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294 / 도쿠가와가 사랑한 책 -고운기 지음

최해식 2015. 6. 26. 23:31

- 150717 읽음.

 

- 1904.8월 도쿄제국대학의 이름으로 [삼국유사]가 출판되었다.  그해 10월, 대한제국 황실 유학생으로 도쿄에 도착한 최남선은 이 책을  샀다. 그는 도쿄에 와서야 [삼국유사]를, 그것도 일본인에  의해 간행된  것을 처음 실물로 접했다. -30-

(** 내가 볼 때는 정말 감격적이지 않는가? 어쩌면 그렇게도 우리는 삼국유사에 대하여 무관심 할 수가 있었을까? 참으로 참말로....이다. 한심할 뿐이고 또 뿐이다. 본인의 우둔한 일체의 私見일 뿐이고....... )

 

(**참고글) ;

- 1905년 경부선(580km), 1906년 경의선(706km) 이 개통되, 이에 감격한 최남선은 1908년에 '경부철도가'  라는 창가를 만들었다.

일제강점 후  철도는 더욱 빠르게 내달렸다. 철도는  1911년 압록강 철도 가설로 중국대륙과 연결되엇고, 1914년 호남선(286km), 경원선(226km) 이 개통되면서 1915년까지 조선 내 총철도 길이는 1500km,

1919년까지 2197km에 이르렀다.  호남선은  1910.10월부터 1914.1월에 부설되었다. -[한국근대사 산책6.- 강준만 지음]  -115-

----------------------------------------------------

 

 

- 최남선은 그때까지 [삼국유사] 원본을 본일이 없었다. 이미 국내에서는 유통이 끊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쿄에 가 보닌 [삼국유사]가 출판되어 있었다. 최남선의 놀라움은 컸을 것이다. -32-

 

 

- 집필이 끝나고 제 주인의 손을 떠나기로는 13세기 후반, 어느 눈 밝은이가 경주 관아의 작은 창고에 묻어 둔 판본을 꺼내 손질하고 새로 인쇄하기는 16세기 중반, 그 중 한 권이 임진왜란이라는 소용돌이에  휘말려 제 땅을 떠나 이역만리 바다 건너가 새 집에 들기는 17세기 초반, 그곳에서 근대식 활자로 다시 태어나기는 20세기 초반. 제 땅을 떠난 뒤로 제 땅에서 까마득히 잊혔고, 이국땅에서 다시 테어난  20세기 이후에야 제 땅의 사람들에게 비로소 알려지기 시작한 책  이 극적인 운명의  책은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이다.

정녕 우리 역사를 지식인의 역사에서 민중의 역사로, 사대의 역사에서 자주의 역사로 바꿔 놓읗은 것이 [삼구유사]이다. 우리 문학을 지식인의 문학에서 민중의 문학으로, 사대의 문학에서 자주의 문학으로 바꿔 놓은 것이 [삼국유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땅에서 무려 600년이  넘게 정당한 평가르 받지 못했던 것 또한 [삼국유사]이다.

평가는 20세기에 들어서서야  시작됐다. 1904년 도쿄제국대학에서 출판되면서 였다. 나는 이를 '1904년 삼국유사' 라 부른다.-33~34-

 

 

- 나고야는 참 넓고 시원스러운 도시이다. 패전 후 폭 100미터짜리 중앙도로를 만들며 새로 짠 도시계획 덕분이다. 그곳의 호사문고는 본디 도쿠가와 집안이 개인문고 였으나,지금은 나고야 시가 위탁 관리한다. 시에 위탁한 도쿠가와미술관과 마찬가지로.

이 호사문고에서 나는 400여 년 전, 포로 아닌 포로로 끌려온 우리 책,[삼국유사]를 내눈으로 처음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책은 좀 하나 슬지 않고 너무나 잘 보관되어 있었다. 기실 패전의 퇴로에 정신없이 챙겨 넣었을 것이다. 무슨 책이라고 확인조차 하지 못하고, 조선 것이면 무엇이든 귀중하니 쓸어 담어라는 명령에 따라 우연히 [삼국유사]도  끼었을 뿐. 비바람 맞으며 지친 걸음 속에,권력이 무엇인지 전쟁이 무엇이지. 애꿎게  끌려 나와 겨우 목숨이나 부지하고 돌아가는  원망 섞인 어느 병사의 등짐 속에 섞였을 것이다. 보삼당해 가는 여자의 심정이 그랬을까. [삼국유사]는 제 운명의 앞날이 어떨지도 모르는 먼 길, 영문 없이 실려 갔을 것이다. -40-

 

-  에도 시대 300년을 남의 집에서 [삼국유사]는 홀로 피어 있엇다.

