로 슬픈 역사의 현장이다.)
- 안중근가에 닥친 불행은 나라를 빼앗긴 백성이 자존을 지키고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더불어 상상을 초월하는 잔인함으로 뭉쳐진 일본이라는 나라의 국민적 품성과 국격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이른바 '유신지사' 라고 하는 사람들의 목숨에 대한 초연함, 그들이 자신의 목숨뿐만 아니라 남의 목숨도 너무나 가벼이 여긴다는 점이다.
유신지사들이 '죽음에 대해 어찌 이렇게 초연할 수 있을까 ' 하는 경이의 감탄을 금치 못하다가, '사람의 목숨을 어찌 이렇게 가벼이 여기나' 하는 경악의 개탄이 절로 나온다. 公義를 위하여 스스로의 목숨을 초개같이 던지는 부분에서 치솟던 감동은 , 남의 목숨 또한 터럭같이 버리고 베는 부분에 이르면 살신하여 이루고자 했던 것이 과연 천하의 共議였을까 하는 의구심으로 바뀐다. 그들이 목숨을 바쳐 이루려고 했던 것의 궁극적인 가치가 도대체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303-
- 사기를 당하면,
한국 사람 들은 '그 친구 사람이 좋아서' 라고 생각한다.
일본 사람 들은 그런 사람을 바로 '바카' 로 취급 한다. 방심했기 때문에 사기를 당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무라이시대에 '바카' 라는 욕은 칼을 빼들 각오가 돼 있지 않으면 할 수 없는 말이엇다. 욕 한마디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데 어떻게 욕이 발달할 수가 이 잇겠는가. 욕이 발달할 수가 없는 나라에서 , 욕이라고는 두 마디 밖에 없다고 '예의바른 일본인' 이라고 하는 말은 너무나 일본을 모르고 하는 얘기다. 칼날 위를 걸어가는 것과 같은 치열한 긴장을 요구하는 문화 속에서 생존하려면, 상대방에 대해 폐를 끼치지 않는 극도의 조심성을 생활화하지 않을 수 없다. 외부인들에게는 '참으로 예의바른 행동' 으로 비쳐질 뿐이다.
일본인들에게 일상화 되어 있는 사교적 수사가 '폐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ご迷惑o kakete ごめんなさい )' 라는 것이 있다. 그 자체로는 참으로 예의 바른 사람들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말에는 남이 자신에게 폐를 끼처는 행위도 용서하지 않겠다는 섬뜩한 경고가 담겨 있다.-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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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옷깃만 스쳐도 인연" 이라는 말이 있다. 평생 다시 만나지 못할, 단 한 번 우연히 스쳐 지나갈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에게 마음을 다하면 언젠가는 더 큰 보답으로 돌아온다. [1평의 기적 - 지음]-110-
- "삶에서 가장 신비한 일은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이렇게 살아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생애 단 한 번뿐인 인연이기때문이다" (법정 스님의 저서 [일기일회] 중에서. )
'지금 이 순간은 생애 단 한 번의 시간이며, 지금 이 만남은 생애 당 한 번의 인연' 이라는 뜻을 나타내는 불교 용어로, 한국에서는 법정스님으 법문으로 유명해졌지만 이 말은 일본에서는 너무나 보편적으로 사용되되는 관용어로써, 일본의 식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문구가 바로 '이찌고 이찌에 一期一會' 라는 말이다. 16세기 일본 다도의 개조 '센 리큐千利休' 선사가 다도의 기본정신으로 강조한 이 말은, 차를 같이 마시는
손님과의 만남을 중히 하고 차 한 잔에도 정성을 다하라 는 뜻이다.
그런데 이 말의 뜻이 기회가 주어지면 죽을힘을 다하라 는 것으로 확대 해석되면서 '잇쇼켄메이' 의 사상 과 대구를 이루게 된다.
'이찌고 이찌에 ' 에서 '잇쇼켄메이' 로 이어진 일본인들의 정신세계의 연결고리를 따라가 보면, 죽음과 귀결됨에 질리게 된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존재의 이유를 죽음으로 연결시켜 놓고 보면 , 일본인들은 '죽음 자체를 삶의 완성이 된다' 라고 보는 것 같다. 의아해서 역시 질리는 느낌을 준다. [죽어야 사는 나라 - 이광훈 지음] -311-
- 사무라이의 좌우명에 '잇쇼켄메이一所懸命' 라는 말이 있다.
