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710읽기 시작함니다.
- [삼국유사]보다 거의 한 세기 반 앞서 나온 [삼국사기]의 저자는 충실한 사료들을 무시 또는 간과하는 한편 자기 나라의 역사 전통을 밝히는 데에 관심이 적었으며, 이와같은 경향은 장래 유교의 일색화와 함께 더욱 그것의 강화를 지향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그들과 사상적 입장을 달리하는 일개 "이단異端"의 집필로 된 [삼국유사]의 출현은 우리나라 역사학계에 극히 중요한 의의를 부여하게 되었다.
조선 초기의 유학자 권근의 [동국사략]도 황탄과 비리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삼국유사]의 편찬 체계를 답습하게 디었으며, 1484년에 편찬된 서거정의 [동국통감]도 비록 구차스럽게 "外紀"라는 편목을 따로 붙여 이 부분의 기사를 별도로 취급하는 형식을 취하기는 하였으나, 그것 역시 삼국 이전의 역사 전통을 [삼국유사]의 편차에 준하여 기술하였을 뿐만 아니라 많은 기사들을 [삼국유사]로부터 인용하고 잇다. -17-
- [삼국유사]는 그 저자가 이단이건, 그 내용이 허탄하건, 그 자체가 갖춘바 일정한 역사 전통관에 입각한 편찬 체계나 그 내용이 가지는 사료적 가치와 아울러 후대에 편찬된 역사 고전등에 준 영향은 막대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삼국유사]가 가진 다른 중요한 특징이 하나는 이상에서 열거한 많은 종류의 사료들이 저자 자신의 기억이나 지식으로 소화된 자료들을 주관적으로 엮어 서술된 것이 아니라, 이 책의 많은 부분에 해당하는 분량이 당시의 국내외 고전 문헌들로부터 광범위하게 인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더구나 이 자료들을 인용한 국내외 고전들 대부분이 오늘날에 와서 失傳실전. 또는 인멸된 문헌이라는 사실은 이 책의 문헌적 가치를 더욱 높이는 조건이 되고 있다. 이 책이 인용하는 중국 고전만 27종에 달하며 우리나라 고전은 책명이 확실한 것만 하더라도 실로 50여 종에 미치고 있고 이외에 古記,鄕記 등 약칭,범칭으로 표시한 문헌도 무수하다. 이와같이 [삼국유사]는 오늘날에 와서 이미 인멸되고 없어진 수많은 문헌들을 인용함으로써 고증과 소개의 풍부한 면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이 문헌들의 인용된 편린들을 통하여 귀중한 우리나라 "고기", "향전"들을 더듬으면서 많은 典故전고. 자료와 아울러 문화사적 자료들을 딴 몫으로 찾게 된다. 다른 일례로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랜 고전인 [삼국사기]보다도 반세기 이상 앞서 저작되어 이미 失傳실전된 지 오래인 [가락국기]와 같은 귀중한 문헌도 요약은 하였으나 그 전모를 남기고 있음은 풍부한 인용을 특징으로 삼은 이 책이 아니고는 기대하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이와 같이 [삼국유사]는 역사,지리, 문학 등 각 분야를 통하여 이 책이 없엇더라면 영구히 얻어볼 수 없는 단벌 자료들을 집중적으로 보유하고 잇는 문헌임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저자는 불교 승려이면서도 유교적 정치도덕을 어느 정도 정확히 비판할 수 있는 높은수준의 유학지식을 가지고 잇었으며 그런만큼 그는 유학자의 손으로 편찬된 [삼국사기]를 어디까지나 비판적으로 대하였으며 그 결함을 "유사"의 명목으로 보충하는데에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리하여 그는 [삼국사기]의 결함으로 보이는 역사의 전통과 주체성을 보충하였으며 "해동적"이고, "삼한적"인 자료는 그것이 속되든지 허황되든지를 불문하고 이를 배제하지 않고 힘써 수록하기에 노력하였다고 할 것이다. -18~19-
-일연은 1206.6.11일 (고려 희종2년) 경주 장산현의 한 평민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본명은 김견명이며 字는 희연이고 불교식 이름은 보각이다. 그의 아버지는 김언필이다. 그는 9세에 중이 되어 20세에 불교 국가 시험에 최우등으로 합격해 이름을 날렷으며 그후로 여러 절에서 선 공부를 전문하여 많은 제자를 두었으며 76세에느 충렬왕이 충조라는 호를 그에게 주어 국가 최고 승적인 國尊으로 책봉하였다. 그는 1289.7.8일 84세를 일기로 경북 군위군 '인각사'에서 별세하였다. 이곳에는 그의 행적을 새긴 비석이 있다. 이 비문에 의하면 그는 어릴 적부터 총명하였으며 불경 및 유교 서적도 섭렵하여 제자백가의 학설에 능통하였다.
그의 저서로서는 불교 서적 100여종이 잇었다고 한나 이 저서들은 현품은 고사하고 책이름마저 전하는 것도 몇 종 못 되는 터에 이 비문에서도 소개되지 않은 [삼국유사] 한 종이 오늘날까지 전존하였다는 사실은 실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저자가 [삼국유사]를 쓴 연대는 정확히 밝힌 기록이 없으나 76세에서 84세(1281~1289) 에 사망하기 까지 이 책의 최종 탈고는 이 사이 7~8년간으로 추정될 뿐이다.-20~21-
- 경주시 동천동에 있는 금강산에 '사방불'이 있는 굴불사 터와 백률사가 있다. -120-
- 춘추공은 8년 통치(654~ 661) 하다가 죽으니 수가 59세였다.
