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온글] '유성룡-설득과 통합의 리더' 이덕일, 당신의 서재
https://www.youtube.com/watch?v=plkA8czViHg
-도요토미 히데요시( 豊臣秀吉) ;
오다 노부나가 ( 織田信長 ) 위하에서 중용되다가 '오다 노부나가' 의
뒤를 이어 실권을 장악한 후 1587년 일본을 통일했다. -52-
-이순신은 1586년 종6품에서 종4품인 함경도 조산 만호로 승진되엇다. 4계품을 뛰어넘은 발령이었다. 당시 예조판서 겸 홍문관 제학 유성룡이 이순신을 조산 만호로 천거한 것이다. 역시 그의 배후에는 유성룡이 있었다. -82-
-1592년 4월 13일 일본군이 대거 침략해 왔으나 조선은 전면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중종 때의 삼포왜란아나 명종 때의 을묘왜란처럼 국지전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일본은 전면전을 펼쳤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제1군18,000명,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끄는 제2군 22,000명,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이끈는 제3군11,000명, 시마츠요시히로(島津義弘)가 이끈느 제4군 14,000명등 육군9개군,수군9,200명 등 도합 167,900명의 대군이었다. -112-
**제 4군 시마츠 요시히로 는 칠천량 전투에서 패해 탈출하는 삼도 수군 통제사 '원균' 을 추격하여 원균을 전사 시켰다.
하지만 그는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에게 패전했다. -347-
-미국의 사학자 헐버트(Hulbert) 는 한국의 4대 발명품으로 금속활자.거북선.한글.적교吊橋를 꼽았다. 적교가 바로 유성룡이 만든 임진강 부교다.( [잡저] <임진강에 부교 놓은 일을 기록함> 에서 ) -191-
-모택동의 16자결 :
적진아퇴(敵進我退 ) ,적이 공격하면 우리는 후퇴하고,
적주아요( 敵駐我擾 ) ,적이 주둔해 있으면 우리는 교란시키고,
적피아타( 敵疲我打 ) ,적이 피로하면 우리는 공격하고,
적퇴아박( 敵退我迫 ) ,적이 후퇴하면 우리는 추격하는 전술이다.
모택동보다 350여 년 전에 조선의 문신 유성룡은 유격전술의 핵심을 이미 꿰고 있었던 것이다. -237-
-유성룡은 천민출신 '신충원'을 발탁하여 파절장으로 삼아 조령에 관關을 설치하게 한 결과 몇 달 지나지 않아 중국의 '산해관' 에 비견할 만한 방어진이 만들어 졌다. (**조곡관= 문경새재의 제2관문이다.)-278-
-임진왜란은 조정에 대한 백성들의 생각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았다.
백성들은 조선 왕조나 일본이나 다를 것이 무엇이냐는 생각을 했다.
선조27년(1594)에 송유진이 조선왕조타도를 봉기했다.(송유진의난)
선조29년(1596)에 이몽학이 조선왕조타도를 봉기했다.(이몽학의난)
조경남의 [난중잡록]에서 이몽학의 난은 "백성들이 난리와 온갖 침노에 곤궁해 졌다가 한 번 풍문을 듣자 따르는 자가 바람에 풀 쓰러지듯 하여 수일이 못되어 군사가 만여 명이 되었다 고 전하는 것처럼 백성들은 이몽학에게 환호했다. -278~ 280-
-유성룡은 국가에서 돈 한 푼 안 들이고 수많은 백성들을 살릴 수 있는 것이 소금 사업이라고 생각했다.
사염私鹽을 억제하고 공염公鹽을 확대하면 백성과 나라 모두 이익이란 사실을 잘 알고 선조에게 소금 판매 문제를 거듭 주장했다. "소금이나 쇠로 이익을 내는 일도 할 만합니다. 태공太公이 제齊나라를 다스릴 때 어염魚鹽의 이익을 말했고,당나라의 '유안' 도 소금으로 이익을 얻어 그 나라를 부강하게 하였습니다." -308~ 309-
-유성룡은 현실을 정확하게 분석했으며 행정에 박식한 관료이자,군사에 통달한 병법가이고,경제에 해박한 학자였다. 이런 유성룡이 행정과 군사를 총괄하면서 조선은 점차 안정을 찾아갔다. 그러나 소강상태에 접어든 전쟁이 격화될 조짐이 보인 것이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남부를 달라는 요구조건이 거부되자 재침 결심을 굳혔다. -310-
-명나라 사신 '이종성'과 '양방형'이 만주의 '요양'을 떠나 조선을 거쳐 일본으로 간다는 정보를 들은 선조는 마음이 다급해졌다. 일본이 조선 남부를 떼어달라는 것을 강화조건으로 요구했기 때문이다. 선조는 혹시 명나라가 조선 남부를 일본에 떼어주고 강화하는 것이 아닐까 두려워했다. -320-
-일본은 재출병의 선결조건이 이순신 제거라고 생각하고 고니시 유키나가는 이순신을 제거하기 위해 이중간첩 '요시라'를 이용했다, 대마도 좌하촌 출신인 요시라는 유창한 조선어 솜씨 덕분에 고니시 유키나가의 통역이 되었다. 이때 경상 우병사 '김응서'는 요시라를 조선의 간자로 삼았다고 생각하고 요시라가 준 정보에 김응서를 비롯한 장수들과 조정 대신들 그리고 선조까지 현혹되면서 이순신의 고초가 시작된다. -328-
-선조는 육군 명장 김덕령을 제거한 데 이어 수군 명장 이순신을 제거하기 위한 작전이 착착 진행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순신이 요시라의 정보대로 움직이지 않았으니 스스로 그물에 걸려든 격이었다. 이들이 공격한 표면적 대상은 이순신이지만 실제로는 그를 천거한 유성룡이다.
