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함규진 선생의 [왕의 투쟁] 과 최용범 선생의
[다시 쓰는 간신열전] 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10-
- 조선 왕조 500년 동안 일어난 사건 중 가장 큰 사건은 무엇일까요?
명의 멸망입니다.
조선은 문화, 학문,법률 등 전 분야에 걸쳐 명을 그대로 모방했다. 명에 대해 알고 싶으면 조선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된다. 조선은 명이 망한 뒤,멸망할 때까지 200여 년간이나 명을 잊지 못했으며, 명 대신
'소중화' 라고 부르며 명의 '계승국' 임을 자처했다. -18-
- 좌우간 명나라의 경조사를 제 아비 것보다 더 챙겼다.
정월 초하루에 하정사, 황제 생일에 성절사, 동짓날에 동지사, 황태자의 생일에 천추사, 고마운 일 이 있을 때 감사하는 사은사, 급한 일을 알리는 주청사, 항실 경사 때 보내는 진하사, 황실에 불행한 일이 있을 때 보내는 진위사 등이 있었다. -20-
- 1415년 태종15년, '서얼금고법' 이라는 개 같은 법이 제정 되면서
서얼들은 생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서얼의 자식은 대를 이어 서얼이었다. 그래서 서얼들은 자식을 낳으려면, 수없이 고민을 해야 했다. 까딱 잘못 판단하면 애끚은 자식에게 자기와 똑같은 절망의 인생을 물려주게 되기 때문이었다. 통칭 양인 첩의 자손인 '서' 냐, 천인 첩의 자손인 '얼' 이냐에 따라 또다시 차별을 받았다. -48-
- 과거는 소과와 대과로 나뉘는데, 소과는 생원시와진사시가 잇다.
생원시는 사서삼경을 검증하는 것이고, 진사시는 문장 실력을 검증하는 시험이다.
소과 는 1차인 초시와 2차인 복시 등 두 번의 시험이 있었는데, 두 번 다 합격해야 생원이나 진사란 호칭을 받았다.
생원이나 잔사가 디면 시골동네에서는 양반으로 대접받고 큰 소리치며 살 수 잇었다. 물론 군대도 안 가고.
소과에 급제하면 성균관 유생이 되거나 대과를 치를 자격이 주어졌다. 대과 가 바로 우리가 과거라고 얘기하는 시험이다. 대과는 1,2,3차 시험으로 이루어지는데,대과를 20대에급제하면 천재에 속한다. -54-
- 지역차별때문에 조일전쟁이 일어났을 때 서북지방에서는 의병이 전무했을 뿐만 아니라, 선조가 의주로 도망칠 때는 돌을 던지고, 왕자 둘을 잡아 일본군에 넘기기도 했다
조청전쟁 때 역시 이 지역 주민들은 의병모집에 나가지 않았고, 청군이 내려올 때도 구경만 하고 잇어서 청군이 겨우 닷새 만에 압록강에서 한양까지 도달할 수 잇엇다. 결국 순조 때 홍경래의 주도로 난을 일으키게 된다. 이런 개 같은 신분차별,지역차별은 조선초부터 멸망할 깨까지 500년에 걸쳐 내려왔던 것이다. -59-
- 우리민족의 주류는 한인(한반도인)과 예맥족(고구려 민족),그리고 여진인의 피가 혼혈되어 형성되었으며, 그외에도 거란,선비,몽골,한족(중국인) 등 수많은 피가 수혈되었다. 이제부터라도 어디 가서 단일민족 소리하지 마라.무식하다.소리 듣는다. -78-
-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하라" 는 최영이 한말이 아니다.
'최원직' 이 그의 아들 '최영' 에게 한말이다.
최영은 충숙왕(고려 27대)1316년, 종6품 최원직의아들로 태어났으며,커가면서 힘이 장사였다.-106-
- 세종 '이도'는 한글을 창제했다.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에 대놓고 자랑할 것은 한글뿐이다.
한글날을 폐지한 무식한 위정자들아, 반성 좀 해라. 세종은 인쇄용 갑인자를 발명하여 115권의 서책을 편찬하여 책을 좋아하고, 또 많은 책을 읽은 왕 은 우리나라 역사상 세종가 정조뿐이었으며 둘 다 명군이었다. 제발 책 좀 읽어라-145-
- 화차는 1454년 문종이 개발했다 고 알려져 잇다. 문종 1년에만 700대가 제작되어 전국에 배치되었다. 바로 이 화차의 개량형이 행주산성 전투에서 수백 대 배치되어 왜군에게 화력을 퍼부음으로써 행주대첩을 이끌어내던 것이다.
