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자 국
김 애 란
어머니의 칼끝에는 평생 누군가를 거둬 먹인 사람의 무심함이 서려 있다. 어머니는 내게 우는 여자도, 화장하는 여자도, 순종하는 여자도 아닌 칼을 쥔 여자였다. 건강하고 아름답지만 정장을 입고도 어묵을 우적우적 먹는. 그러면서도 자신이 음식을 우적우적 씹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촌부. 어머니는 칼 하나를 25년 넘게 써왔다. 얼추 내 나이와 비슷한 세월이다. 썰고,가르고,다지는 동안 칼은 종이처럼 얇아졌다. 씹고,삼키고,우물거리는 동안 내 창자와 내 간, 심장과 콩팥은 무럭무럭 자라났다. 나는 어머니가 해주는 음식과 함께 그 재료에 난 칼자국도 함께 삼켰다. 어두운 내 몸속에는 실로 무수한 칼자국이 새겨져 있다. 그것은 혈관을 타고 다니며 나를 건드린다. 내게 어미가 아픈 것은 그 때문이다. 기관들이 다 아는 것이다. 나는 '가슴이 아프다'는 말을 물리적으로 이해한다.
어머니는 칼을 자주 갈았다. 알을 가득 밴 4월 꽃게를 빠개거나 개고기 뒷다리를 자를 때면 일주일에 두세 번도 더 숫돌을 꺼냈다. 타일 하나 바르지 않은 시멘트 바닥에선 하수도 비리내가 났다. 부엌에 쪼그려 앉아 칼 가는 어머니의 모습은 모든 짐승들의 어미가 그렇듯 크고 둥글었다. 허리 군살에 말려 올라간 티셔츠, 팬티 위로 함부로 보이던 허연 엉덩이 골. 나는 어머니의 뒤태에서 곧 사라져갈 부족의 그림자를 봤다. 어쩌면 어머니의 말,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 사람들 중 더 작은 나라 사람들이 쓰는 그 말 때문인지도 몰랐다. 벵골 호랑이에게는 벵골 호랑이의 말이, 시베리아 호랑이에게는 시베리아 호랑이의 말이 필요하듯. 나이 들어 문득 쳐다보게 되는 어머니의 말. 아름다운 관광지처럼, 나는 그것이 곧 사라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대개 어미는 새끼보다 먼저 죽고, 어미가 쓰는 말은 새끼보다 오래되었다. 어머니가 칼을 갈 때면 이상하게 그런 생각이 든다.
내가 끊임없이 먹어야 했던 것처럼 어머니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만들어내야 했다. 딱히 할 일이 없어도 부엌에서 어머니가 이런저런 것을 재우고, 절이고 저장하는 모습을 보면, 나는 새끼답게 마구 게으르고 건방져지고 싶었다. 그래서 어머니가 바쁘다는 걸 빤히 알면서도, 방바닥에 자빠져 티브이를 보거나 문지방에 기대 잔소리를 했다. 해가 지면 밥 짓는 냄새가 서서히 풍겼다. 도마질 소리는 맥박처럼 집 안을 메웠다. 그것은 새벽녘 어렴풋이 들리는 쌀 씻는 소리처럼 당연하고 아늑한 소리였다. 나는 어머니가 쓰는 칼을 쥐어보곤 했다. 위험한 물건을 쥐고 있단 이유만으로 나는 그것을 통제하고 있다 믿었다. 나무로 된 칼자루는 노란 테이프로 감겨 있었다. 긴 세월, 자루는 몇 번 바뀌었으나 칼날은 그대로였다. 날은 하도 갈려 반짝임을 잃었지만 그것은 닳고 닳아 종내에는 내부로 딱딱해진 빛 같았다. 어머니의 칼에서 사랑이나 희생을 보려 한 건 아니었다. 나는 거기서 그냥 '어미'를 봤다. 그리고 그때 나는 자식이 아니라 새끼가 됐다.
