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658/ 국사논술1- 정해랑 지음

최해식 2018. 3. 4. 08:32

- 거란의 침략이 폐렴균의 침투라면,  여진족의 침략은 독감 바이러스의 침투였고,  몽고의 중국 대륙 제패는 폐결핵균의 침투가 눈앞에 닥친 꼴이었다.  거란의 침략 때 고려는 건강한 몸이었으므로 거뜬히 물리칠 수 잇었고, 여진족의 침략 때도 처음에는 건강한 몸이었으므로 거뜬히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러나 여진족과의 싸움을 오랫동안 끌고 있는  상태에서 고려는 독감을 오래 앓으면서도 과로와 불규칙한 생활을 일삼는 사람처럼 매우 좋지 않은  상태에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페결핵균처럼 강력한 몽고의 침략이 눈앞에 닥쳤으니 그야말로 고려의 운명은 바람 앞에 등불이었다. -170-


- 고려는 몽고에 맞서 자그마치 40년 동안 전쟁을 치렀다.  몽고 민족이 세운  원나라는 몽고와 중국 대륙은 말할 것도 없고 중앙 아시아와 유럽까지도 진출한 세계를  아우른 대제국이었다.  이러한 대제국과 40년 동안 전쟁을 치를 수 있었다는 것은 조그마한 나라인 고려로서는 정말로 대단한 일이었다.  그것은 오로지 농민과 천민 같은 민중의 항전 덕분이었다. -175-

( 출전) 내블로그  http://blog.daum.net/chscoral/1367

.......1231년에 시작된 전쟁은 1259년 고려가 항복할 때까지 30년 동안이나 계속되엇다. 이 기간에 몽골은 무려 아홉 차례나 고려를 침공했다. 몽골이 침략은  이전까지 고려가 겪었던 어떤 전쟁보다 더 참혹했다. 고려 시대뿐만 아니라 5천 년 역사르 통틀어 가장 잔인하고 파괴적이었다. -131-


-  "外因은 內因내인을 거쳐 작용한다" 는 역사법칙이 있다.

외부적 요인은 반드시 내부적 요인을 통해서 작용한다는 뜻이다.

.........하나의 공동체를 외부 세력이 침략해서 지배하게 된다면 거기에는 그 침략을 감당해 내지 못한 내부적 요인이 있게 마련이다

삼국 시대 때 고구려와 백제가 망하게 된 것도 당과 신라의 군사력 때문에만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엇다. 고구려와 백제가 당과 신라읜 군사력을 이겨 내지 못할 만큼 사회 구조가 취약했기 때문이다. -176-


- 외세가 침략을 해서 지배하게 될 때 그 나라의 지배층이 급격히 ㅁㄹ락하는 경우는 없다. 지배층은 오히려 외세와 적극적으로 야합함으로써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일쑤이다.  외세 또한 그들의 기득권을 인정해 줌으로써 안정적인 지배를 꾀하고저 한다. (이른바 윈-윈 전략인가? )  -178-


- 고려가 원에게 항복한 뒤에 새로 부상한 세력이 이른바 친원 신흥 세력인데 그중에 두드러진 사람이 평양 조씨인 조인규다, 그는 역인 출신인데, 이른바  8.15 광복 뒤에  남한에서느 영어 잘하는 사람이,  북한에서는 러시아어 잘하는 사람이 출세길이 빨랐다.  고려시대에도 몽고어를 잘하면 그것을 발판으로 출세할 수 있었다. -181-


전광용의 소설 [꺼삐딴 리]의 주인공 이인국은 식민지시대에선  일제에, 소련 군정 시절에는 소련인들에게, 월남해서는 미국인들에게 붙어서 일신의  안일만을 추구하고 조국과 민족을 배반하는 기회주의적 인간이다.  이 소설은 그러한 인간형을 특별한 논평 없이 적나라하게 그려서 독자들의 비판의식을 일깨운다. -186-


- 우리는 경복궁을 비롯한 고궁을 둘러볼 때 600년 전에 농사짓다 끌려 와서 죽거나 부상당한 우리 조상들의 피와 땀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언제 어느 때라도 역사를 움직이는 진정한 힘은 바로 이름 없는 이러한 사람들의 피와 땀이었다. -234-


- 1565년에 훈구파 정권이 무너진 뒤 사림파가 집권하고  2년뒤 1567년에 선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정권을 독차지 했다.

..........훈구파와 사림파로 사대부가 분열했던 그대로 사림도 보수파와 개혁파로 갈라지게 되엇다.  사림의 분열은 집권과 아울러 눈깜짝하는 사이에 이루어졌다, 사림들 중에서 보수파를 서인, 개혁파를 동인이라고 불렀다.  서인은 주로 훈구파 정권 때에도 정권에 참여한 사람들이고, 동인은 주로 선조가 왕위에 오른 뒤 정권에 참여한 사람들이다. -285-


-  율곡 이이가 임진애란이 일어나기 10여 년 전에 "정예 병사를 길러내야 한다" 고 한것을 유성룡등이 "평화 시기에 양병하는 것은 화를 기르는 것" 이라고 반대해 결국 관철되지 못했다.  그러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성룡이  "이이는 참으로 성인이다" 고 말했다 한다. -293-


- 역사적 진실은 서술된 역사가  그 사실이 정확한가하는 문제와 서술한 사람의 관점이 올바른가 하는 문제에 따라 결정된다.  정확한 사실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은 역사 서술에서 매우 중요하다. -300-


- 인조는 남한산성으로,왕자들은 강화도로 피신했다. 이때 남한산성에는 13,800여 명의 군사와 겨우 50일을 버틸 식량밖에 없었다.

1637년1월30일 인조느 남한산성을 나와 삼전도( 지금의 송파)에 있는 청 태종에게 무릎을 끓고 신하가 되겠다는 맹세를 했다. 이른바 삼전도의 굴욕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해 볼 문제는 그 시대의 척화론을 과연 진정한 애국심이라고 볼 수 잇는가? 이다. 상대가 안 되는 적수에게 싸울 준비도 갖추지 않은 채 선전포고만 한다면 그것은 용감한 것이 아니라 무모한 것이다. 그 결과 큰소리는  양반 관료들이 치고 전쟁으로 빚어진 피해는 모두 민중이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또 척화론자들은 청나랄를 오랑캐로 보고 명나라를 진정한 중화로 보았다.  이들이 광해군의 중립적인 정책을 인조반정이라는 정변으로 폐지하면서 까지 반대했던 것은 국가의 대외관계가 자신들의 파벌의 이해에 불리하게 작용하게 하지 않겟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국가의 대외관계를 자신들의 파벌의 이해에 철저하게 종속시켰던 것이다. -318-


-.........-322-끝. 잘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