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471/ 이진이 지음. 이순신을 찾아 떠난 여행

최해식 2016. 11. 1. 18:00

저자블로그

남해군고현면 관음포

http://frankie88.blog.me/100020442639

 


 

발갛게 상기된 태양은 삶의 의욕으로 벅차오르던 내 가슴을  닮은 것 같았다.  이순신을 만나고 돌아가는 길은 언제나 그렇게 삶의 열기로 붉게 달아올랐다.  


 

이순신은  노량해전에서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이를 근심했을 것이다. 전란이 끝난 후에도 변하지 않을  세상,  위정자들은 권력을향해 부나비처럼 모여들고 백성들은 그 누구로부터도 보호받지 못하는 세상, ... . 


 


나는 힘든 일이 생기거나 마음이 산란해질 때마다 남해를 찾곤 한다. 

그의 마지막 바다[관음포] 를 바라보고 있으면 죽을 것같이 힘든 일도 참으로 가볍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슬픔 없는 삶은 없다.

고단하지 않은 삶  또한 없다.

그러나 사람의 힘으로 이겨내지 못할 슬픔도,   극복하지 못할 시련도    없다는 것을 나는 이순신의 삶을 통해 깨달았다. 

 



 


세병관은 挽河洗兵, 즉 '은하수를 끌어와 병기를 씻다' 라는 두보의 시에서 따온 말이다. 

 


달아올랐다. 

 


[한서]와 [사기]의 [고조본기]에 나오는 '운주제승'에서 그 이름이 유래한 운주당 혹은 제승당은 과연 이름값을 했다. 

 


"한산섬에 가을빛이 저무니

추위에 놀란 기러기 떼 높이 나는구나

근심스런 마음에 잠 못 이루는 밤에

새벽달만 활과 칼을 비추는구나". 

 


몰운재 정운의 순의비는 정조 때 세워졌다.

가장 많은 공를 세우고도 선조는 그를 공신의 반열에 올릴지 않았다.

정운이 전사한 음력 9월1일의 당시 양력 일자였던 10월5일이

'부산 시민의 날'로 지정되었다. 

 


전쟁의 끝을 알리듯 아침해가 떠오르고 핏빛으로 물든 바다는 울음을 멈춘듯 고요했다. 전쟁은 그를 영웅으로 만들었지만 그는 죽음으로써 영웅이 되기를 거부한 것일까?..............

노량 관음포 차면리 쪽의 "이내기" 끝  첨망대에 서서 이순신의 마지막 바다를 바라보았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처음 본 그 바다는 너무나 스산했다. 남해안의 크고 작은 섬과 구불구불 들고나는 포구 사이, 저  좁은 바다 어딘가에서 차가운 새벽바람을 맞으면서 눈을 감았을 그를 생각하니 마음이 쓰리듯 아파왔다.

어찌 그리도 고단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을까?. 

 


400년 전 그날도 이렇게 추웠을까?

금방이라도 얼굴을 벨 듯이 날카롭고 차가운 바람이 달려들었다.

바다로 둘러싸인 '이내기' 끝으로 칼바람이 사정없이 몰아쳤다.............

밤이 깊어지고 새벽이 되면 저 바다는 더욱 미친 듯이 일렁거리며 활을 쏘고 포를 쏘던 병사들을 괴롭혔을 것이다. 하지만 독전고가 울리면 병사들은 추위도 잊고 파도도 잊고  싸웠을 것이다. 아군 적군 할 것 없이 수백 척의 함대가 뒤엉키고 나면 불타고 부서진 배 조각과 병사들의

시신이 바다 위를 둥둥 떠다녔을 것이다. -379-

 

 


1598년11월19일 이순신은 가고, 지금 나는 여기에 있다.

그의 전사 이후에도 나라는 늘 풍전등화 같았고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은 본질적으로 크게 변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