어머니는 20여 년간 국수를 팔았다. 가계 이름은 '맛나당'이었다. 어머니는 누가 제과점을 하다 망한 것을 인수해 간판을 그대로 사용했다. 손칼국수 가게는 시골서 여자가 소자본으로 쉽게 시작할 수 있는 일 중 하나였다. 칼국수를 만드는 법은 간단했다. 솥에 바지락과 다시마, 파, 마늘, 소금을 넣고 중간에 면을 넣은 뒤 뜸을 들이면 끝이었다. 그러나 쉬운 음식일수록 솜씨에 따라 맛이 제각각일 수 있다는 건 어린 나도 아는 사실이었다. 어머니의 칼국수는 훌륭했다. 여름에 하는 콩국수 역시 그랬다. 한여름, 불가에서 국수를 삶을 때면 어머니는 얼음 뜬 콩국을 한 그릇 떠 벌컥벌컥 들이켰다. 입술 주위의 솜털에는 허연 콩물이 말라붙어있었다. 그 모습을 멀뚱 쳐다보면 어머니는 콩국에 설탕을 타 내게 먹였다. '맛나당'은 호황을 누렸다. 모처럼 시장에 나온 농부들도, 농협과 수협, 새마을금고 직원들도, 중학교 선생과 속 풀러 온 술집 아가씨도 모두 우리 집에 와 국수를 먹었다. 타지 사람들도 적지 않았는데, 어머니는 밥 먹는 모습만 보고도 그들의 '관계'를 알 수 있다 했다. 나는 홀에 음식을 내간 뒤 "저 사람들, 불륜 아닐까?"라고 말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어머니는 나를 나무라다가 "사실 불륜 맞다"고 맞장구를 쳤다. 어머니는 자기 음식에 자부가 있었다. 면발도 중요했지만 국수의 관건은 김치에 있었다. 어머니는 나흘에 한 번꼴로 김치를 담갔다. 큰 '다라이' 안에 상체를 박고 양념을 버무리던 어머니의 모습은 가게 앞 오랜 풍경 중 하나였다. 어머니는 '다라이'로 통하는 저 지하 세계에 빠져들지 않으려 버둥대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어머니가 잘 익은 배추 한 포기를 꺼내 막썰었을 때, 순하게 숨죽은 배추 줄기 사이로 신선한 핏물처럼 흘러나오던 김칫국과 자그마한 기포를 기억한다. 어머니가 국수를 삶으면 나는 그 옆에 서서 제비 새끼처럼 입을 벌렸다. 어머니는 갓 익은 면발 한두 젓가락을 건져주었다. 그런 뒤 맨손으로 김치를 집어 입속에 아무렇게나 구겨 넣어줬다. 김치에선 알싸한 사이다 맛이 났다. 내 컴컴한 아가리 속으로 김치와 함께 들어오는 어머니의 손가락 맛이랄까, 살[肉] 맛은 미지근하니 담담했다. 식칼이 배추 몸뚱이를 베고 지나갈 때 전해지는 그 서걱하는 질감과 싱그러운 소리가 나는 참 좋았다. 어둑한 부엌 안, 환풍기 사이로 들어오던 햇빛의 뼈와 그 빛 가까이에 선 어머니의 옆모습, 그런 것도.