1377년 최무선이 이끌었던 '화통도감' 에서 태종 때인 1417년 '화약감조청' 으로 이어졌고, 1416년에는 '최해산' 이 주도 하에 '화통교사군' 이라는 특수부대원 1만여 명이 양성되었다. 그 후 , 세종,문종 때 이르러 크게 발전했다. 이로써 조선은 15세기세계 최강의 화약무기 보유국이 되었다. 그때 개발된 신기전, 화차,사전총통 등 화약무기 전통이 전승되어 조일전쟁 때 조선이 살아남을 수 잇었다.-166-
- 일본어는 우리글과 어순이 같아 배우기 쉽다고 한다.
스페인어는 우리말의 동사와 구조나 용법이 거의 같아 일본어보다 더 쉬운 외국어다. -214-
- 조선은 연산군(10대)대 이후부터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후로는 무능하고 멍청해서 밥값도 제대로 못하는 임금들이 줄을 이은 데다 전쟁이 계속되어 백성들의 삶은 비참해졌으며, 조선 말기까지 아무런 희망 없이 살아가게 되엇다. 조선은 이쯤에서 망했어야 했고, 다른 왕조가 들어섰어야 했다. -257-
-결론적으로 조선 왕조가 개국한 지 100년쯤 지났을 무렵인 성종과 연산군의 치세시가 조선 왕조 전기간 중 가장 풍요로운 시기였다. -274-
- 조선은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했기 때문에 연산군 시대 이후에는
신권이 왕권을 압도하여 신료들끼리 주도권ㅇ 다투게 되어 이것이 조선 중기 이후에는 당쟁으로 변질되었다.
왕권보다 우위에 선 신권이 정국 주도권을 놓고 서로 다툰 사건으로 조선 쇠퇴의 요인 이 되었다.
사실 성리학 이란 태평성대에는 쓸모가 있는 학문이겠으나 전란과 같은 위기상황이 닥치면, 지나친 명분주의에 사로잡혀잇어, 위기에 전혀 효과적 대응을 하지 못하는 결정적인 단점 을 갖고 있다.
조일전쟁과 조청전쟁 등 국가적 위기에서 성리학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시대가 바뀌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사상과 개혁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성리학 은 명분만 찾는 고루함 때문에 시대와 호흡을 할 수 없는 죽은 학문이었다. 결국 조선으 쇠퇴는 진부하고 고루하기 짝이 없는 유교와 실질 생활과 동떨어진 채 성리학을 추종하면서 이빨만 까는 사대부들의 책임이었다. 그걸 나중에야 누가 알고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라는 책을 썼다. -276-
- 조선은 이씨들을 위한 왕조였다. 백성은 '가렴주구'로 도탄에 빠져 잇는데 양반들은 실생활과 관련 없는 주자학으로 소일하던 시대였다. 특히 조선조 말기는 지식인이건 민중이건 생각 잇는 사람들은 모두 절망과 체념에 빠져 잇던 시대였다. [10년후 , 한국 - 공병호지음]-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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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의 업적중에 '국기일' 폐지가 있다. 그러나 연산군이 죽은 뒤 국기일이 도로 복원되어 충신들은 업무를 보고 싶어도 못 보게 된다.
[연산군일기] 나 [중종실록] 등을 잘 살펴보고 모쪼록 행간을 잘 살펴 묻혀 잇은 진실을 찾아내어 연산군도 재조명을 받아야 할 것이다.
[연산군일기] 나 [중종실록] 등을자세히 살펴보면,연산군을 폐위시킨다음 바로 죽일 만큼 질이 나쁜 인간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행간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279-
-홍길동이 의적이었나?
연산군 시대의 대표적인 도적으로 홍길동이 있었다. 우리는 홍길동을 광해군 때 허균의 소설을 통하여 알고 잇다.
그러나 실상은 일개 간 큰 도적에 지나지 않았다. 홍길동은 연산군 6년에 체포되어 참형에 처해졌다.-280-
- 16세기가 시작된(1506) 중종대부터 조선은 완연히 기울기 시작했다.
중종은 재위 40년간, 거의 반 세기 동안 아무것도 한 일이 없이 등신짓만 하다가 아까운 세월 다 보낸 것이다. 중종 뒤로 명종,선조 등 멍청이들이 줄을 잇다가, 조일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조선은 완전히 주저앉았다. 조선은 이쯤에서 망했어야 했다. -310-
-11대 중종 ; 1506~1544
40년이나 공밥을 축내고 죽다.