신영은 [재조번방지]에서 "당시 서인은 원군 편을 들고 동인은 이순신 편을 들어 서로 공격하느라 다른 국사는 치외도지했으니 이러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라고 한탄할 정도였다, -336~ 337-
-1597년 8월 3일,일본군 총대장 고바야가와 히데아키(小早川秀包)는 일본군을 2개 군으로 나누어 좌군대장에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 로 하고 선봉대장은 고니시 유키나 로 하여 고성,사천 하동을 경유해 전주로 향했다.
우군대장에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로 하고 선봉대장은 가토 기요마사 로 하여 서생포,밀양 초계를 거쳐 전주를 목표로 총공격했다. -350-
-1598년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병사한 것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德川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 ) ,모리 데루모토 ( 毛利輝元) )등 이른바 四大老 중심의 집단지도체제가 수립되었다. 四다이로(大老)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 사실을 비밀에 붙인 채 8월 28일과 9월 5일 두 차례에 걸쳐 조선출병군의 철수를 명령했다. 이제 종전이 가까워진 것이다. -371-
-1598년 11월 19일 새벽 이순신은 노량해협 '관음포' 에서 적선500여 척과 조선 함선 85척과 싸우다 최후를 마쳤다.
선조가 유성룡을 파직시킨 날 이순신은 노량해전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니 묘한 일치이자 묘한 운명이다. 이순신은 죽음으로 7년 전쟁의 대미를 장식했다. 이순신은 전사했으나 조선 수군은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선조는 이를 믿고 싶지 않았다. (......) 이순신이 일본군을 격퇴하는 동안 자신이 임금으로서 한 일은 적이 나타나기도 전에 도주한 것과 김덕령.이순신.유성룡 같은 인재들을 죽이거나 제거하려 한 것뿐이다. 또한 선조는 명나라 제독 유정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가 보전된 것은 순전히 모두 대인(유정)의 공덕입니다. " 라고 했다.
유정은 왜교성 전투에서 진린과 이순신의 수군이 지원하는데도 약속을 어기고 나오지 않아서 왜교성 함락을 무산시킨 庸將( 용장 ) 이다. 이런 용장에게 '우리나라가 보전된 것은 순전히 모두 대인의 공덕' 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선조다. -391~ 394-
-유성룡은 모두 거부했다.선조도 유성룡이 자신을 거부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것이다.그러나 방법이 없었다. 벼슬을 거부한다고 죄를 줄 수는 없었다. 유성룡은 선조의 양심에 돌을 던진 것인지도 모른다.
1607년 5월 6일,유성룡은 숨을 거두었다. 향년 66세.조선조 500년 최고의 재상이라평가받는 유성룡은 이렇게 세상를 떠났다. 허목의 [서애유사]는 시민들이 4일간이나 시장 문을 닫고 "선생이 없었던들 우리들이 지금 어떻게 살아남았겠는가" 라고 전했고, 또 "선생의 충성과 갈력竭力,주선이 없었다면 위험에 처해 쓰러져 가는 국운을 다시 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다." 라고 했다.
이듬헤 2월 선조 '이연' 도 세상을 떠났다. 저승에서 선조는 서애의 낮을 볼 면목이 없었을 것이다.그렇게 한 시대가 끝이 났다. -405~ 407-
끝.
-[서애 유성룡 연보]
**1542년 10월 1일 ,경상도 의성현 사촌리에서 황해도 관찰사
유중영 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다.
**1604년 ( 선조 37 ) 63세, [징비록] 저술을 마치다.
**1607년 5월 6일,향리 농환재 초당에서 운명하다. ( 66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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