부엌에는 칼이 다섯 개 정도 있었다. 어머니는 그중 한 가지 칼로만 국수를 썰었다. 나머지 칼은 과일을 깎거나 바지락을 까고, 김장 때 다른 일손에게 빌려주었다. 어머니는 국수를 눈 감고도 썰 수 있었다. 오른손이 칼질을 하는 동안 왼손 손가락 두 개는 칼 박자에 맞춰 아장아장 뒷걸음쳤다. 어머니의 칼질에는 아무런 망설임도 두려움도 없었다. 그 안에는 오랜 시간 한 가지 기술을 터득한 사람의 자부와 먹고살고 잇다는 안도와 단순한 일을 반복할 때 나오는 피로가 뒤섞여 있었다. 어머니는 칼날 위에 들러붙은 반죽을 쇠숟가락으로 쓱쓱 끍어내곤 했다. 나는 아버지의 커다란 체육복 바지를 입고 잔일을 도왔다. 사춘기 땐 쟁반을 들고 배달을 가다, 길에서 좋아하는 남자 애를 만나 다리가 후들거린 적도 있다. 성질 급한 어머니는 잔소리가 심했다. 대파는 가랑이를 잘 씻어야 한다. 대걸레질하라고 했더니 홀에 물만 발라놨냐. 식탁 행주질 하는 김에 숟가락 통 닦을 줄도 모르냐. 그건 놔둬라, 내가 한다, 넌 할 줄 모른다. 나도 가르쳐주면 잘할 수 있는데, 어려운 일도 아닌 것 같은데, 어머니는 그 말을 할 때마다 은근 당당함을 비쳤다. "그건 놔둬라, 내가 한다, 넌 할 줄 모른다." 나는 어머니를 도우며 수다를 떨었다. 어머니가 반응하는 게 좋아 부러 까부는 말도 곧잘했다. 어머니가 "장사하기 힘들다" 라고 말하면 "그럼 자식 키우는 게 쉬운 줄 알았나?" 며 핀잔하는 식이었다. 그러면 어머니는 상긋 웃은 뒤 재빨리 내게 칼 겨누는 시늉을 했다. "배때기를 쑤셔버리겠다!" 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부모들이 아이에게 꿀밤을 먹이듯, 어머니가 연극적으로 나를 나무라는 방식이었다. 나는 예고없이 날아오는 칼날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하지만 그 놀람 뒤에는 어머니가 나를 절대 해하지 않을 거라는 안도와 커다란 신뢰가 자리 잡고 있었다. 어머니는 새끼 겁주고 놀리는 걸 낙으로 삼는 여자였다. 내가 여섯 살 때, 어머니는 방 안에서 부르르 몸을 떨다 죽어버리는 시늉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어머니의 가짜 시신 옆에서 밤새 목 놓아 울어야 했다. 또 한번은 어머니가 내 웃옷에 강남콩을 넣고 "공벌레다!" 라고 사기 쳐 자지러진 적도 있다. 방바닥을 뒹구는 나를 보고 어머니는 한참 깔깔댔다. 나는 늘 크게 울었고, 그런 뒤에는 한없이 평화로운 얼굴로 잠들 수 있었다. -156-
내게 칼을 들이댔음에도, 그 칼에 자주 다친 건 어머니 자신이었다. 바쁠 때 혼자 허둥대다 벤 것이었다. 한번 벌어진 상처는 좀체 아물지 않았다. 손에 물 마를 날이 없고 양념 대부분을 맨손으로 쥐어 양은솥에 뿌린 탓이었다. 어머니는 요리와 서빙, 계산, 청소, 설거지를 혼자서 다 하고 있었다. 그래도 돈 모이는 게 신이 나 하나도 힘든 줄 몰랐다. 어느 날, 어머니느 국수를 썰다 손가락세 개를 한꺼번에 베였다. 어머니는 괴로운 얼굴로 지혈을 하며 계속 국수를 썰고 서빙을 했다. 피는 멈추지 않고 흘렀다. 엄지손톱은 이미 떨어져나간 상태였다. 곧 홀에 나간 국수에서 문제가 생겼다. 하얀 플라스틱 그릇 옆면에 피가 묻은 거였다. 다행히 그 자리엔 착한 시골 할머니 한 분이 앉아 계셧다. 어머니는 연방 머리를 조아리며 국수를 다시 내오겠다고 했다. 할머니는 나무껍질 같은 손으로 그릇 옆면을 스윽 닦아냈다. 그러고는 태연하게 "어이구, 여기 피가 묻었네유" 하고 말했다. 할머니는 조글조글한 입으로 면발을 호로록 빨며 물었다.