-정비 장경왕후(대윤 집안)
-계비(3번째) 문정왕후(소윤 집안)
-삼포왜란 발생.
12대 인종 ; 1544~1545
정비 장경왕후의 아들 으로 본명이 '이호' 이다. 1544년 즉위.
8개월만에 병사(독살) 함. 후사없었음.
13대 명종 ; 1545~1567
인종의 이복동생 즉,계비(3번째) 문정왕후의 아들, 경원대군이 즉위( 12세에 즉위함으로 모친인 문정왕후가 8년간 섭정을 했다.) .문정왕후에게 얻어맞으며 살다 22년 동난 한 일 없이 죽었다.
-1545/명종 원년, 을사사화 (소윤;윤원형派 가 대윤;윤임派 을 몰아냄)
발생.
-1555년 을묘왜변 발생 ; 왜구들이 전라도 강진,진도 일대를 침범,약탈함.당시 판옥선을 개발/배치함. (그 후 수군의 주력선이된 세계 최강 판옥선 함대 를 이끌고 이순신 장군이 일본 수군을 쉽게 물리쳤다.)
14대 선조 ; 1567~1608
덕흥대원군(중종의9子) 의 3子 '하성군' 이 왕이 됨.
-기축옥사,
-조일전쟁이 일어났다.
하여간 얼뜨기 중종과 소인배 선조 둘이 재위한 기간만 거의 1세기(1506~1608) 다. (이 기간동안 조선 백성은 엄청난 고생을 했다 ) -318~320-
-1545/명종 원년, 을사사화 ;
소윤(윤원형派) 이 대윤(윤임派) 을 몰아냄. 이렇게 모함으로 죽은 쓸 만한 인재가 조선조에 수백 명이 되고,이런 인재들이 나라를 이끌어갔으면 조선은 신라보다 더 긴 왕조가 되엇을 것이다. 개만도 못한 것들.
문정왕후의 동생이자 간신인 윤원형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렸다. 문정왕후가 죽자, 명종은 윤원형을 조정에서 쫓아냈으며, 거리의 백성들은 그의 처소에 돌을 던졌고 화살이 꽃혔다. 겁이난 윤원형은 산으로 도망갔다가 자살했다.정말 잘 죽엇다.
윤원형을 내친 명종은 병을 앓다가 2년 만에 죽는다. 어머니의 등쌀과 외숙부의 전횡으로 재위 내내 아무 것도 못 해본 채 허무하게 죽은 것이다. 참으로 어리석은 인간들이여, 윤원형의 종말을 보고 생의 의미를 다시 새겨라.
윤원형의 누이가 중종(11대) 의 세 번째 왕비 : 계비(3번째) 문정왕후(소윤 집안) 로 간택되면서 윤씨 집안은 뜨기 시작했다.
대윤의 영수인 윤임(장경왕후의 오빠 )은 무인 출신으로 무식하고 우직했으며, 윤원형은 간교한 잔머리를 가졌다. -322~326-
- 실학자 '이익'은 조선의 3대 도적으로 홍길동. 임꺽정, 장길산을 들엇다.
임꺽정은 홍길동 시대가 한 세대 지난 16세기 중반인 명종 14년(1539)부터 출현하여 명종 17년, 체포/처형당할 때가지 3년 이상 황해도를 중심으로 활약했던 대표적인 도둑 우두머리였다. 그가 활약하던 시대는 간신인 윤원형이 발호해 정치가 말도 못하게 문란해져서 관료들의 수탈이 심해진 데다가 여러 해 동안 흉년이 들어 백성들의 생활이 극 도로 피폐했을 때였다.
막강한 관군의 체포작전에도 불구하고 임꺽덩이 3년씩이나 도망은 다닐 수 잇엇던 것은 백성들의 비호 덕이엇다. 그는 결국 모사 '서림' 의 배반으로 관군에 잡혀 처형되엇다. -329-
- 조일전쟁 대 일본에 끌려간 '강항'은 일본에 주자학의 뿌리를 내려주어 지금도 일본에서 주자학의 선구자로 추앙받고 있다.