동시에 [삼국유사]느 우리땅에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세월 300년을 제 땅에서 버려져 있었던 것이다. -54-

 

 

- 단군신화에 관한 한 어느 기록물보다도 [삼국유사]가  가장 완벽한 이야기  구조를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이야기 그 자체가 그렇거니와 단군 이전과 이후으 역사상 계보를 놓고  보아서도 그렇다. -84-

 

 

 

- 1258년 최씨무인정권이 무너졌다 몽골과의 오랜 전쟁도 끝났다. 그러고도 강화도는 12년을 더  임시수도역활을 했다.거기에 경상도 남해로부터 한 승려가 올라왔다. 일연은 1261년, 그의 나이 55세 때, 임금의 부름을 받아 서울로 거서 선월사에 주석하였다고 그의 비문은 전해 준다.

 

왜 임금은 그를 부른 것일까?

최씨정권이 물러난 마당에 새로운 정권 담당자를 돕는 승려가 필요했을 것이며,일연은 거기서 선택된 대타였다.고 연구자들은 주장한다. -90-

 

 

- 이계복이 찍어 간행한  [삼국유사]  임신본 가운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완본 4종 결본 4종 도합 8종이다.

가장 먼저 알려진 것은 호사문고본이다. 1904년 도쿄대학의 배인본으로 나와 세상에 알려졌다.

그 다음이 순암수택본이다.  1925년 교토대학에서 간행하였다.  호사문고본이  근대식 활자본인데 비해  이는 원본의 영인본이엇다. 그러므로 원본의 형태로는 처음  일반에 소개돼었다. 순암수택본은 [동사강목]을 쓴 순암 안정복(1712~1791)이 보았던 책으로 여겨져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그러나  책의 본디 주인은 김연(1487~1544)이다.  김연의 마지막 임지는 경주부윤이엇다. 그는 1512년 에 간행된  [삼국유사]를 구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의 아들 부의는 이 책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것임을 밝히는 도장을 짝어 놓았다.  이로부터 200여 년 뒤, 안정복이 어떤 경로로 이 책을 구했는지는 알려져 잇지 않다.  안정복의 손길을  떠나 다시 100여 년,  1916년 일본 학자 이마니시 류(今西龍) 가 인사동에서 구입하여 교토대학을 통해 세상에 보여 주었다.  -114-

 

 

- (결과적으로) 임신본은 [삼국유사]의 완본을 오늘날까지 남아 있게 했다.

이계복이 다시 찍지 않았더라면,오늘날 우리는 [삼국유사]의  전모를 대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경주에서 [삼국유사]를 다시 찍은 지 꼭 80년 만인 1592년에 임진 왜란이 터졌다. 7년 전쟁은 처참한 것이엇다. 전 국토가 유린된 이 전쟁이 끝나고 난 다음 조선으 땅은 텅 비었다. 유형의 문화 재산은 잿더미로 변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왜적을 물리친 것만으로 다행이엇다.  이런 와중에 퇴각하는 왜군의 전함에는 패전과 어울리지 않는 전리품이 가득했다. 주로 책이었으며, 새로운 실력자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바쳐졌다. -117-

 

-1.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전국시대 나고야 번의 번주였다. 1582년 부하의 습격을 받아 자살하고 말았다.

2. 도요토미 히데요시 (豊臣秀吉),나고야의 가난한 집 아들로 태어난 그는 처음에 오다의 신발 챙기는 종이엇다. 1598.8.18일 병사했다.

3.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나고야 바로 옆의 미쓰가와(三河) 번의 번주였다. 도요토미가 죽을 때까지 무릎을 꿇었다. '기다림의 귀재'였다. 도요토미가 죽은 5년 뒤, 1603년에 천하의 권력을 손에 쥐었고, 일본 역사상 세 번째 막부를 열었다. 에도(江戶)막부이다. -126~128-

 

-나고야는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배출한 지역이다. 오랜 전쟁의 풍파를 잠재우고 일본 역사의 근세를 열었던 풍운아 세 사람이 한 동네 출신이었다는 점이 이채롭다. 최종 승리자는 이에야스였는데,에도에 막부를 연 다음, 나고야에는 오와리 번을 만들어 그가 총애하던 아들(막내) '요시나오'(義直)를 번주로 심었다.