"많이 안 다쳤슈?"
어머니는 그날이 장사하며 손님에게 가장 고마웠던 때라고 했다.-157-
어머니가 칼같이 지키는 원칙 중 하나는 음식 나가는 순서였다. 어느 가게라도 마찬가지겠지만, 손님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쳐도 어머니는 누가 한 발자국이라도 먼저 왔는지 알았다. 손님들이 순서 뒤바뀌는 걸 어짢아하는 탓도 있지만, 오래전 한 여자가 갓 나온 국수를 그대로 들고 나가, 거리에 쏟아버린 일 때문이었다. 어머니에게는 그게 상처가 된 모양이었다. 밥장사르 하다 보면 별일이 다 있지만, 어머니가 기억하는 일은 그렇게 사소한 것이었다. 어머니가 가장 인상 깊게 기억하는 손님이라는 것도 별 특징이 없었다. 어느 날 한 사내가 들어와 국수 두 개를 시켰다. 손님이 방을 원해서 어머니는 안방에 상을 봐줬다. 국수와 고추 다대기, 김치 한 종지가 전부였다. 사내는 빈 그릇을 하나 달라고 했다. 어머니는 왜 그런가 싶어 사내의 행동을 유심히 살폈다. 사내는 자기 맞은편 국수 위에 빈 그릇을 엎어놓았다. 혹여 국수가 식을까 봐 그러는 거였다. 곧이어 한 여자가 나타났다. 여자는 방긋 웃은 뒤 그릇을 걷고 젓가락을 들었다.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댄 채 조용하고 친밀하게 국수를 먹었다. 어머니는 멍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그런 일상적인 배려랄까, 사소한 따뜻함을 받아보지 못한 '여자의 눈'으로 손님을 대하던 순간이었다. 밥 잘하고 일 잘하고 상말 잘하던 어머니는 알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살면서 중요한 고요가 머리 위를 지날 때가 있는데, 어머니에게는 그때가 그 순간이었을 거다. -158-
어머니가 그 칼을 만난 건 25년 전의 일이다. 아버지의 직장이 있던 인천의 어느 재래시장에서였다. 부른 배를 안고 시장에 간 어머니는 채소 가게 모퉁이에서 떠돌이 칼 장수를 만났다. 사내 앞에 놓인 사과 궤짝 위에는 군인들이 쓰는 철모가 바가지처럼 엎어져 잇었다. 사내는 칼을 철모 위로 세게 탁! 탁! 내리치며 "이래도 날이 안 나간다"고 외쳤다.아낙들은 수런거렸다. 어머니도 앳된 새댁의 눈으로 경계하듯 신기하게 칼 장수를 바라봤다. 사내는 칼을 높이 들어 이것이 그냥 '스댕'이 아니라 '특수 스댕'이라고 말했다. 무쇠 칼은 무거운 데다 녹이 잘 슬고 스테인리스 칼은 너무 무른데, 이 칼은 적당하니 딱 좋다고. 칼자루는 둥글고 두툼하니 소나무로 되어 있었다. 어머니는 1,500원 주고 그 칼을 샀다. 속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지만 신접살림에 꼭 필요했고, 칼의 어떤 위엄이랄가 단단함에 반했던 것이다. 그날, 마분지에 둘둘 말은 칼을 품고 산동네를 오르던 어머니의 가슴은, 흡사 연애편지를 안고 달리는 처녀처럼 마구 두근거렸더랬다. 그 후로 어머니는 손안에 반지의 반짝임이 아닌 식칼의 번뜩임을 쥐고 살았다. -159-
