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중이 역사에관심을 가지는 근원은 바로 우리 현실에 있다. 그러한 뜻에서 모든 역사는 다른 색깔의 옷을 입은 현대사라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또 동서를 통틀어 오래전부터 역사는 현재의 우리 모습을 비춰 주는 거울이자 내일을 가리키는 나침반이라 믿었다.-5-
-일본은 조선을 강제로 개방시키는 계획을 1875년에 짰다.
1875년 5월,부산항에 군함을 동원하여 무력시위를 벌이고, 8월에는 '운요호 사건' 을 일으켜 강화도를 침략했다.
1876년2월27일 조일수호조규 맺었다. 이 조일수호조규는 조선이 외국과 맨처음 맺은 근대적 조약이엇다. 이른바 '강화도조약' 이다.
1882년5월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었다.
1882년9월에는 청의 강요에 못 이겨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에 굴욕적으로 조인했다. -27-
-1938년 일제가 '조선지원병 령'을 공포하고 조선 청년들을 일제의 총알받이로 몰아내려 할 때 친일파들은 "조선민족도 천황의 赤子적자 노릇을 할" 기회를 얻었다고 환영했다. 대표적 친일 지식인이었던 이광수, 최남선 등은 조선청년들에게 외쳤다. -224-
-1915년 중국과 일제의 '만몽조약'의 체결로 일제와 중구의 대립은 조선인을 국적 없는 민족으로 만들었다. 재만 조선인은 무국적 또는 이중국적으로 살아야 했다. -231-
-1945년10월10일 아놀드 군정장관은 남한에는 미군정이라는 "단 하나의 정부" 가 있을 뿐이라 발표하여 미군정은 인민공화국뿐만 아니라 상해임시정부까지 인정하지 않았다. ......미군정은 남한 혁명세력을 게거하고 남한 사회질서를 자신의 뜻에 맞게 만들려는 현상유지 정책을 펴 나갔다. 이를 위해 자신의 지지 기반으로 보수세력인 한국민주당을 선택했다. 이리하여 일제 시대 친일행각 때문에 숨죽여 지내던 친일파가 다시 힘을 얻었다. 미군정은 일제의 식민지배에 협력했던 친일관료.식민경찰.일제군인등 부일협력세력을 군정청에 고용했다. 친미적이거나 영어를 할 줄 아는 지주출신의 보수적 인사들을 행정고문이나 군정관리로 들어앉혔다. 이들은 미군정의 보호를 받아 일제 밑에서 누려 온 기득권을 또다시 유지할 수 있었다 -262-
- 1961년 5월16일 새벽 서울, 한밤의 정적을 가르는 총소리는 민주화와 민족통일의 열망을 단숨에 식혀 버렸다. -344-
-1965년6월22일 한일협정을 정식 조인했다. .....결국 박정권은 경제개발 자금 몇 푼 때문에 한.일 두 나라 사이에 반드시 풀어야 했을 '과거청산' 이라는 보다 중요한 한일협상의 의미를 내팽개치고 일본의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굴욕적인 구걸외교를 벌였다. 일본에게 식민지배에 대한 면죄부를 준꼴이 된 한일협정은 지금까지 일본이 과거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망언'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는 빌미가 되었다. -351-
-1979년 10.26사태 뒤 "한국의 순조로민주화를 지지한다" 던 미국은, 12.12쿠데타를 묵인함으로써 사실상 전두환 중심의 새로운 지배체제를 인정했다. 이로써 미국은 친미 반공국가를 유지한다는 한반도 정책의 기본 목표에만 관심이 있을 뿐, 한국의 민주 발전은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드러냈다. -415-
-광주항쟁의 집행부는 미국이 신군부를 견재하여 정권을 잡지 못하게 할 것라고 기대했다. 특히 이들은 미국이 동해에 항공모함을 보낸 것은 신군부에 압력을 넣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믿음은 곧바로 무너지고 말았다. 미국은 이미 5월22일 "광주사태를 진압하는 데 사용할 목적으로 4개 대대의 한국군을 미국의 통제하에서 풀어 달라" 는 신군부의 요청에 동의한 상5태였다. -422-
-김영삼 정권은 1997년 말 외환위기를 맞이했다. 정부는 11월21일 국제통화기금에 200억 달러 규모의 구제금융 지원을 공식 요청하면서 경제주권이 심각하게 위축되었다. 1996년 국민소득은 10,543달러였으나. 1997년 국민소득은 9,511달러로 떨어지고 'IMF'사태 뒤인 1998년에는 마이너스 5.5%의 성장을 기록하면서 국민소득은 6,300달러(1990년 수준)로 떨어져 세계 40위권으로밀려났다. -462-
- 1862년 농민들은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항쟁을 일으켜 시대의 질곡을 깨치고 반봉건을 외쳤다. 이로써 한국의 역사가 개혁이라는 길목으로 들어설 수 잇었다. 이는 외세와 지배층의 탄압으로 실패했지만 1894년 농민전쟁은 봉건체제를 이 땅에서 없애고 지배층 스스로가 개혁에 나서도록 밀쳤다. 이제 민중은 재배층의 통치 대상이 아니라 역사의 주체로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리는 존재로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현재의 광화문촛불시위로,대검찰청의 촛불시위로 이어져 왔다.? ) -467-
-북미갈등은 1994년 10월21일 제네바 합의에 따라 평화적으로 해소되었다. 그러나 남북관계는 더욱 얼어붙었고 북미협상 과정에서 김영삼 정권은 철저히 소외되었다. 북한 핵문제는 1994년 봄 미국에서 '북한 폭격론' 이 제기될 만큼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한반도를 전쟁 일보 직전까지 내몰았지만, 김영삼 정부가 할 수 잇는 일은 아무것도 없엇다. 또 북미 제네바 합의 과정에서 구경만 해야 했던 김영삼 정권은 대북경수로를 지원할 목적으로 설립한 한반도에너지 개발기구(KEDO) 에서 돈만 대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것은 한반도 문제를 주도하려는 미국의 의도와 북미관계에서 남한 당국을 배제하려는 북한의 '通美封南政策' 이 일시 맞아 떨어진 결과이기도 했다. -537-
-.......-543-끝. 잘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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