문희소생의 아들6명, 서자들로서 3남2녀를 두어 모두 합하여 11 명이다. 왕의 식사는 하루에 쌀이 서 말이요,수꿩이 아홉 마리였는데 경신년(660)에 백제를 멸망시킨 후부터는 점심을 없애고 다만 아침 저녁만 먹었는데 그래도 하루에 쌀 여섯 말,술 여섯 말,궝 열 마리였다. -125-
- 45대 신무왕 때 궁파(장보고)는 왕의 배신을 원망하여 반란을 도모했다. 청해진은 완도읍 장좌리에 있는 장도(장군섬)에 있다.-176-
- 49대 헌강대왕시대에 서울로부터 동해 어귀에 이르기까지 집들이 총총 들어섰지만 초가집 한 채를 볼 수 없었고 길거리에서는 음악소리가 그치지 않았으며 사철의 비바람마저 순조로웠다. 이때에 왕이 개운포(지금의 울산) 에 나가서 놀다가 돌아오는 길에 바닷가에서 쉬던 중 구름과 안개가 끼어 길을 잃어버렸다. 개운포(=구름이 걷힌 포구) -179-
- 헌강대왕이 돌아온 후에 영취산(=문수산) 동쪽에 절을 지어 망해사라 불렀으니 이는 용을 위하여 설치한 것이다. 망해사 터에는 그 당시의 부도 두 기가 남아 있다. 울산시 울주구 청량면 율리에 망해사 터가 있다. 그 터에는 새로 지은 망해사가 있다. -181-
- 35대 경덕왕이 백률사로 놀러 가는데 산 밑에 닿으니 땅속에서 염불 소리가 나므로 거기를 파게 하여 큰 돌을 캐내니 돌 사면에 사방불을 새겼으므로 그곳에 절을 세우고 '굴불사'(부처를 파내다) 라하였다.
경주시 동천동의 금강산 백률사 들목에 굴불사 터가 있다. 거기에는 땅 속에서 캐냈다는 사방불이 있다. -280-
(**참고글) ; http://younghwan12.tistory.com/3795
" 굴불사터 사방불과 백률사 구경 "
- [삼국유사]가 우리 민족의 고전임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 책이 우리나라 역사뿐만 아니라 민속,언어,종교,문학 등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삼국유사]으 가치는 연구자들 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들에게도 훌륭한 이야기책으로서 손색이 없다. 고대 국가들의 건국 신화에서부터 승려들의 기이한 일화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이야기를 담고 ㅇ 있는 이 책은 훌륭한 문학 작품이자 민족얼이 살아 숨쉬는 우리 문화의 보고이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삼국유사]를 제대로 읽은 사람을 찾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의 원뜻을 제대로 파악하며 읽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삼국유사]가 널리 알려져 잇으면서도 제대로 읽히지 않는 데에는 이 책이 가지고 있는 텍스트로서의 한계가 큰 원인으로 꼽힌다. 그만큼 삼국유사는 해석하기가 쉽지 않을 뿐더러, 번역 또한 어렵다는 것이다. 그리고 본本 책에서 참고로 한 [삼국유사고증]은 일본의 삼국유사연구회가 1995년 완성한 다섯 권으로 된 [삼국유사]역주본이다.
일본에 우리나라 역사서인 [삼국유사]를 전문으로 연구하는 학술모임이 있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그렇게 긴 시간 동안 한 권의 책을 파고들었다는 점은 더욱 놀랍다. 삼국유사연구회원들은 40여 년 동안 지속적으로 [삼구유사]를 강독하며 연구해왔다고 한다. [삼국유사고증]은 이러한 노력의 산물로, 원문 교감은 물론 번역문의 서너 배에 달하는 상세한 주석은 혀를 내두르게 한다. 그들은 왜 이웃나라의 역사서에 그토록 공를 들였을까? 삼국유사연구회는 미시나 아키히데(三品彰英)에 의해 1959년에 창설되었으며, 지금은 그의 제자인 와카야마 대학의 무라카미 요시오(村上四男)교수가 이끌고 있다.
옛 사람들은 책을 교열하는 일을 가리켜 "소진掃塵" 이라고 하였다. 여러 번 쓸어도 먼지를 다 없애지는 못하는 것처럼 몇번씩 원고를 보아도 오류가 눈에 뛴다는 이야기이다. -460~462-
- [삼국유사]에 나오는 지명과 지형들을 보면, 천년 세월잉 남긴 흔적이란 그리 뚜렷하지 않은 수가 많았다. 말하자면 천년 세월이 별것 아닌 것이 아니라 사람의 백년도 못 되는 일생이 별것 아니라는 것을 그곳들은 말하고 있는 듯했다. 그러난 신화의 현장에서 파괴된 구조물들이나 알아볼 수 없도록 뒤죽박죽이 된 지형들은 거개가 자연 현상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별것 아닌 기간 동안 머물다 갈 뿐인 못난 사람들의 짓이었다. 그러나 그 폐허가 된 신화의 현장에는 [삼국유사]에 요목조묙 씌어 있는 여러 자잘한 구조물들의 잔해들이 부서진 채로라도 남아 있는 수가 많았다. 그런 것을 감동 없이 바라보기란 쉽지가 않았다.
1998.1월 말에는 20년 만의 대설이 경주에 내렸다. 천년 전 경주의 그 자리에는 어느 겨울날 자욱하게 눈이 내려 쌓여 있기도 하였을 것이다.
경주의 이 사진들은 천년 시간이 쓰다듬고 지나간 후, 지금 현재 시점의 현장이다. 헛될 것이라는 점을 뻔히 내다뵤면서도 지금보다는 지나간 시간에 정서적으로 더 가까워지려고 애써면서 찍었다. -463~464-
- ..........-464-끝.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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