내가 그 칼에 대해 기억하는 일은 두 가지다. 하나는 여덟 살 때 학교에서 돌아온 후 있었던 일이다. 어머니는 장사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는 좀 시무룩해졌다. 손님들이 홀과 방을 모두 차지했을 경우 밖에 나가 어떻게든 시간을 때우다 들어와야 했다. 하지만 그날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 주위를 계속 알짱거렸다. 어머니에게는 내가 보이지않는 것 같았다.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엄마 나 배고파" 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그 소리도 못 듣는 것 같았다. 나는 '국숫집 딸내미가 배를 곯는 게 말이나 된단 말인가?' 싶어 서러워졌다. 나는 어머니에게 죄책감을 주고 싶었다. 그래서 "엄마는 자식보다 손님이 더 좋아?" 라고 외친 뒤 가게를 뛰쳐나갔다. 어디 가서 확 죽어버리려는 심산이었다. 어머니는 나를 쫓아오지 않았다. 나는 고개 숙인 채 거리를 걸었다. 그런데 갑자기 웬 개 한 마리가 나타나 앞을 가로막고 섰다. 덩치가 소만 한 게, 지옥에서 온 양 시커멓고 무시무시하게 생긴 놈이었다. 개는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컹!' 하고 짖었다. 쩌렁쩌렁한 소리에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나는 '으악!' 하고 소리쳤다. 내 몸 어디서 그런 소리가 나왔는지 모를 정도로 날카로운 비명이었다. 그때 어디선가 바람같이 어머니가 나타낫다. 앞치마를 두른 채 한 손에는 식칼을 들고서였다. 국수를 썰다 나와서 그런 것인지 부러 들고 나온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어머니는 내 앞에서 개를 매섭게 쫓아버렸다. 나는 으앙--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어머니는 다시 가게로 들어갔다. 별일 아니었지만, 시커먼 개 앞에서 칼을 들고 서 있던 어머니의 모습이 그 후로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았다. -160-
또 한 가지 떠오르는 건 최근의 일이다. 내가 서울 소재의 대학에 붙어 세를 얻고 살림을 구하던 날이었다. 어머니와 나는 택시를 타고 인근 대형 마트에 갔다. 쌀과 라면에서부터 화장지, 세제, 생리대에 이르기까지 혼자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물건을 사기 위해서였다. 서울 온다고 말쑥하게 차려입은 어머니는 산더미만큼 쌓인 상품과 미로 같은 통로에서 주눅들어 있었다. 부모답게 뭔가 주도하고 잔소리도 하고 싶은데 거기에선 자신이 할 일이 별로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오히려 물건을 신속하게 알아보고 선택한 건 내 쪽이었다. 어머니는 묵묵히 카트를 밀고 나를 따라왔다. 화장을 고치지 않은 어머니의 콧잔등은 번들거렸다. 깔끔하게 올린 쪽머리의 잔털이 하나 둘 삐져나와 푸석해 보였다. 우리는 식품 코너에 들러 어묵을 먹었다. 나느 입을 한껏 벌려 어묵을 먹는 어머니를 보고 '아, 엄마는 음식을 저렇게 먹는구나,늘 저렇게 먹었었구나......' 생각했다. 어머니는 순진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우리는 다시 카트를 밀고 주위를 헤맸다. 어머니는 초보 운전자처럼 다른 카트에 치이고 밀리며 당황스러워 했다. 그리고 얼마 후 주방용품 코너에 섰을 때, 부엌칼을 어떤 걸로 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는 내게, 어머니는 독일제 칼 하나를 불쑥 내밀며 "이걸로 해라"라고 말했다. 내가 칼을 쥐고 갸웃거리자어머니는 담담하게 한마디 했다.