이에야스가 오와리 번을 특별히 여긴 것은 이 일대가 갖는 전략적 요충이 감안된 결과였다. 그때까지  일본의 중심이엇던 관서를 버리고 관동으로 이주한 이에야스는  못내 불안햇다. 관서에는 아직도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생각하는 번주들이 많았다. 엄청난 규모의  나고야 성을 만든 것도 그런 까닭이었다.  -144-

 

 

- 몽골은 7년전에 이어 두 번째 일본 침공을 고려에 요구했다. 1,000여 척에  가까운 배를 만들어야 했고,또  병력을 동원해야 했다  왕에게는 개성에 있지 말고 현장에 내려가 지휘하라는 엄명이 몽골로부터 떨어졋다.(?) 그래서 경주에 행재소를 차리고 내려왔지만, 외롭고 지친 왕은

일연을 부른것이다.  1281년 봄,충렬왕은 청도의 운문사에 있던 일연을 경주 행재소로 불렀다.  -149-

 

 

- 박재상 이야기에 보이는 일연의 일본관 ;

일연은 [삼국유사]를 일본원정 전후에 완성했다. 오랫동안 왜국의 침략에 시다려 온 한반도 남동해해안에서 보낸 그는 일본에 대해서 좋지 않은 감정이 자리 잡고 있었고, 원정을 전후한 비감한 분위기가 그것을 더욱 키웠으리라 보인다.  다소 무리가 따른는 비약을 하자면, 출정하는 군사들에게 어떤 적개심을  불러일으켜 줄 임무가 그에게 떨어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 -154-

 

- 도쿄의 국회의사당에 자리한 일본의  국회도서관의 고전적실에는 임진왜란 때 가져간 우리책 수천 권이 보관되어 잇다. 이들은 대부분이 기증된 책이 대부분인데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출병했던 무사들의 후예들이다.  우리가 관심을 갖고 추적하는 [삼국유사]도 그렇게 바다를 건너 갔다.-157-

 

 

- 오늘날 일본의 샐러리맨 문화는 세계가 다 안다. 정확성과 책임감에서 그만한 샐러리맨을 가진 나라는 없다. 이런 문화는 이미 에도 시대에 저들의 선배인 사무라이가 만들어 준 것이다. 무력보다는 충성,의리,이무수행같은 덕목만이 남았다, 그러기에 그들은 마치 오늘나르의 샐러리맨 같은 직장인이 된었던 것이디.  그들읠 이뭄무가 세밀하고 구체적이무로 일에 대한 전문성과 책임성이 발달하엿다. 익서이 사무라이의 새로운 근성르로 자리 잡는 것이다.  -189-

 

- 세계에서 가장 성실한 샐러리맨은 역시 일본인이다. 에도 시대의 사무라이로부터 만들어진 규칙과 정확성은 샐러리맨의 바탕이 되엇다.

18세기 일본 사무라이에게는 전쟁이 사라진 상황에서 무력보다는 충성,의리,임무수행같은 덕목만이 남았다, 그러기에 그들은 마치 오늘날의  샐러리맨 같은 직장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들의 임무가 세밀하고 구체적이므로 일에 대한 전문성과 책임성이 발달하였다. 이것이 사무라이의 새로운 근성으로 자리 잡는 것이다.

오와리 번에서 [삼국유사]는 잘 관리되었다. 이렇게 된  데는 전문성과 책임성를 갖춘 사무라이의 공이 컸다. -199-

 

 

-  도쿄 23구 가운데 부자들이 모여 산다는곳이 세타가야(世田谷) 區이다. 이 구 안에 '고도쿠지'(豪德寺)에는  히코네 번의 16대 번주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1815~1860)의 묘가 있다. 일본인들은  이이 나오스케의 묘를 문화재로 지정하였다.

나오스케는 번주로 있는 동안 막부의 신임을 받았고  저물어 가는 막부를 살리려고 분골쇄신했다.  1858.6.19일 미일화친조약도 그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막부의 지시만 받고 천황도 모르게 진행된 이 조약을 계기로 그는 존왕양이파의 공격 표적이 되었다. 그럴수록 그는 표독스럽게  그들을 다스렸다  "유신의 지사를 대거 죽인 대악인"이라는 평가와 , "개국을 단행해서 일본을 구한 정치가" 라는 평가가 상반되남아 있다.

1860.3.3일,눈 내리던 아침,미토 번의 사무라이 17인과 사쓰마 번의 1명이 에도 성에 출근하는 나오스케를 사쿠라다 문 앞에서 습격, 암살하였다. 저 유명한 '사쿠라다 문의 변'이다. 이를 계기로 존왕양이파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개시하였고, 나오스케의 죽음은 기울어 가는 막부의 마지막을 보여 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던 셈이다.  -277~279-

 

 

- [삼국유사]는 13세기 말 저자의 손을 떠난 이래 오랫동안 잊힌 책이었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책이었다. 어쩌다 읽은 몇 사람도 결코 흔쾌한 평가를 내린 적 없었다. 그런데 20세기에 들어 집중적인 조명을 받기 시작하엿다. 오늘날의 '삼국유사 현상'은 20세기의 산물이다. 그것이 진실이다. -337-

 

-......................-345-긑.잘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