웃기는 것이, 주자의 성리학은 중국이 발상지지만 ㄴ중국에서는 여러 학풍 중 그저 한 가지 학풍에 지나지 않았다 는 사실이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이를 국시로 받아들이고 모든 현상과 가치를 주자학에 두는 바람에, 중국에서는 별 볼일 없는 주자학이 조선에서는 모든 학문의 기준이자, 완성으로 인식 되었다.
이후 퇴계학파는 남인이 되엇고,남명학파는 북인이 되엇다. 퇴게학파의 수장은 유성룡이었고,남명학파의 수장은 정인흥으로서, 유성룡은 조일전쟁 때 나라를 지키는 데 크게 기여했고, 정인흥은 용맹한 의병장으로 이름을 떨쳤으나, 전후 광해군 정권에서 영의정을 지내다 서인의 쿠테타인 인조반정이 일어나 처형당했다. -333-
- 토정 이지함 ;
[토정비결]의 저자 이지함은 조선시대 실학의 선구자이다. 그는 이색의 후손으로 명문가 양반이면서도 목에 힘을 주거나 위선을 떨지 않았다. 당시 관리들의 횡포에 시달리던 백성들의 고통을 몸소 체험하기 위해서 나막신을 신고, 머리에 솥을 뒤집어쓰고 돌아다녔다 고 한다. 따라서 정상적인 사람은 아닌 듯하다.
이지함이 살아던 시절은 양반이라는 것들이 손에 물도 묻히지 않고 죽치고 앉아 현실과 동떨어진 허망한 경전의 구절만 외우고 잇던 16세기였다. 이렇게 조식,이지함, 서경덕,정여립 등은 학문적인 업적만 일부 남겼을 뿐 아무도 뜻을 펼쳐보지 못한 채 세상을 등지고 말았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지함은 탁월한 장사꾼이엇다. '몸소 장사를 하고 생업을 경영하여 2-3년만에 몇 만 섬의 곡식을 쌓았다' 라는 [토정유고] 에서도 확인할 수 잇다. 당시 양반이 장사를 한다 는 것은 품위를 덜어뜨린다고 몰매 맞는 일이었다. 더구나 조선 사회는 장사꾼이 되면 그 후손까지 관직에 나가지 못할 만큼 상업을 천시했던 한심한 나라였다. 실학이 봇물을 이루엇을 때가 정조 때인 18세기 후반이엇으니. 이지함은 실학이 대두하기
200년 전부터 실학의 효용성을 몸으로 보여준, 시대를 뛰어넘은 인물이었다.
조선의 백성들은 왕조 내내 인간 이하의 생활을 했던 것이다. 도대체 이런 놈의 나라가 왜 존재했어야 하는지 필자는 도저히 모르겠다. 아마 공부가 모자라는가 보다.
이러한 백성들의 비참한 삶을 직접 접한 이지함은 조정에다 적극적으로 국부를 늘리고 백성들을 자급하게 하는 것만이 깊어진 병통을 치유하는 길이라고 역설했다. 그러나 얼뜨기 임금들과 썩어빠진 관료들은 그의 주장을 콧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333~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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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84년 서인의 '이이' 가 사망했다. 이이는 인간관계가 원만하지 않았으며 마음이 그리 넉넉한 편이 못 되었다. 이이는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듣지 않았으며, 경솔하고 편견과 아집이 잇었다. -343-
- 기축옥사(1589) ;
정여립이 천하는 만민의 것이라는 대동사상을 내세웠다가 대동계를 조직하여 역모를 꾸몆다는 모함을 받았다는 내용이다.
대동계의 대동이란 대동소이,대동단결,태평성세의 의미로 쓰인다. 즉 아무 차별이 없고 모두 같이 잘사는 이상사회를 의미한다. -346-
-기축옥사를 부른 정여립 역모사건은 개만도 못한 인간들인 서인들에 의하여 조작된 사건이다. 이에 가장 큰 피해자는 이발, 정개청, 최영경 등이다.
도동서원에 위패가 모셔진 최영경은 학문과 덕망이 높은 선비였다. 최영경은 조작된 인물인 길삼봉이라는 누명을 쓰고 처형되었다.
이렇게 사람이 조금만 쓸 만하면 모조리 죽여나갔으니, 남은 인간들은 개만도 못한 것들이었다.
기축옥사의 추관은 정철이었고, 정여립 역모사건은 서인의 영수 '정철' 이 동인을 핍박하기 위하여 확대, 조작한 사건이다.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긴 정철은 당쟁 시대를 연 장본인이기도 했다.-351~353-
-1592년 9월정철는 체찰사가 되어 기호지방과 호남으로 내려가 군무를 독려하게 되엇ㅆ고, 다음 해 중국에 파병 사은사로 갔으며, 돌아오자 모함하는 유언비어가 나돌면서 파직디어 강화로 물러났다.