"내가 칼 볼 줄 안다." -161-
어머니는 처녀 때 인기가 좋았다. 눈이 크고 이마가 잘 생겨 총각들에게 잦은 구애를 받았다. 멋 부리는 것을 좋아해, 조개를 캐 번 돈으로 인조가죽 부츠도 사고 롱코트도 사 입었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펜팔도 하고, 외할머니가 밥하라 그러면 "새끼가 죽은 것도 아닌데 멍하니 동쪽만 바라봤다" 라고 했다. 구애의 방식은 여러 가지였다. 철모 가득 딸기를 담아온 군인도 있었고 날마다 물 한 바가지만 달라고 찾아오는 사내도 있었다. 쾌활하고 오만한 어머니에게 단 하나 약한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순하고 내성적인 남자였다. 갖은 추파를 뿌리치고 ㅇ어머니가 아버지를 선택한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보기 위해 자기 집에서 어머니가 사는 곳까지 몇 십 리 길을 걸어가곤 했다. 용기가 안 나, 양쪽 호주머니에 소주를 낳고 마셔가면서였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좋아한단 말 한마디 못하고 다시 몇 십 리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도보로 세 시간이 넘는 거리였다. 말하자면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상황은 자신이 만들고 결정은 어머니가 하게 하는. 하여, 칼 잘 쓰는 어머니가 지금까지도 못 자르는 게 있으니 그것은 단 하나 부부의 聯연이다. -162-
신혼 초, 두 사람은 인천에 올라와 살았다. 시골서 가마니 쌀만 먹어 버릇하다 됫박 쌀을 받아먹어야 했을 때, 어머니는 새삼 초조하고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의 월급이 모자라 1, 2킬로씩 봉지 쌀을 사 나르던 시절의 일이다. 시장에서 칼을 산 저녁,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답답한 심정을 털어놨다. 배부터 불러, 친정에서 도와주지도 않는데, 살길이 막막하다는 요지였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타이르듯 그리고 그런 건 삶에서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듯 대꾸했다.
"인생 원래 밑바닥부터 시작하는 거다."
네 살 연상 국졸 남편이, 역시 '국민'학교밖에 나오지 못한 자신에게 건넨 이 한마디가 멋있고 미더워 어머니는 혼자 이렇게 생각했단다.
'그놈, 말 잘하네.' -163-
그 후로 30여 년이 지난 오늘, 어머니가 신세 한탄을 할 때면 아버지는겉 담배를 피우며 영화배우처럼 말한다.
"인생 원래 밑바닥부터 시작하는 거다."
국수 가게 전세를 월세로 돌려야 했을 때도, 돈 꿔간 선배가 잠적했을 때도, 내 대학 등록금 대책이 없었을 때도 아버지는 항상 이렇게 말했다.
"인생 원해 밑바닥......."
그러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두루마리 화장지를 집어던지며 버럭 소리쳤다.
"그놈의 밑바닥!" -163-
살면서 어버지가 부엌칼 든 모습을 딱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한밤중 자살 소동을 벌였을 때다. 몰래 쓴 사채 20만 원이 몇 달 새 500만 원이 돼 험한 사람들이 들락거렸던 밤이다. 우리는 그 돈이 아버지의 유흥비로 쓰였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밤새 말다툼을 했다. 해명하고 설득하는가 하면, 뭐라 큰소리치는 것도 같았다. 아버지는 갑자기 부엌으로 뛰쳐나가 도마 위의 식칼을 집어 들었다. 어버지는 씩씩대며 "다 죽여버리겠다" 고 했다. 그리고 자신도 "죽어버리겠다" 고. 아버지의 눈에서 이상한 빛이 번득거렸다 아버지는 헐렁한 아이보리 내복을 입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죽지 않으리란 걸 알았지만, 열심히 아버지를 타일렀다. 아버지는 칼을 쥔 채 두 시간 ㅇ넘게 인생과 철학에 대해 얘기하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코를 골며 자는 모습은 또 그렇게 안일하고 긍정적일 수가 없었다. -164-