'所'는 포괄적으로 자신이 소속된 집안, 조직을 모두 아우르는 말이다. "현재 맡은 바 책무에 목숨을 건다." 라는 의미다. 현대에 와서 이 말은 '일생현명一生懸命' 으로 진화했다, "스스로의 삶을 위해 목숨을 건다" 는 이 좌우명의 뿌리는 사무라이 정신에서 나왔다. 모두 '잇쇼켄메이' 로 읽는다. 요시다 쇼인의 수제자인 '4천왕' 중의 한 사람인
'다카스키 신사쿠'가 '속론당' 정권을 무력으로 타도하기 위해 거병을 결심하면서 했던 말로도 유명하다. 신사쿠에게 그 '잇료켄메이' 의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205-
- 일본은 사회적 집단 무기력증에 직면해 있다. 그원인을 '갈라파고스 현상'으로 설명하고 이있다.
갈라파고스 섬에는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고유의 종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곳만의 특이종들은 외부에서 다른 종이 들어오면 경쟁력을 잃고 도태된다.는 이론 으로 특히 일본의 가전업체들이 일본만의 기술적 우위에 도취되어 세계 트렌드를 무시한 결과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는 지적이다. 일본이 갖고 있지 못한 기술은 어떻게 해서든 배우려고 하지만, 일단 기술을 습득하면 철저하게 내재화의 패턴을 답습하여 외부와의 융합 내지는 조화를 거부하는 것이 일본의 특징이다.
근대화 과정에서 명멸한 일본 260여 개 번의 도태과정이 꼭 이와 같다. 대부분의 번은 근대화의 조류를무시하고 막부를 고수하다가 사라졌고, 일찍이 눈을 뜬 죠슈와 사쓰마가 양대 축으로 일본의 근대화를 이끌었다. 또 일본이 아시아의 근대화를 지원하면서 선린우호를 바탕으로 시장을 넓히는 전략을 사용하여 국력을 산업기반의 강화에 집중했다면, 일본은 오늘날 한국이나 중국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위치에 올라가 있을지 모른다. -322~323-
- 일본과 조선의 근대화를 추적해보면, 출발은 비슷했으나 군대화에 대한 자각과 치열성에서 켰던 격차는 조선에게는 망국의 비싼 대가로 귀결됐다. 그때는 조선이 갈라파고스였고, 일본이 경제대국으로 올라선 그 100년 후에는 일본이 갈라파고스였다.
힌국은 1995년에 1인당 GDP 1만 달러를 넘었지만 2009년까지 16년째 2만 달러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다.
일본은 1981년 1만 달러를 돌파하고 6년 만에 그 벽을 넘었다. 그 후 '잃어버린 10년' 이 시작되기는 하였지만 일본의 저력은 여전히 막강하다. 한국은 정말 뒤를 되돌아보지 않아도 될까. -323-
- 가토 기요마사는 임진왜란에서 울산성 전투에서 조명연합군에 포위돼 죽을 고비를 넘기고 귀국하여 7년에 걸친 대공사 끝에 일본 3대 명성으로 꼽히는 구마모토성을 축성한 인물이다. 울산성 전투는 1597년 12월 권율장군의 조명연합군 5만 명이 가토군을 포위 공격하면서 당시 가토군으 5천 여 명 남짓,추운 겨울날씨와 굶주림,갈증으로 아사 직전의 가토군은 이듬해 1월 일본의 지원군에 힘입어 포위망을 뚫고 귀국길에 오를 수 잇었다. 구마코토성의 축성에는 조선에서 글려간 토목수들이 트게 기여했다. 구마모토성 앞에는 그때 끌려간 사람들이 집단 거주했던 '우루산마치蔚山町' 가 전차역 이름으로 남아 잇다. -324-
-[퍼온글] ; http://blog.daum.net/migiro/1082
"울산왜성 그리고 그 처절했던 도산성 전투(1편)"
울산왜성 그리고 도산성 전투
그 처절했던 시간 속으로~
■ 1편, 울산왜성의 도산성 전투
■ 2편, 서생포왜성과 왜장 ‘가토 기요마사’ (다음 장에)
-" 서생포 왜성 울산 광역시에 있음 " http://blog.daum.net/cko2009/6980255
오늘은 우리나라의 슬픈 역사의 한 단면인 임진왜란 때
왜인들에 의해 축성된 서생포 왜성을 소개합니다.
