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역사학계의 두가지 조류중에서 내가 진보적 연구자 를 주로 비판한 것은 보수적 연구자 들의 문제를 과소평가해서가 아니라 진보적 연구들을 존경하고 그 만큼 기대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며,다른 정치적 의도가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한국 독자들이 오해가 없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8-
-19세기 후반 , 일본은 서양의 충격에 직면하면서 새로운 국가구상을 전개하기에 이른다.(....) 메이지유신 과정애서 왕정복고,판적봉환(1869년 모든 다이묘오가 영지와 주민을 조정에 반환한 지방제도개혁). 폐번치현 등 일련의 사태는 '봉건제'에서 '군현제'로 변화 했다. -141-
-일본사에서는 중세와 근세의 구분을 토요또미정권성립(1585) 을 분수령으로 한다. 그렇다면 임진왜란은 근세 초기에 일어난 커다란 사건이아다. 그와 마찬가지러 일본 근대의 시작을 알리는 커다란 사건인 메이지유신(1868)을 전후해서도 '정한론' 이 나오고,결국에는 일본의 한국지배로 이어졌다. 다시 말하면 일본역사에서 근세와 근대 의 시작은 모두 한국침략과 깊이 결부되어 있었다. (.......) 임진왜란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실패했다는 점에서 일본의 패배였다고밖에 할 수 없지만,일본이 임진왜란을 퐈연 패배로 인식했느가 하는 점이다. 그리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원인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임진왜란은 어떠한 조선인식을 바탕으로 일어났으며,또 임진왜란 후에 그 인식은 어떻게 변화했는가 하는 것이다. -146-
-임진왜란 당시 조선정부의 중추에서 전쟁을 지휘한 유성룡이 전후에 집필한 [징비록]은 일본에서 1695년 처음 간행된 이래로 몇차례에 걸쳐 번역 간행되었다. 1695년 에도에서 출판된 [징비록]의 서문은 저명한 일본 유학자인 '카이바라 에끼껜'이 썼다. 카이바라는 서문에서 고전을 인용해 兵에는 다섯 종류가 있으나 토요또미 히데요시의 조선 출병는 탐.교.분의 兵으로 천도가 미워한느 바로서,패배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나아가 대국이라 하더라도 호전적이면 멸망하고,천하가 평안하더라도 전쟁을 잊어버리면 위험하다는 말을 인용하면서 조선은 후자에 해당하며,국가가 망하기 직전이았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카이바라' 의 평가는 비교적 객관적이며 토요또미 히데요시의 패배를 냉정하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런 견해는 극히 소수였다. -148-
-토꾸가와시기부터 근대에 걸친 일본사 연구에서 근대화 패러다임을 견인한느 역할릉 담당했ㄷㄴ 이가 마루야마 마사오' 이다.
마루야마는 중국문화에 대한 일본과 조선의 관계를 비교하면서 일본을 '누수형' , 조선을 '홍수형' 으로 파악하고 '누수형' 의 일본은 중국문화의 영향을 선택적으로 수용하려 한 데 반해 지리적으로 가까운 한국은 선택의 자유 없이 중국 문화에 동화되고 말았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여기에는 두가지 점이 간과되고 잇다. 하나는 한국이 중국문화를 전면적으로 수용했다고 볼 경우 수용하는 측의 사회가 고도의문화적 기반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이다. 예컨데 유교모델의 핵심인 과거제도 도입 문제를 생각해봐도 그것이 현실적으로 기능機能하기 위해서는 인쇄기술의 발달과 그에 따른 서적의 보급이라는 조건이 필수적인데,이러한 조건을 만족시키기란 가령 15세기의 일본에서는 불가능했다. - (....) 또한 '홍수형'의 한국에서 중국문화를 전면적으로 수용함으로써 18세기 후반 유교지식인중에서 가톨릭 교의에 관심을 가지고 스스로 베이징에까지 가서 세례를 받는 집단이 등장했다는 것,19세기가 되면 유교이념이 일반민중에까지 보급되는 가운데 대다수 사람들이 양반을 지향하게 되고 그 움직임은 현대에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조선시대의 문과급제자 중에 때로는 한족漢族,위구르족,여진족 등 다양한 출신배경을 가진 인물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던 것 등이 그것이다, 이라한 사례는 유교모델 수용과 매우 밀접한 관계 속에서 발생한 현상들이며 일본과 큰 차이를 갖는 것이었지만,당시 마루야마의 시야에서는 전혀 고려의 대상인 되지 못했던 것이다. -216~217-
-일본 중세 역사연구가 ' 무라이 쇼오스께' 는 국가의 상대화를 강조하였으며, 실재로 그의 연구에 대하여 한국의 수많은 연구자가 비판적이었지만, '일본인' 한국사 연구자로서 나 자신도 무라이의 주장에는 많은 문제점인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첫번째로 일본과 한국의 관계에서 왜구문제가 다른 문제와 관계 없이 거론되고 잇다.무슨 말인가 하면 한국인의 뇌리에는 왜구라는 기억이 토요또미 히데요시의 침략(이것은 최대 규모의 왜구라는 성격을 갖는 것이었다) 및 근대의 침략.식민지지배의 역사와 연결되면서 三者가 일체화되어 기억되고 있다. -243~ 245-
-한국에 3천여개 정도 존재한다고 일컬어진느 부계혈연집단 중,경주 설씨가 있다. '설문질' 이라는 인물이 이 일족의 시조인데,그는 위구르족 출신으로,그 손자에 해당하는 ' 遜' 이 고려에 왔다고 한다. 손은 고려에서 중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손들 중 여럿이 고려말기부터 조선초기에 걸쳐 문과에 급제하였다, 손의 아들 '장수' 도 그중 한명으로,건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명나라와의 교섭임무를 수행하였다. 또한 손의 손자이자 장수의 조카에 해당하는 '순' 이라는 인물도 세종 때 중신으로 ,집현관 부제학의 지위에 봉해졌을 뿐만 아니라 훈민정음 창제에도 참여하고 [삼강행실도] 편찬을 주도하였다. 순의 이러한 행적은 그가 위구르족 출신이라는 점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즉,한글 창제와 관련해서는 위구르문자와 파스파(八思巴)문자 등의 표음문자에 관한 그의 지식이 큰 의미를 가졌을 것이라는 점, [삼강행실도] 같은 도판이 들어간 서적은 몽골 치하 원왕조 때 대량으로 출판된 것이라는 점 등이 그런 점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한국의 '부계혈연집단' 중에는 경주 설씨처럼 시조가 한반도 이외 지역 출신인 사례를 다수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집단을 '귀화씨족' 으로 부르는데 한국 전체 인구의 20~ 25%가 귀화씨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247-
끝.논문집이라 분량도 많고 내용도 딱딱하고 지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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