성격은 더러웠으나 평생을 청렴하게 살았던 정철은 만년에는 입에 풀칠조차 하기 힘든 형편이었다. 정철은 빈곤과 울분 속에서 만년을 보내다가 1593년 12월, 선조 26년에 58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356-
- 조일전쟁의 결과 200만 명 이상이 죽었고,농지는 황폐해졌다. 기근과 전염병이 덮쳐 시체가 길바닥에 굴러다녔으며 부모와 자식이 서로 뜯어먹었다. 일본에서는 히데요시가 멸망하고 도쿠가와 막부가 섰고,
명은 전후 40년 만에 청에 멸망했다. 이런 대전쟁을 어찌 가볍게 '왜란' 이리고 할 수 있는가? 이것은 왜란이 아니라, 전쟁이다. 즉, 조일전쟁 이라 불리는 것이 옳다.-363-
-전쟁 초기에는 붙는 대로박살이 났다. 왕이란 인간이 그냥 뒤도 안 돌아보고 튀기에만 정신이 없었다. 그러니 누가 제목숨 내놓고 싸울 놈은 단 한 놈도 없었던 것이다. 한양과 평양이 무혈 점령되자, 선조느 의주까지 도망쳐 명나라에 망명을 받아달라고 매일 빌고 있었다. 그러니 그 전쟁을 어떻게 이길 수 있었겠는가? -365-
- 이순신 장군은 용모가 단아하고 병약한 문관 스타일에 맨날 아팠다. 키도 140~145cm 정도로 추정된다. 그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었다. 전투를 앞두고 불안해서 점도 쳐고, 고향 식구들을 걱정해서 잠을 설쳤다. -371-
- 우리나라 최초으 백과사전은 '이수광' 의 '[지붕유설] 이다. 또 17세기 초 이수광의 뒤를 이은 유형원이 [반계수곡] 을 저술했다. 우물 안 개구리로 살던 조선 선비들 중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접하고 온 인물들은 하나같이 성리학을 비판하고 실학의 수용을 주장했다. 그러나 성리학의 벽에 부딪쳐,그들의 주장이 채택된경우느 없었다. -394-
- 중국에서는 기원 전 5세기에, 묵자가 평등주의와 능력주의를 주장했다 즉, 재능이 있는 사람이 제후가 되어서 하늘을 대신해 일을 해야 된다고 주장했으니, 얼마나 시대에 앞선주장인가? 그래도 그들은 역모로 처형되지 않았고 제자백가의 한 사상으로 치부되었다. 조선에 비하면 중국은 신사상에 얼마나 관대했는가?
묵자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서 기원전 3세기에, 진승, 오광의 난 이 일어났다. 그들의 표어는 "왕후 장상의 종자가 따로 있느냐" 고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무신정권 때인 12세기 말 노비 만적 이 최초로 "왕후 장상의 씨가 어디 있느냐? " 라고 외치면서 신분해방운동의 효시로 보인다. 이는 중국이 고려보다 1700년이나 앞선춘추전구시대 때 재기되었다. 조선에 비하면 중국은 신사상에 얼마나 관대했는가?-406-
-임금을 호종하던 놈들은 다 새버리고, 인조의 대가는 소현세자가 직접 말고삐르 잡았을 정도였다. 사실 제2차 조청전쟁은 조선측에서 싸움다운 싸움을 한 번도 못해 보고 도성이 점령당하고 임금이 항복한 , 정말 세계사에서 쪽팔리는 전쟁이었다. 어디 가서 조청전쟁 얘기 절대로 꺼내지 말고, 혹 물어보면 잘 모른다고 하셔.
청군의 선봉 '마부대' 는 만주의 성경(심양)에서 한양까지 12일에 주파했다. 조일전쟁 때 일군은 20일만에 도성을 점령했었다. 조선은 그냥 동네북이었다. -448-
- 1637년1월30일, 삼전도에 나아가 세 번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부딪치는 '삼배구고두' 의 황제 알현 예를 행하고 용서를 빌었다.
"야 임마, 안들려 좀더 세게 박아 !"