서생포 왜성은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서생리 711 에 있으며
대한민국 울산광역시의 문화재자료 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제작된 시기는 1593년 임진왜란 때에
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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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토 기요마사의 좌선봉장으로 내침하였으나, 조선의 문물이 뛰어남을 흠모하여 귀순한 '사야가, 즉 김충선' 이다. -328-
- 일본에게 사야가의 투항이 치욕이었다면 조선에는 김환이라는 인물이 잇다. 정지묘의 가토 기요마사 무덤 좌우측에는 기요마사의 가신 2명의 묘가 같이 잇다. 오른쪽은 '카네요시' 왼쪽에는 조선인 김환의 묘가잇다. 김환은 임해군의 시종 내관으로 조선 조정의 부패와 폭정에 반심을 품고 있던 차에 기요마사의 인품에 반해서 따라 나섰다고 한다.-329-
- 요시다 쇼인의 쇼카손주쿠는 다다미 8장의 이 조그만 방에서 그렇게 기라성같은 인물이 어떻게 쏟아져 나왔을까 하는 의문에서 시작된 추적과 답사는 결국 쇼카손주크에서 마침를 찍었다.
지금 쇼카손주쿠 옆에 서있는 수령 수백 년은 됨직한 소나무는 그때도 서 있었을 것이다.
쇼카손주쿠의 정신은 어디에서 계승되고 잇을까?
'마쓰시다정경숙' 은 파나소닉으 창업자인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새로운 국가경영을 위한 지도자 육성ㅇ이 필요하다' 며 1979년 사재 70억 엔을 들여 설립한 사설 교육기관이다.
쇼카손주쿠와 마쓰시다정경숙 출신들이 정계의 중심에 진출하는 과정은 기득권을 연결고리로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너무도 흡사하다. 오늘 일본이 잠시 활력을 잃고 잇지만, 150년 전 메이지유신을 추진하던 당시 사무라이들이 느끼고 있던 막부체제에 대한 무력감은 지금보다 훨씬 더했다.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메이지유신은 일어났다. 마쓰시다정경숙 출신들은 무엇보다 이 사실을 뇌리에 각인하고 자민당체제르 몰아내기까지 이를 깨물었을 것이다. -332~335-
-마쓰시다정경숙에는 '5서훈' 이 잇다.
"항상 뜻을 품고 해야 할 일을 열심히 하면 어떤 고난에 부딪쳐도 길은반드시 열린다. 성공으 요체는 성공할 때까지 줄기차게 노력하는데 있다."
요시다 쇼인이 '士規七則' 에서 강조했던 '입지론' 과 일백상통하는 내용이다. 쇼인은 '뜻을 세우는 것을 만사의 시작으로 한다' 면서 한번 뜻을 세우면 목숨을 걸고 실천하라고 했다. 이들 두 사숙은 모두 일본이라는 나라으 새로운 틀을 짜고자 하는 사명의식은 전혀 다르지 않다. 이 점이 중요하다.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화를 추진하던 시기에 쇼카손주쿠가 있었고, 자민당의 54년 장기집권체제를 종식시키고 새로운 일본으로 개조하고자하는 시기에 마쓰시다정경숙이 있다는 사실. 그때 조선에느 쇼카손주쿠가 없었고, 지금 한국에는 마쓰시다정경숙이 없다.
150년 전 일본의 사무라이들은 그것을 해냈고 조선으 선비들은 그러지 못했다. 그때 일본으 사무라이들이 가졌던 근대화에 대한 열정과 치열함은 이제 한국의 자산이 되었고, 조선의 선비들이 느꼈던 무력감은 일본의 굴레가 되었다. 이제 마쓰시다정경숙이 그 굴레를 벗어던지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다. 오늘의 마쓰시다정경숙이 그 옛날 쇼카손주쿠가 그랬던 것처럼 한국에 재앙으로 작용할 조짐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역사에서 교훈을 배우지 못하는 민족은 똑 같은 역사의 반복을 경험한다' 라고 했던 '아놀드 토인비' 의 말은, 식민통치의 경험을 겪은 한국에 주는 엄정한 경고다.
마쓰시다정경숙의 30년으 세월을 쏟아부어 정권교체의 간성을 길러낸 일본의 저력을 과소평가한다면, 역사는 똑 같은 치욕의 반복을 통해서 그 미몽迷夢에 복수 할 것이다.
(왜냐하면)'쇼카松下' 에서 '마쓰시다松下' 로 , 소나무는 오늘도 자라고 있다.(있기 때문이다). -336~337-끝.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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