어머니는 내가 여섯 살 때 빚을 얻어 국숫집을 차렸다. 가장으로서 체면이 안 선다고 개업을 반대했던 아버지는 결국 살림이 불어나자 좋아했고, 나중엔 모든 걸 떠넘기려 했다. 그때부터 어머니는 송현동 재래시장서 산 '특수 스댕' 칼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칼 장수의 말대로 그 칼은 좋은 칼이었다. 칼은 도마 위를 뚜벅뚜벅 걸어나갔다. 어머니의 손은 빨랐고 칼 박자는 경쾌했다. 어머니와 칼은 젊고 단단하니 닮은 구석이 있었다. 어머니가 칼을 쥐고 음식을 만드는 모습에는 어딘가 신랄한 데가 있었다. 나는 종종 그 신랄함의 정체가 뭘까 생각하곤 했다. 그러나 생각이 깊어질 만하면 어머니가 내 입에 먹을 걸 구겨 넣어줬기 때문에 금방 잊어버리곤 했다. 어머니는 소처럼 일했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민첩하고 활달한 소였다. 적당히 허영심도 있었고, 장사하는 사람은 늘 깔끔해야 한다며 화장품 겂도 아끼지 않았다. 어머니는 '사장님, 미인이시네요' 라는 말을 좋아했고, 그때마다 손사래를 친 뒤 광에 들어가 거울을 봤다. 어머니는 현실적인 여자였다. 모든 것은 순서와 계힉이 있고 합리적으로 이뤄져야 했다 어머니에게는 언제까지 빚을 갚고, 언제까지 집을 사며, 돈은 어떻게 나눠 저금할 것인가에 대한 계힉이 있었다. 어머니는 잘 웃고 정이 많았지만 개시 손님이 하나 일때는 대놓고 인상을 찌푸렸고, 아이 셋을 데려온 부부가 국수를 두 개만 시킬 때도 주방에서 뭐라 시부렁거렸다. 반대로 아버지는 순간을 사는 사람이었다. 자기가 번 돈은 주로 자신을 위해 썼고, 놀라울 정도로 낙천적이었다. 아버지는 지역 사회에서 인정을 받는 편이었다. 토박이에다 경조 대사를 잘 챙겨 사람 노릇해온 덕이었다. 그러난 그 인정의 저변에는 아버지가 거절을 못하는 사람이라느 사실이 깔려 있었다. 말수 적어 착한 사위 소리 듣던 아법지가 가장 잘하는 말은 '그류'였다. '그류'는 충청도 말로 '그래유'의 줄임말이다. -165-
장어째는 회칼처럼 비열한 눈매를 가진 선배가 거금을 부탁했을 때도, 동네에서 신용 없기로 유명한 아저씨가 담보를 요구했을 때도, 어버지는 그 말을 묵묵히 듣고 있다 마침내 입을 열어 대답했다.
"그류."
내가 사립대에 간다고 했을 때도 아버지는 선뜻 승낙했다. 어머니가 반대해놓고도 등록금을 대주는 사람이었다면, 아버지는 찬성만 하고 아무 신경 안 쓰는 사람이었다. 말하자면 '나쁘다'기보단 좀 난감한 사람이라 할 수 있었다. -166-
아버지가 어머니를 실망시킨 건 신혼 초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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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이 베껴쓴글]
부모들이 아이에게 꿀밤을 먹이듯, 어머니가 연극적으로 나를 나무라는 방식이었다. 나는 예고 없이 날아오는 칼날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하지만 그 놀람 뒤에는 어머니가 나를 절대 해하지 않을 거라는 안도와 커다란 신뢰가 자리 잡고 있었다. 어머니는 새끼 겁주고 놀리는 걸 낙으로 삼는 여자였다.
말하자면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상황은 자신이 만들고 결정은 어머니게 하게 하는. 하여, 칼 잘 쓰는 어머니가 지금까지도 못 자르는 게 있으니 그것은 단 하나 부부의 연이다.
어머니와 칼은 젊고 단단하니 닮은 구석이 있었다. 어머니가 칼을 쥐고 음식을 만드는 모습에는 어딘가 신랄한 데가 있었따. 나는 종종 그 신랄함의 정체가 뭘까 생각하곤 했다. 그러나 생각이 깊어질 만하면 어머니가 내 입에 먹을 걸 구겨 넣어줬기 때문에 금방 잊어버리곤 했다. 어머니는 소처럼 일했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활달하고 민첩한 소였다. 적당히 허영심도 있었고, 장사하는 사람은 늘 깔끔해야 한다며 화장품 값도 아끼지 않았다. 어머니는 '사장님, 미인이시네요'라는 말을 좋아했고, 그때마다 손사래를 친 뒤 광에 들어가 거울을 봤다.