이 무슨 개꼴이냐. 인조의 머리가 땅에 부딪치는 소리가 청황제의 귀에 들리지 않는다고 황제 곁에 있던 청나라 관원이 소리질렀다.-450-
- 얼핏보면 임금을 항복케 한 최명길은 죽일 놈이고, 끝까지 절개를 지킨 김상헌은 만고 충신이다. 하지만 주둥이와 기개만 가지고 칼을 ㅏ 막을 수 있니? 멍청한 것들, 주제도 모르고 이빨만 까다가 개꼴이 된 것이다. 하잘데 없이 명분만 내세운 고루하고 진부한 성리학의 이념만 좇다가 임금이 남의 나라 임금 앞에 무릎끓고 절하게 한 사태는 바로 김상헌 같은 인간들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전쟁이 끝난뒤 온나라가 처참함 속에 빠졌으며, 목불인견이라 했다. 겨우 한 세대쯤 전에 일어난 조일전쟁 때의 교훈을 잊어버려 다시 나라가 이 꼴이 된 것이다. 그래서
역사를 배워야 한다. 쪽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다. -453-
- 화냥년은 환향녀(고향으로 귀향 한 여인) 에서 유래되었다.
1637년 병자호란이 끝난 뒤 청은 60만 명의 포로를 청으로 끌고 갓는데, 그 중 젊은 여인 이 거의 20만 명에 달했다. 환향녀들이 자살하는 사례가 급증하자 조선 조정은 홍제동(널리 구제하는 동네) 개울에서 더럽혀진 몸으 씻는 것으로 일체의 과거사를 묻지 못하게 했으나 눈 가리고 아웅이었다. 결국 청에서 돌아온 여인들은 혼자 살아가거나 거지나 매춘으로 생계를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여자를 힘이 없어 지키지 못한 지지리 등신 같은 조선 사내들, 무슨 얼굴로 환향녀들을 냉대하고 멸시해서 죽게까지 한단 말인가?
칭기스칸이 몽골으 통일하기 전 세력이 미약했을 때 적대적인 부족의 침입을 받고 처인 '보르테' 르 놓아두고 도망친 일이 있었다. 당시 , 둘이 같이 도망치면 둘 다 잡혀서 죽을 상황이었기에 처인 '보르테' 가 자청해서 남아 칭기스칸이 도망할 시간을 벌어준 것이었다. 보르테는 잡혀가서 적대 부족으 사내에게 주어져 살다 보니 임신을 하게 되었다. 칭기스칸이 겨우 동맹세력을 모아 적대 부족을 격파하고 처를 되찾았을 때 그녀의 배는 눈에 띄게 불러 있었고,칭기스칸을 보자 울름을 터뜨렸다. 그때 그녀를 감싸안으며 칭기스칸이 말했다.
"그 아이가 누구의 자식이든 내 첫째 아들이 될 것이다."
부그러운 줄 알아라. 기백도 없고 기대도 없는 등신 같은 조선 사내들아 이런 싸가지 없는 짓은 조일전쟁 때도 잇엇다. 일군에게 몸을 뺏겨 임신한 어인들이 길에 나앉게 되자 조정에서는 임신한 여인들을 한데 모아 집단으로 거주하게 하고 보살펴 주엇는대, 그곳이바로 '이태원' 다.
'이' 자는 '다를 이' 자이고, '태' 자는 신생아의 태를 말한다. -464~466-
- 조선에서 백정은 사람이 아니엇다. 똑똑한 자식을 가진 백정들은 자식들이 안타까워 피눈물을 흘리며 살아야 했다. 그러나 여진족들은 양반,상놈이 없고 짐승을 도살하는 백정을 기능인으로 대우하니.백정 입장에서는 포로된 것이 차라리 팔자가 핀 것이었다. -467-
- 지방 수령들이 청나라 사신들에게 얻어맞고 발로 채이는 일는 흔한 일이어서, 나라 체통은 땅에 떨어졌다. 역관으로는 주로 조선인 정명수가 왔는데, 그의 권세는 조선의 영의정을 우습게 볼 정도였으니,사신들의 위세가 어땠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역관 정명수는 조선 조정에서 벼슬을 받아 종2품 동지중추부사까지 승진했다. 이순신 장군과 같은 품계였다. 조선 중기를 지나 면서 조선이 왜 더 이상 존재해야 된느지에 대한 이유르 아무데서도 찾을 수없엇다.
가장 좋은 가정假定은 ,조일전쟁 이전에 조선이 망하고 새 왕조가 들어서는 것이엇다. (참으로 한심하다.) -468-
-(상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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