아버지는 찬성만 하고 아무 신경 안 쓰는 사람이었따. 말하자면 '나쁘다'기보단 좀 난감한 사람이라 할 수 있었다.
이런 도덕관을 갖게 된 데는 동네 분위기 탓이 컸따. 이상하게 우리 동네 어른들은 전부 애인이 있었다. 중년 아저씨들 사이에서는 대놓고 언급되었고, 없으면 무시당하는 것 같았다. 아주머니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주머니들은 훨씬 영리하게 바람을 피웠다. 그러나 내가 본 시골의 부정은 티브이 드라마처럼 심각하고 치명적인 것이 아니었따. 그것은 자연스럽고 때로 명랑하며, 은밀한 동시에 소란스러운 것이었다.
아버지의 외도가 신경 쓰였던 건 아버지가 우리를 버릴까 봐서도 아니었고, 도덕적 잣대 때문도 아니었다. 나를 침울하게 한 건 언젠가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까 하는 예감이었다.
어머니는 여자가 일하는 읍내 목욕탕에 찾아갔다. 그러고는 탕 속에서 고개만 내민 채 여자의 움직임을, 젖가슴을, 엉덩이와 허벅지를 구석구석 살펴보고 돌아왔다. 며칠 후, 어머니는 김치를 썰다 말고 '으하하하' 웃으며 말했다.
"아이고, 야., 그 여자 완전 할매더라, 할매."
그러더니 이내 시무룩해졌따. 만나도 왜 그런 여자를 만나는지 모르겠다고.
웬만해선 엄살을 피우지 않는 어머니가 '아프다'는 말을 하면, 나는 뭘 어찌해야 할지 몰라 대책없이 낙관적인 말만 했다.
나는 그 지금이 '지금'이라 미안했다. 어머니는 곧 나아질 거란 내 말에 위로받는 듯했다. 하지만 내가 어머니를 동정하거나 나무라고, 잔소리라도 할라치면 성질을 낸 뒤 끊었다.
"내가 니 새끼냐?"
어머니는 내게 질문받는 걸 좋아했따. 나는 마늘을 다지고, 두부를 자르고, 김치를 썰며 이따금 어머니를 생각했다. 어머니가 마트에서 사준 칼을 쥐고서였다. 좋은 칼 하나라든가 프라이팬 같은 것이 여자를 얼마나 기쁘게 하는지를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버지는 일생 동안 단 한 개의 히트곡밖에 갖지 못한 가수처럼 결국 울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그류"
저 삼촌과 저 사촌과 이 육촌은 아무 데서나 출몰했다. 그들의 얼굴은 곧 내 얼굴이기도 했다. 나는 화장실에서 내 이마를 만나고, 신발장 앞에서 내 콧잔등을 만나고, 주차장에서 내 쌍꺼풀을 만났다. 그들은 으레 '우리가 친척이겠거니'하고 검연쩍게 지나쳤다.
내 몸이 제법 어른 꼴을 갖추게 되고부터 어머니는 나를 어디든 데리고 다니려 했다. 어머니가 특히 좋아한 곳은 목욕탕이었다. 어머니는 발가벗겨진 내 육체를, 그러니까 그냥 자식이 아니라 다 큰 자식의 풍성한 육체를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어했다. 한 번도 그렇게 말한 적은 없지만 나는 어머니의 표정에서 그걸 발견할 수 있었다. 봐라, 내 새끼다. 털도 나고 젖도 있고 엉덩이도 크다! 나는 나와 마찬가지로 털도 나고 엉덩이도 큰 아주머니들 앞에서 몸을 웅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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